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위기의 슈리아 (18/20)


18. 위기의 슈리아
2023.07.30.


큐티, 타이니, 어썸은 괴수다.

겉으로 보기에 어떻든, 내 앞에서 얼마나 얌전하고 착하게 굴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삼멈머에게 평범한 강아지 훈련법만 주구장창 적용하고 있었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괴수에게 맞는, 좀 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괴수를 잘 돌보고 잘 키우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 그 전에, ‘괴수’란 정확히 어떤 생물이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은 괴수에 대한 지식이었다. 먼저 괴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삼멈머를 훌륭하게 제대로 키워낼 수 있지 않겠는가.

‘공부하자.’

지금부터 내 모든 여가시간을 괴수 공부에 전부 올인하겠어.

결심한 즉시 나는 괴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찾기 위해 사육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적지는 프린치아 궁의 서관에 있다는 왕궁 도서관. 아주 거대한 규모라고 하니 필요한 책을 찾기에 딱이었다.

사실 책을 뒤지는 것보다는 연구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 더 확실할 테지만……. 사육소 공사가 끝난 후로 단 한 번도 연구원들을 만나지 못해서 말이다.

보니까 똥 싸는 것은 물론 취침이나 하루 세끼 식사까지도 전부 각자의 연구실에서 해결하는 것 같더라. 연구가 어지간히도 바쁜가 보지.

덕분에 나는 사육소를 연 후부터 줄곧 혼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외롭다.’

누가 나랑 밥 좀 먹어줬으면. 나는 씁쓸하게 코를 훌쩍였다.

아무튼 그런고로 연구원들의 도움을 받기는 영 글렀고, 차선책으로 책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그런데 왕궁 도서관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나?’

로아킨의 모든 정무가 이루어지는 프린치아 궁에 있는 도서관이니, 관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음…….’

역시 만약을 대비해서 아스한테 미리 허가를 구하는 편이 좋겠지. 그 김에 겸사겸사 우리 최애 얼굴도 보면 일석이조고.

나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성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무인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이미 몇 번 이용해 본 적 있는 이 작은 무인 마차는 인력거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사람이나 말 대신 귀엽고 정교한 사슴모양 인형과 연결되어있었다.

듣자하니 마도 공학 어쩌구로 만든 탈것이라고 한다. 작동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페달과 핸들로 간편하게 조종할 수 있어서 기계치인 나도 쉽게 다루고는 했다.

“좋아!”

시동을 걸자 귀여운 사슴 인형이 발굽으로 탁탁 바닥을 두드린다.

자, 그럼. 우리의 위대하신 군주님을 알현하러, 가보자고.

“나는~ 사람을 낚는 어부~ 그대는~ 나의 무지갯빛 물고기~ 한 치 앞도 모르는 마음의 바다를 헤엄쳐서 가네…….”

알 수 없는 가사의 기이한 자작곡을 흥얼거리며 무인 마차를 몰았다. 아스페이런의 집무실이 있는 프린치아 궁의 북관까지는 금방이었다.

무인 마차를 주차시키고 북관 입구로 가자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기사 두 명이 보였다. 삼멈머를 산책시킬 때 몇 번 마주쳤던 근위 기사들이다.

“오, 슈리아 양! 좋은 오후입니다!”

기사님들도 나를 알아봤는지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반갑게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퇴근하시는 건가요?”

“예, 교대시간이 되어서요. 슈리아 양은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군주님을 뵈러 왔어요. 그런데 제가 프린치아 궁은 처음 와봐서요, 혹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오, 군주님을 알현하시려면 저쪽 궁내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친절하게 알려준 기사님들은 나를 직접 궁내관에게 인계해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헤매는 일 없이 수월하게 아스페이런의 집무실까지 갈 수 있었다.

군주의 집무실 앞에는 보좌관과 시종이 대기하며 업무를 보는 보좌관실이 따로 있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의 보좌관은 내 소개와 용건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여쭈어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보좌관이 집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집무실 문이 열렸다.

대기 중이던 시종이 말했다.

“슈리아 양, 군주님께서 들라 하십니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조심조심 문 너머로 발을 내딛었다.

서늘한 하얀색과 짙은 남색, 푸른빛이 도는 회색의 조합으로 꾸며진 집무실은 방의 주인처럼 서늘한 위압감을 흘리고 있었다.

방 중앙에 자리한 거대하고 튼튼해 보이는 하얀색 업무 테이블에 아스페이런이 앉아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며 슬쩍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에는 오른쪽 벽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커다란 책장과 장식장 두 개, 그리고 수석 보좌관인 키아라가 사용하는 단출한 업무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가구와 장식물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코 초라하다거나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왼쪽 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액자 속에서, 미의 신이라고 해도 믿을법한 아름다운 남자가 위엄 넘치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가가 자신의 열정을 깎아 붓으로 만들고 영혼을 갈아 물감에 섞어서 그려낸 듯, 섬세하고 기개 넘치는 군주의 초상화.

그것만으로도 장식은 충분했다. 넓은 홀에 저 초상화 하나만 걸어놔도 호화찬란하게 장식한 무도회장처럼 느껴지리라.

그만큼 종이 위에 새겨진 아스페이런 로아킨의 한 순간은 압도적이었다.

“나를 보러왔다면서 왜 그림 쪼가리에 정신을 팔고 있어.”

초상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을까. 아스페이런이 언짢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핀잔했다.

나는 그제야 정신줄을 붙잡고 아스페이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너무 멋진 초상화여서요. 대관식 때인가요?”

“글쎄……. 키아라, 저게 언제 그린 거지?”

아스페이런의 질문에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를 분류하고 있던 키아라가 대답했다.

“대관식 초상화는 백야의 방에 역대 군주님들의 초상화와 함께 걸려 있습니다. 저 초상화는 군주님의 작년 탄신일에 그린 것이고, 대응접실에 놓인 초상화는 즉위하신 해 건국제에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알았다. 됐어. 하여간 궁중화가 놈들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야. 정말 줄기차게도 그려대는군.”

‘그야 그렇겠지요. 우리 군주님이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안 그리고 배길 화가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현실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아스페이런을 경건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아스페이런의 뒤쪽에 길게 늘어서 있는, 벨로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거대한 유리창을 통해 반짝이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을 받은 아스페이런에게서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내가 궁정 화가였어도 매분 매초 눈물을 육수처럼 죽죽 뽑아내며 기쁘게 펜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궁정 화가한테는 진상한 그림 외에도 간단하게 그린 아스페이런의 초상화가 몇 점 있지 않을까?

‘……나중에 궁정 화가님이랑 친해져서 좀 얻어내야지.’

천재적인 발상이군. 나는 아스페이런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아스페이런이 눈을 가늘게 뜬다.

이윽고, 그가 매정하게 말했다.

“카니스, 커튼 쳐라.”

“예, 군주님.”

아스페이런의 뒤에서 호위를 서던 카니스가 충실하게 주군의 말을 이행했다.

두꺼운 커튼에 햇빛이 차단되고 아스페이런 뒤의 후광도 사라진다.

그렇게 목격하기 쉽지 않은 홀리 아스페이런의 위용이 붙잡을 수 없는 과거로 흘러가고 말았다.

‘큭, 원통하도다. 카메라가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챙겨온 것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여기…….”

내가 아스페이런에게 내민 것은 그동안 삼멈머를 관찰하며 작성했던 보고서였다.

도서관 좀 사용하게 해달라고 다짜고짜 군주의 집무실에 들이닥치는 건 심히 무례해 보일 것 같아서, 일부러 다른 용건을 챙겨 가지고 왔다.

“지난 4주간 매일 아침 측정한 달빛늑대개의 체중과 치수를 기록한 표입니다. 그동안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었는데, 오늘 아침에 측정해보니 갑자기 눈에 띄게 성장했더라고요.”

원래 정기 만남 때 보고하려고 했던 건데. 이 정도면 급히 군주님을 만나 뵈어야 하는 안건이 맞을까?

다행히 아스페이런은 내 보고서에 흥미를 보였다.

“성장을 시작했다고? 포획한 후로 전혀 성장하지 않아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놀랍군. 연구원들은 알고 있나?”

“아니요. 요 근래 얼굴을 보지 못해서요. 연구원 모두 각자의 연구실에 있는 것 같은데, 돌아가는 대로 찾아가서 전달하겠습니다.”

“됐다, 그냥 둬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거라면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다. 일주일 뒤에는 나오겠지.”

일주일? 지금 거의 4주째 연구실에만 콕 박혀 있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아스페이런은 내 보고서를 테이블 한 곳에 올려두고 키아라를 불렀다.

“키아라, 오늘이나 내일 중에 가서 달빛늑대개를 살펴보도록 해. 마력 제어구도 멀쩡한지 확인하고. 처음 보는 마법사보다는 한두 번 만나 본 너를 덜 경계하겠지.”

그 말을 들으니 키아라가 군주의 수석 보좌관임과 동시에 실력 좋은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유명한 마법사 가문의 둘째 딸이라고 했었지.

잘됐다. 나도 다른 마법사보다 익숙한 키아라가 오는 편이 더 좋으니까.

아스페이런의 명령에 키아라가 허리를 숙였다.

“예, 군주님의 일정이 잠시 비는 내일 오후 1시 25분에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삼멈머 성장 관련 안건이 마무리되었다. 그래. 연구원 얘기는 그냥 하지 말자. 그 인간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용기 내어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저, 군주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니구요, 군주님의 허락을 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내 말에 아스페이런이 한쪽 눈썹을 으쓱였다.

“네가 하고 싶고 필요하다면 웬만한 건 다 해도 괜찮아. 굳이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다. 뜻대로 해.”

‘와우.’

어쩜 우리 아스, 로판 남주인공 같은 말도 할 줄 아네. 역시 아스는 애인이 생기면 엄청 잘해 줄 거야.

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말했다.

“그럼요, 프린치아 궁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해도 될까요?”

“도서관? 물론…….”

선뜻 대답하던 아스페이런이 불현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종이 한 장을 집어 무언가를 적어 내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아스페이런이 그 종이를 나에게 건네며 명령했다.

“읽어봐라. 소리 내서.”

의아했지만 순순히 받아들었다.

글 읽는 것 정도야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빙의자 특전인지 이 세계 언어를 문제없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문자도 막힘없이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눈으로만 대충 글을 훑었다. 수능 영어 지문처럼 쓸데없이 복잡한 글이다.

하지만 이정도야 별 것 아니지. 나는 소리 내어 의기양양하게 글을 읽었다.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종이 위에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그것들을 한데 묶어 놓은 책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다른 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예를 들어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나 역사 같은 것들을 전달하기 위해 쓰였다. 글자의 탄생은 곧 문명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만.”

술술 읽어 내려가는 나를 아스페이런이 멈춰 세웠다. 그가 제 턱을 쓸다가 불쑥 물었다.

“너, 어떻게 엘로스의 문자를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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