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새로운 발견
(20/20)
20. 새로운 발견
(20/20)
20. 새로운 발견
2023.08.06.
아스페이런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되물었다.
“뭐라고?”
“슈리아 양이 귀여운 용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만.”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침묵. 아스페이런은 미간을 문지르다가 불쑥 말했다.
“네 귀여움의 기준은 믿을 수 없어.”
“그 말씀은 그냥 넘길 수 없군요. 저는 확고한 기준 하에 귀여움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이 뭔데? 저번에는 털가죽을 뒤집어쓴 2m짜리 사내놈에게도 귀엽다고 했었지.”
“그 털가죽은 부드러웠으니까요.”
키아라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작은가? 동그란가? 부드러운가? 말랑한가?’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하면 귀여움의 기준선 안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슈리아 양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죠. 완벽한 귀여움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귀여움을 논하는 키아라의 모습은 다소 기이했다.
제정신이 아니군. 아스페이런은 동조를 구하기 위해 카니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니스는 주군의 기대를 배신하고 머뭇머뭇 키아라의 편을 들며 나섰다.
“마, 맞습니다. 슈리아 양은 귀엽죠. 하하하! 군주님께서는 그리 느끼신 적 없으십니까?”
헛소리라고 일갈하려 했으나, 순간 아스페이런의 머릿속에 세 마리의 개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눈밭을 뒹굴던 슈리아가 떠올랐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발간 뺨,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해낸 일들을 뽐내던 모습…….
……지금 내가 뭘 떠올리는 거지?
아스페이런은 급히 머릿속의 슈리아를 치워버렸다. 그리고 근엄하게 말했다.
“전혀.”
“정말이십니까?”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냐?”
다시 매서워진 아스페이런의 눈초리에 카니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키아라도 여상하게 서류 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스페이런 역시 펜을 쥐고 처리해야 할 안건들을 살폈다. 그러는 와중에도 ‘슈리아는 귀엽다’라는 문장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스페이런은 고개를 저어 문장을 털어냈다. 쓸데없는 잡생각이다.
약간 찝찝하게 끝나기는 했으나 어쨌든 도서관 출입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곧장 프린치아 궁의 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내가 아는 십진분류법대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아서, 필요한 책을 찾기도 어려울 듯했다.
한창 난감해하고 있는데 한 친절한 사서 분이 내게 다가왔다.
“필요한 책이 있으시다면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다행히 일이 술술 풀렸다. 아니, 풀렸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문제는 책을 찾은 다음에 일어났다.
“허어…….”
나는 신음하며 안내받은 책장을 둘러보았다. 벨트라움에 관련된 책이, 책장 한 줄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적었다.
“저, 벨트라움에 관련된 책은 이게 전부인가요?”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사서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군주님께서 즉위하신 뒤로 벨트라움에 관련된 책을 많이 폐기해서요.”
“아…….”
이것뿐이라는데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나는 대출증을 만들어서 책 세 권을 빌려 들고 사육소로 복귀했다.
그날 밤. 업무를 모두 끝마친 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빌려온 책을 꺼내서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책은 총 세 권. 「벨트라움, 재앙의 역사」, 「‘문’ 발생 시 행동 요령」, 「괴수 도감」.
오늘은 공부를 좀 하다 자야지. 유용한 정보가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일단 「벨트라움, 재앙의 역사」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대강 훑어보니 최초의 ‘문’이 열린 후 엘로스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리한 역사서 같았다.
「……최초의 ‘문’ 발생 후 2년이 지난 아르칸력 532년 2월 15일. 에브라임 로아킨 공작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북부의 패자, 로아킨 왕국의 탄생이었다.……」
말 그대로 역사책이었군. 빠르게 책장을 휙휙 넘겼다.
이후 책에서는 긴 전쟁 끝에 엘로스 대륙이 북부의 로아킨, 서부의 사막 3국, 동부의 플로른, 남부의 알피아, 중앙의 루바블, 이렇게 7국으로 나누어졌다는 등의 내용이 이어졌다.
내가 몰랐던 이 세계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소설 팬의 입장에서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했던 괴수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나는 「벨트라움, 재앙의 역사」를 치우고 다음으로 「‘문’ 발생 시 행동 요령」이라는 책을 펼쳤다. 세 권 중 가장 얇은 책이었다.
제목부터가 ‘~행동 요령’이니 ‘문이 열려서 괴수를 만나면 ~하세요’ 같은 이야기가 쓰여 있겠지. 나는 별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훑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안에는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방만하게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잡고 진중하게 책을 들여다보았다.
「‘문’ 발생 시 행동요령」에서는 벨트라움 관련 재난 발생 시의 행동 요령과 함께 벨트라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서술하고 있었다.
<운바합>에는 벨트라움 관련 이야기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던 터라, 대부분 처음 보는 내용들이다.
나는 오른쪽 손으로 펜을 휘휘 돌리며 꼼꼼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벨트라움은 총 일곱 가지 지형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한 번에 한 가지 지형과만 ‘문’을 통해 엘로스와 연결된다. 이때, 엘로스와 연결되어있는 지형을 ‘표면 지형’이라 부른다.」
“표면 지형…….”
「연결되어 있는 표면 지형은 9일 동안 유지되며, 이후 하루 동안 모든 ‘문’이 사라진 뒤 다음 지형이 표면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설산 지형이 표면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9일 동안 설산 지형과의 연결이 유지된 뒤 하루의 공백을 거쳐 다음 지형인 숲 지형과 연결되는 것이다.」
「만약 설산 지형에 들어갔다가 9일이 지나 표면 지형이 다른 지형으로 바뀌게 된다면, 설산 지형이 다시 표면으로 나올 때까지 벨트라움에서 나갈 수 없다. 엘로스와 문으로 연결되는 건 오직 단 한 지형, 표면 지형뿐이기 때문이다.」
“……뭐?”
제때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표면 지형이 바뀌면, 그대로 벨트라움 안에 갇히게 된다고……?
그럼 만약에, 내가 들어갔을 때가 표면 지형이 바뀌기 직전이었다면, 벨트라움 안에서 헤매다가 그대로 인생 하직했을 수도 있었던 거네?
“최, 최애 얼굴 보기도 전에 죽을 뻔했네.”
운이 좋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일이 잘 풀린 게 기적이었구나.
나는 잠시 두 손을 모으고 나의 천운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무교인 관계로 기도의 대상은 우리 아스를 창조해주신 <운바합>의 작가님이었다.
“<운바합>를 써주셔서 감사하고…… 아스라는 갓 캐릭터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 여기서 환생시켜주신 것도 감사하고 아스랑 만나게 해주신 것도……. 뒤에 두 개는 작가님이 하신 게 맞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얼렁뚱땅 기도를 마무리 짓고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곧 반납해야 하니,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은 내용을 수첩에 메모해둘 생각이다.
시험공부를 하던 기억을 되살려 빠르게 펜을 놀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펜을 움직이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
나는 가물거리는 눈을 벅벅 비볐다. 오늘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어째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그래도 이 책은 다 읽고 자고 싶은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때마다 탁탁탁, 펜이 종이를 두드리며 군데군데 잉크가 번진다. 글씨는 죄다 하나같이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종이 위에 긴 선을 그리던 펜이 툭,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고개가 완전히 아래로 꺾인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책상 위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 *
제때 잠자리에 들지 않고 책상 앞에서 버틴 결과, 슈리아를 찾아온 것은 끝장나는 늦잠과 근육통이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슈리아는 손에 잡히는 옷을 대충 걸치고 눈곱만 적당히 뗀 뒤 후다닥 방을 나섰다. 그러나 이미 아침 8시. 평소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시각이다.
슈리아는 죄인의 심정으로 슬금슬금 지하 사육소에 들어섰다.
슈리아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삼멈머가 그녀를 보자마자 두 앞발로 바닥을 쾅쾅 타박하듯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와우우웅―! 끼우우웅―!”
“아이고, 미안! 엄마가 미안해!”
연신 사과하며 슈리아는 허둥지둥 삼멈머의 아침 식사부터 준비했다.
오늘은 사죄의 의미에서 최상급 질의 사슴 고기를 더 얹어주었다. 그제야 삼멈머가 마음을 풀고 하울링을 멈추었다.
이후 이어진 아침 산책은 흥분한 삼멈머로 인해 다른 날보다 더 고단했고, 근육통을 참고 진행한 오전 놀이시간은 평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슈리아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점심 산책도 다녀왔으니, 이제 삼멈머는 저녁때까지 자유 놀이 시간 겸 낮잠 시간이다.
“그럼…….”
슈리아는 잘 뛰어놀고 있는 삼멈머를 힐끔거리며 어제 못다 읽은 책을 슬쩍 꺼내 들었다. 아이들이 놀 동안 틈틈이 공부할 생각이다.
딸랑―.
울타리 문 앞에 설치해 둔 방문 종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응?”
슈리아는 책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울타리 너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보랏빛이 도는 잿빛 머리칼을 가진,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차분한 인상의 미인.
아스페이런의 수석 보좌관, 키아라다.
‘키아라가 사육소에 온 건 처음인데? 대체 무슨 일로…….’
아.
“맞다!”
오늘 1시 25분에 키아라가 삼멈머를 보러 오기로 했었지!
시계를 확인해보니 정확히 1시 25분이었다. 역시 아스페이런의 최측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면모가 아스페이런과 판박이다.
슈리아는 급히 책을 덮고 퍼걸러에서 내려와 키아라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키아라 씨! 좋은 오후예요. 식사는 하셨나요?”
“예. 슈리아 양은?”
“저도 물론 잘 챙겨 먹었죠! 그런데요, 키아라 씨. 방문 종을 울려주신 건 키아라 씨가 처음이에요. 이렇게 예쁜 소리가 나는데 왜 아무도 종을 안 울려주시는 걸까요? 이상하게 계속 울타리만 두드리시더라고요.”
“글쎄요. 종이 있는 줄 모르는 게 아닐까요? 좀 더 큰 걸로 바꿔보시는 건? 아니면 울타리 곳곳에 매달아두시지요.”
“오우, 그거 좋네요. 긴 끈에 종 여러 개를 꿰어서 울타리 전체에 둘둘 감아놔야겠어요.”
키아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슈리아는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키아라와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지만,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막 키아라를 울타리 안쪽으로 안내한 그때였다. 삼멈머가 후다닥 달려와 슈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몸을 낮추고 코를 씰룩이는 것이 키아라를 경계하는 눈초리다.
슈리아는 삼멈머에게 단호히 말했다.
“앉아. 옳지. 괜찮아, 손님이야.”
그 말에 삼멈머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경계를 약간 풀고 자리에 앉았다. 키아라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