소설리스트

01. 잊지도 못하게 (1/89)


01. 잊지도 못하게
2022.10.02.


손님맞이 준비로 정신없는 비행기 안, 갤리(승무원들의 업무 공간)의 라디오를 담당하는 화영이 가십거리 하나를 물어왔다.


“선배님, 그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우리 항공사 부사장이요, 멀쩡하게 생겨서…… 파혼당했대요.”

“파혼?”

진선미 사무장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사십을 한참 넘은 나이였지만 화장과 염색으로 무장한 그녀는 그럭저럭 삼십 대처럼 보였다.


“네. 약혼한 지 일주일만이라니까 완전 초고속이죠.”

“와…… 재벌도 파혼을 당하네.”

“그러니까요. 애초에 집안끼리 약속일 텐데 깬 걸 보면…….”

화영은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자 쪽에 숨겨둔 연인이 있는 거죠. 신분 차이 때문에 헤어졌지만 끝끝내 잊지 못했다, 뭐 이런 스토리?”

“화영 씨, 드라마 너무 많이 봤다!”

사무장은 화영의 어깨를 찰싹 내리치며 하이톤으로 웃어젖혔다. 방정맞은 웃음이 마치 끼룩거리는 갈매기 울음소리를 방불케 했다.


“하아…….”

일할 마음 없는 이들의 수다가 비행기 안에 쨍쨍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어디선가 작은 한숨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남은 몸을 둘로 쪼개고 싶은 심정인데, 둘이 하나가 되어서 어쩌자는 건지.

다정은 답답한 마음에 선배들을 몰래 흘겨봤다. 하지만 한 쌍의 조류는 어느새 커피까지 홀짝거리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한다던데 회장님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셨나 봐요.”

“에이, 얼씬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는 눈이 높은 거겠지.”

“아니라니까요. 전에 어떤 여비서가 겉옷을 건네주다 실수로 어깨를 한 번 만졌는데…….”

“선배님, 어메니티 세팅 끝났습니다.”

티타임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정이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 좀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분명했지만, 화영은 대충 고개만 끄덕일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응. 다정 씨, 수고했어. 나머지도 마저 부탁해요.”

“……네.”

짧은 대답을 마치고 뒤로 돌아선 다정은 늘 그렇듯 오늘도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참자, 참아. 이 비행이면 영진이 레슨비 두 번은 나온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던 동생은 내로라하는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예고에 재학 중이었다.

예술 고등학교의 줄임말인 ‘예고’. 하지만 동생의 유일한 보호자인 다정에게 예고는 주머니를 탈탈 터는 깡패 학교를 뜻하는 말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등록금이며 기숙사비, 거기다 입시를 위해 따로 받아야 하는 개인 레슨까지. 그 모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정은 안 그래도 얇은 허리를 더 바싹 졸라매야 했다.


“사무장님 어디 계세요?”

다정이 호그와트 입시도 뚫을 기세로 주문을 외웠을 때 즈음, 지상직 직원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점프싯(승무원 지정 좌석)에요.”

“이거 업데이트된 F클래스(일등석) PIL(승객 명부)인데 좀 전해주시겠어요?”

“업데이트요? 네. 알겠습니다.”

퍼스트 클래스 체크인은 분명 두 명으로 마무리되었을 텐데. 의아한 눈빛으로 리스트를 훑자 이전 명단에는 없던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CHA/TAESANG MR VVIP


‘차…… 태상?’

어딘지 낯익은 이름이었다. 게다가 VVIP라니. 싸한 예감이 등줄기에 퍼짐과 동시에 몸이 저절로 휙 하고 돌아갔다.


“사무장님, 오늘 퍼스트에 VVIP 타신답니다!”

“뭐?!”

그때까지 립스틱을 고쳐 바르며 여유를 부리던 사무장의 표정에서 여유가 싹 사라졌다. 바닥이 쿵쿵 울리도록 뛰어온 그녀는 다정의 손에서 리스트를 빼앗듯 낚아챘다.

잠시 후, 이름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마, 망했다…….”

“왜요? 누가 타는데요?”

“파혼당한 놈.”

읊조리는 듯한 사무장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메아리쳤다.


***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졌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화영은 커튼을 빠끔히 열고 ‘파혼당한 놈’의 생김새를 구경했다.


“와…… 생긴 건 장난 아니네.”

“쉿! 화영 씨, 입 잘못 놀렸다가 목 날아가고 싶어?”

어느새 곁에 다가온 사무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커튼을 쳤다.


“모, 목이요?”

“그래. 저 사람 손에 날아간 목이 한둘인 줄 알아? 정신 바짝 차려. 오늘 조금이라도 책잡히면 사무실 불려가는 거로 안 끝나.”

이참에 말을 해둬야겠다 싶었는지 그녀는 떨어져 있던 다정에게도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들 잘 들어요. 그냥 아무 VVIP도 아니고 ‘그 부사장님’입니다. 화장실 먼지 한 톨, 머그잔 손잡이 각도 하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세요.”

“네. 사무장님.”

“그리고 오늘 식사 서비스는…….”

기내를 걸을 땐 발소리도 내지 말아라, 모든 대화 내용은 빠짐없이 보고해라. 황당한 주문 사항까지 포함된 일장 연설이 길게 이어지는데 마음속에 궁금증 한 가닥이 피어올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진선미 사무장은 평소 손님들에게 경쾌하고 친근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확 바꿔 놓은 인물이라니. 호기심에 자꾸만 눈동자가 슬금슬금 기내로 향했다.

그때 짝, 하고 손뼉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러니까 오늘은 절대,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됩니다. 알겠죠?”

“네.”

“네. 사무장님.”

다정은 씩씩하게 답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평소처럼 일을 시작하려는데 화영의 진심 어린 감탄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웬만한 아이돌이 타도 ‘쟤는 메이크업으로 빚어낸 얼굴이고, 얘는 다 포토샵이었네.’라며 독설을 아끼지 않는 ‘매운맛’ 화법의 소유자였다.

슬쩍 눈치를 한번 본 다정은 커튼 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

순간,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공평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짙은 눈썹은 빗어놓은 듯 촘촘했고, 새까만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반지르르했다. 그 밑으로 펼쳐진 콧날이며 턱선은 하도 날렵해 마치 붓으로 그려놓은 것 같았고.

말 그대로 빚어놓은 듯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단단한 인상에서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럽고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뭐야, 관심 없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다정 씨도 별거 없네.”

홀린 듯 객실을 바라보는데 허리춤을 쿡 찌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입술을 미끈하게 올린 화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 아, 아뇨. 콜벨이 울려서요.”

다정은 때마침 울린 콜벨을 핑계 삼으며 고개를 돌렸다. 벨이 울린 1D 좌석은 마침 부사장의 옆자리인지라 시치미를 떼기 딱 좋았다.


“제가 가 볼게요.”

다정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의 화영을 뒤로하고 갤리를 나섰다.

객실로 들어서자 카펫을 물들인 한낮의 태양이 발에 밟혔다. 정오를 막 지나가는 시각.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은 조각상 같은 남자의 얼굴에도 흔적을 남겼다.

검은 눈동자는 눈꺼풀에 반쯤 덮여 있었고, 한쪽 볼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만든 그림자가 아른아른 맺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는데 순간 남자의 눈꺼풀이 빠르게 들렸다. 숯으로 칠해놓은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정면으로 맞았다.

당황한 다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눈빛만으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묘하게 뻣뻣했고 목 안쪽이 살짝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대로 굳어 있기를 잠시, 눈을 깜빡임과 동시에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서서히 풀어졌다. 다정은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발끝이 향하는 곳은 벨이 울린 옆좌석이었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거…… 자막이 영어로 나오는데 어떻게 바꿉니까?”

은빛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노신사는 모니터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다정은 손님 옆에 단정하게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쪽 리모트 컨트롤로 자막 설정에 들어가서…….”

설명하는 내내 등과 목 언저리가 따끔따끔했다. 아니, 따갑다 못해 눈길이 피부 위에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직원 역량 테스트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혹시 뭔가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쳐다보는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생각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탁구공처럼 튀었다.


“아, 이렇게 간단한 걸 괜히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안내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는데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다정은 의아함에 커지려는 눈을 꽉 잡아 누르고 재빨리 부드럽게 둥글렸다.


“손님,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

묵묵부답.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딱히 시킬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중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 차마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다정은 좌석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뭐 도와드릴…….”

“한다정.”

“네?”

남자의 입에서 갑작스레 제 이름이 튀어나온 탓에 평상시 모습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목소리에서 당황한 티가 그대로 묻어났고 눈은 금귤처럼 동그래졌다.

다정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들여다봤다. 그러자 조각 같은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저음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한다정 승무원.”

“아…… 네. 맞습니다. 한다정 승무원.”

탑승 전 승무원 리스트를 살펴봤을 리는 없으니 명찰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눈동자가 한 번이라도 움직였던 적이 있었던가.

집요할 정도로 눈을 맞춰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다정은 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찬찬히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보는데 그가 생각의 허리를 뚝 끊고 들어왔다.


“이래서는 잊고 싶어도 못 잊겠군요.”

“아…… 네. 좀 특이하긴 하죠?”

다정은 멋쩍게 웃으며 명찰을 손끝으로 쓸었다. 이름을 따라 움푹 파여 있는 선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손끝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 이내 다시 시선을 밀어 올렸다. 압정으로 고정하듯 바라보는 눈빛이 하도 강렬해 눈동자가 섞여버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띵.

그때, 맞은편 통로에서 작은 벨 소리가 울렸다. 다정은 자세를 바로 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시고요.”

“네. 그럴 겁니다.”

태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하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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