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녀는 귀여워요
(19/20)
19. 그녀는 귀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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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녀는 귀여워요
2023.08.03.
파삭,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나는 멍청히 되물었다.
“……예?”
“엘바스와 엘로스는 신기하게도 사용 언어가 같지. 약간의 억양 차이만 있을 뿐. 하지만 문자는 달라. 엘바스에서 온 네가 한 달 만에 엘로스 문자로 쓰인 복잡한 글을 막힘없이 읽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데…….”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나를 아스페이런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훑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가는 게 느껴진다.
방금 내가 올렸던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아스페이런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네가 제출한 보고서, 엘로스의 문자로 적혀 있군. 철자도 완벽해. 이건 원래부터 엘로스의 문자를 알고 있던 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창문은 모두 꽉 닫혀 있고, 실내에는 온도 조절마법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쌍의 시선이 날아와 내 이마에 꽂힌다. 뒷목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엘로스와 엘바스의 문자가 다르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글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읽히고 쓸 수 있게 돼서 자각하지 못했는데. 바보도 아니고.
‘젠장, 젠장.’
이 방에 있는 세 사람 모두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뇌가 정지했다. 완전한 패닉 상태. 결국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연한 표정을 지으며 되는대로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저는…… 저는 대체 어떻게 엘로스의 문자를 알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아마 저의 사라진 기억에 그 실마리가 있을 듯한데요…… 그래서 가설을 세워보았습니다. 저는 어쩌면 학자 집안의 딸이었던 게 아닐까요?”
“…….”
“아시겠지만 엘바스에서 엘로스로 넘어온 저 같은 경우가 있듯이, 엘로스에서 엘바스로 넘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그 사람들에게서 엘로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연구하는 일을 했던 게 아닐까 하는…….”
말하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들어도 하나같이 개소리다.
하지만 ‘저는 사실 빙의자입니다. 빙의자 특전으로 모든 언어에 통달한 거예요.’ 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잖아.
지금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장전 중이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저 멀리 집어치워 버렸다.
애써 뒤집어썼던 가면을 벗어 던지자 어깨가 밑으로 힘없이 축 내려갔다. 나는 꼭 마주 잡은 손을 주무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의심스러워 보일 거라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요, 군주님. 지금 제 인생의 목표는 단 하나, 군주님께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는 것이에요.”
“…….”
“군주님께서는 저를 살려주셨고, 제게 있을 곳을 주셨고, 이름을 주셨죠. 그 순간부터 저는 군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절대 군주님께, 로아킨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운바합>을 읽는 동안, 나는 늘 아스페이런의 행복을 기원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를 결혼시키라는 명령을 잠자코 수행하고 있는 것도 아스페이런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라서였다.
만약 내게 주어진 미션이 아스페이런을 죽이라든가 왕좌에서 끌어내리라든가 따위의, 그에게 해가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대도 절대 따르지 않았으리라.
네 행복을 어느 누구보다 바라는 내 진심을 너는 알아줄까?
아스페이런이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심해 빛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우물쭈물하면서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찰나의 침묵.
곧, 아스페이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인다. 나는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척까지 오자, 아스페이런이 손을 뻗어 내 코끝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주님?”
“안다.”
“네?”
나의 어리둥절한 되물음에 그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가 내게 해를 끼칠 리 없다는 것, 진정으로 나를 따르고자 한다는 것, 전부 알고 있어. 의심해서 추궁한 게 아니라 그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모른다니 됐다.”
“그럼.”
“이제 그만 가보거라. 도서관은 자유롭게 이용해도 된다.”
뭐라 묻기도 전에 아스페이런이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시종의 손에 이끌려 집무실 밖으로 정중히 내쫓겼다.
“잠깐……!”
쿵. 하얗고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나는 얼떨떨하게 문을 올려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해결된 거 맞나……?”
“그녀를 믿으십니까?”
굳게 닫힌 문을 조용히 바라보던 키아라가 물었다. 아스페이런은 슈리아가 제출하고 간 보고서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은 여자라고는 생각해.”
아스페이런의 손가락이 보고서를 가볍게 튕겼다. 오밀조밀한 글씨가 적힌 종이에 옅은 구김이 진다.
그는 일그러진 글자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저 말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믿는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기어코 아름다운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찬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슨 일이든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줄 준비가 된 그 눈빛을 받고 있으면, 스스로가 온전히 긍정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의 여명과도 같은 빛을 뿜어내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토록 다정하고도 상냥했다. 이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가장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눈빛을 가진 이가, 타인을 해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아스페이런은 슈리아를 믿기로 했다.
보고서를 내려놓은 아스페이런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떻지? 그녀를 내쳐야 한다고 보나?”
키아라와 카니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카니스가 먼저 대답했다.
“군주님께서 슈리아 양을 믿겠다 결정하셨으니,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물으신다면…… 저 또한 슈리아 양을 믿습니다.”
“왜?”
아스페이런의 질문에 카니스가 쑥스러운 듯 뒷목을 주물렀다.
“솔직히 단순한 감이기는 합니다만…… 슈리아 양은 누군가를 해칠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거짓말을 할 때 어느 정도 표가 나기 마련인데, 슈리아 양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고요.”
키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게다가 벨트라움에 제물로 바쳐져서 엘로스로 오기까지의 정황이 명확하게 증명되었으니까요. 무슨 속셈이 있어서 계획적으로 군주님의 밑에 들어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키아라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물론, 기억을 잃은 채 마을로 흘러들기 이전의 과거를 율리시스 님의 정보부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게 수상하기는 합니다만.”
슈리아를 신하로 들인 후, 아스페이런은 자신의 사촌 동생인 율리시스에게 슈리아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란시아의 모든 정보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황제 율리시스조차도 슈리아의 과거에 대해서 조금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가 뭐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나 요정이라도 된단 말인가?
우스운 망상이었으나, 그 때문인지 아스페이런은 이따금 슈리아가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났듯이 또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이고는 했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유리창을 투과하여 쏟아진 찬란한 햇빛에 감싸인 슈리아가 꼭, 한낮의 꿈처럼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아서.
옅은 색체의 밀색 머리칼이 당장이라도 햇살에 녹아들어 부서질 것 같아서.
그래서 조바심이 들어서…….
“그런 걸 보면 슈리아 양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단 말이에요. 하하하!”
카니스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아스페이런은 뒤늦게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복기하며 당혹감을 느꼈다.
조바심이 든다고? 내가 왜? 미친 건가?
안 그래도 혼란한데, 카니스는 그 위로 기름을 콸콸 쏟아부었다.
“아! 그래서 슈리아 양에게 ‘슈리아’라는 이름을 내리신 겁니까, 군주님?”
“뭐?”
아스페이런이 오른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카니스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양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슈리아’라는 이름말입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눈 요정의 이름이 아닙니까. 외롭게 살아가던 초월자 닉스에게 찾아와 짙은 고독을 없애주고 사랑을 알려주었다던…….”
“……그런데.”
“그 동화와 지금 상황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초월자 닉스는 로아킨 가문의 시조시고, 슈리아 양은 눈 요정처럼 갑자기 나타났죠. 게다가 닉스가 눈 요정에게 그랬듯 군주님께서도 슈리아 양에게 직접 이름을 내려주셨고…….”
카니스의 말을 들은 아스페이런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저 말은 마치, 슈리아가 자신의 눈 요정이 되어주기를 바라서 자신이 그런 이름을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스페이런은 닥치라는 의미를 담아 카니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니스는 끔찍할 정도로 눈치가 없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의 지껄임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리아 양이 눈 요정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눈 요정처럼 군주님께 도움을 드리고 있는 것도 맞고…….”
“닥쳐.”
“예?”
“그만 좀 닥쳐. 어디까지 헛소리를 지껄일 셈이야.”
아스페이런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제야 주군의 언짢음을 알아챈 카니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아스페이런은 미간을 몇 번 주무르다가 말했다.
“어쨌든 슈리아는 옆에 두고 지켜볼 생각이다. 율리시스도 계속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 그리고 생각해 보니, 슈리아가 늘어놓은 말도 제법 일리가 있더군.”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자기가 학자 가문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말이야.”
기억상실증이라고 주장하는 주제에 슈리아는 참 아는 것도 많았다. 대부분 독특하고 이상한 것이었다.
만약 슈리아가 벨트라움을 연구하는 괴짜 학자 집안의 딸이었다면, 그녀가 이상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게다가 그녀의 행동에서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태가 나니까.”
“아, 맞습니다. 슈리아 양은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귀족 영애 같은 느낌이 있죠.”
혼났던 것을 그새 잊은 카니스가 또 냉큼 끼어들었다. 아스페이런은 얼굴을 찌푸렸다.
“넌 왜 그렇게 슈리아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고 날뛰는 거냐. 아니, 너뿐만이 아니지. 근위대 놈들도 장인 거리의 노인네들도 하나같이 슈리아에게 흐물흐물하더군. 대체 이유가 뭐야?”
아스페이런이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키아라와 카니스는 눈빛을 교환하며 동시에 생각했다.
아니, 저게 군주님께서 하실 말이야? 본인은 황금패를 하사하면서까지 싸고돌았으면서.
어쨌든 주군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니스는 뺨을 긁적이며 슈리아의 좋은 점을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음, 우선 슈리아 양은 매사에 일을 열심히 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지요. 늘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요.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분입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외모도 귀엽습니다.”
키아라가 담담히 선언했다. 집무실 안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