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빙의자의 유혹
(17/20)
17. 빙의자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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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빙의자의 유혹
2023.07.27.
“군주님? 이렇게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슈리아가 다쳤다. 진찰해라.”
“예? 슈리아 양이?”
루멜이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스페이런의 도움을 받아 막 소파에 눕던 참이었다.
아스페이런이 드디어 구속 마법을 풀어준 덕에 이제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마침내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며 손을 흔들었다.
“루멜, 오랜만이에요!”
“예, 오랜만입니다만, 대체 어디서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
루멜이 소파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그의 목소리에 속상함이 담뿍 묻어있었다.
옆에서 아스페이런이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달빛늑대개를 산책시키는 와중에 사냥하는 여우처럼 펄쩍 뛰어올라서 땅에 온몸을 가져다 박더군.”
“누가 자발적으로 땅바닥에 있는 힘껏 부딪쳤다는 거예요? 그건 사고였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상황을 날조하는 아스페이런의 행태에 기가 막혀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물론,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스페이런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진료실 구석에 있던 가리개가 날아와 소파 주변을 둘러쌌다.
“치료해줘라, 루멜.”
“예. 슈리아 양, 잠시 실례할게요.”
루멜이 조심스럽게 내 외투와 안에 입은 웃옷을 벗겼다. 그가 물었다.
“넘어졌다고 했죠? 특별히 아픈 곳이 있나요?”
“오른쪽 팔이 빠진 것 같아요. 오른쪽 무릎도 좀 욱신거리고요.”
루멜이 내 몸을 면밀히 살폈다. 다행히 팔은 근육이 좀 놀란 정도였고, 지면에 가장 처음 부딪힌 오른쪽 무릎과 허벅지에만 가벼운 멍이 들어있었다.
“뼈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리 말하며 엷게 웃은 루멜은 내 상처부위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새 연고통과 물약 하나를 건네주었다.
“연고는 꾸준히 발라주고, 물약은 자기 전에 마셔요. 근육통이 없어질 거예요.”
“고마워요, 루멜.”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 걸요.”
치료가 끝나자 아스페이런이 다시 가리개를 치웠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보고 그가 느닷없이 시비를 걸었다.
“처음 봤을 때도 침대에 누워 있다가 뜬금없이 바닥으로 몸을 던지더니, 아무래도 땅바닥과 강렬한 포옹을 하는 게 취미인 모양이야. 이러다 겨우 구한 괴수 사육사를 잃을지도 모르겠어. 큰일이군.”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어 그냥 축 늘어졌다. 그런 나 대신 루멜이 아스페이런의 말을 맞받아쳐 주었다.
“환자에게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군주님.”
“너는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라도 걸린 거냐? 그렇다면 기꺼이 들어주마.”
“잔소리가 아니라 간언입니다.”
“간언은 무슨. 나에 관한 건 세상 다 산 꼬장꼬장한 늙은이처럼 붙들고 늘어지면서. 내게 하루라도 빨리 왕비를 들여라 재촉하는 것도 너뿐이라는 걸 아나?”
‘왕비!’
가장 관심 있는 주제의 등장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스페이런과 루멜은 어느새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더 아뢰겠습니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국혼을 올리시어 후계를 보시지요.”
“젠장, 내가 내 무덤을 팠군.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생각 없다고.”
“왜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후계는 어쩌실 요량이신지요?”
“율리시스가 있잖아.”
루멜의 매서운 공격에 아스페이런이 자신의 사촌 동생을 방패로 내세웠다. <운바합>의 주인공 율리시스까지 등장하다니. 대화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루멜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율리시스 님이 갑자기 왜 나오나요?”
“율리시스 역시 로아킨 왕가의 적통 피를 이었지. 그러니 그 애의 자식들도 로아킨의 왕위를 이를 자격이 있다.”
“지금 율리시스 님의 자식을 빼앗아 오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군주님, 율리시스 님의 자식은 곧 그란시아 황실의 후계세요.”
“율리시스와 그 부인, 서로 좋아 죽으니까 자식을 적어도 서넛은 낳겠지. 한 명 정도야 뭐.”
“군주님! 어떻게 부모에게서 어린 자식을 빼앗아 올 생각을 하십니까!”
루멜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나도 함께 절망했다.
아스, 후계 때문에라도 결혼할 줄 알았는데……. 율리시스랑 보니타의 자식을 데려올 생각이었다니.
루멜과 나는 뒷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아스페이런의 얼굴은 무신경하기 짝이 없었다.
“이 대화는 여기까지 하지. 슈리아, 가자. 데려다 주마.”
그리 말하는 아스페이런의 시선은 틈틈이 벽걸이 시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오늘 내가 아스페이런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다는 걸 자각했다.
나도 염치라는 게 있다. 여기서 더 아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나는 정중히 거절의 말을 읊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괜히 무리하려고.”
“무리가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내가 두 번이나 거절하자 아스페이런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내 이마를 툭 쳤다.
“조심히 들어가라. 그럼 다음 만남은 이틀 뒤로 하지.”
“네! 그날 뵙겠습니다!”
아스페이런이 먼저 진료실을 나섰다. 루멜은 문 앞까지 나가서 아스페이런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내 앞에 앉은 루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군주님께서 슈리아 양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루멜이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쩌면…….”
“네?”
뒷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지만 루멜은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루멜의 다갈색 눈이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스페이런과의 첫 번째 만남은 여러모로 대실패였다.
하지만 고작 부끄러운 기억 하나 때문에 주저앉을 수는 없지.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나의 유능함을 어필할 수 있을만한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첫 번째, 아질리티.
“강아지들이 보호자와 호흡을 맞춰 달리며 장애물을 넘는 거예요. 강아지의 지각능력을 키우기 좋아요. ……악! 큐티! 앉아! 기다려! 부수면 안 돼!”
갑자기 흥분한 큐티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준비해둔 허들을 다 부수고 다녀서 실패.
두 번째, 터그 놀이.
“군주님, 이건 터그 놀이라는 건데요, 이렇게 강아지가 물고 있는 장난감을 당기면서 놀아주는 거예요. 그럼 애들의 사냥 욕구가 채워지고 성취감이…… 아야! 헉. 벌써 찢어졌네.”
몇 초 만에 장난감들이 죄다 찢어져서 실패.
세 번째, 프리스비.
“이 원반을 던지면 애들이 물어올 거예요. 먼저 타이니부터 해볼까? 물어와! ……타이니? 타이니, 물어와! ……우, 우리 타이니가 왜 갑자기 관심이 없어졌을까아~.”
나와 단둘이서 할 때는 신나게 잘하던 타이니가 아스페이런이 있으니 갑자기 낯을 가려서 실패.
마지막으로, 노즈 워크.
이번에는 특별히 자투리 천을 가져다가 직접 노즈 워크 용 코담요까지 만들어서 진행했다.
코담요라는 특이한 생김새와 나의 그럴듯한 노즈 워크 찬양, 그리고 적극적으로 따라주는 우리 삼멈머까지. 모든 준비가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자, 간식을 숨겼으니 이제…… 어썸, 찾…… 으억?! 큐, 큐티? 분명 격리해 놨는데? ……아이고, 펜스를 부쉈구나!”
어썸의 노즈 워크 훈련을 진행하던 와중에 대기 중이던 큐티가 못 참고 달려들어서 실패!
전부 실패, 실패, 실패다.
그리고 ‘군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의 훈련시간’이 끝날 때마다, 우리의 아스페이런은 표정으로 늘 한결같은 뜻을 전달했다.
‘쟤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나의 원대한 계획, 아스페이런에게 유능함을 어필하고 신뢰 쌓기.
완전히 망했네.
“하아…….”
나는 울타리 앞에 평상을 놓고 앉아 어썸의 털을 빗겼다. 아스페이런과의 지난 만남들을 떠올릴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내가 어쩌면 좋을까…… 응? 어썸, 어떻게 해야 할까?”
“낑.”
어썸이 위로하려는 듯 몸을 일으켜 내 얼굴을 핥았다. 나는 별수 없이 푸흐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요 귀염둥이 같으니라고.
그래, 이렇게 축 쳐져 있기만 해서야 변하는 건 없다. 이럴 시간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지.
그럴듯한 훈련이 또 뭐가 있더라. 아니면 실패했던 걸 다시 해볼까.
‘아이들이 이만큼 발전했다는 걸 강조하면서…….’
한창 생각에 빠져들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내가 기대어있던 울타리를 톡톡 두드렸다.
“슈리아 양!”
“깜짝이야!”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리니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 있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님들! 어쩐 일이세요?”
“좋은 오후입니다, 슈리아 양. 지나가던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기사 정복을 갖춰 입은 여섯 명이 울타리 너머에서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삼멈머를 산책시킬 때 종종 마주치며 안면을 쌓은, 아스페이런의 근위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가운데에 서 있던 제2 근위대의 대장, 틸리스 가르타 경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저놈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온 거고, 나는 전나무 숲에서부터 슈리아 양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기에 서둘러 왔지. 무슨 일 있어?”
그녀는 산책 때마다 거의 매번 마주칠 뿐만 아니라, 종종 사육소까지 놀러 오기도 해서 나와 특별히 더 친한 사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군주님의 하트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잘 안 돼요, 라고 털어놓기는 좀 그렇지. 이상하게 들리잖아.
나는 손을 내저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별일 아니에요.”
“힘든 일과 슬픈 일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더라. 혹시 저 귀염둥이들이 말을 안 듣나?”
틸리스 경이 내 옆에 찰싹 붙어있는 어썸을 보고 웃었다. 어썸이 새침하게 고개를 휙 돌린다.
그 깜찍한 모습에 나와 틸리스 경을 비롯한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틸리스 경과 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말을 보탰다.
“혹시 저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해주십쇼. 언제든 와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든든한 말이었다. 로아킨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밖에 없구나.
나는 기사들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럴게요! 다음에 기억 안 난다고 하시면 안 돼요?”
“물론이죠!”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진심으로 기쁠 겁니다. 저, 사실 슈리아 양을 존경하고 있거든요.”
그리 말한 기사가 부끄러운 듯 제 뒷머리를 쓸며 말을 이었다.
“무려 괴수를 이렇게 길들이셨잖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한창 실패를 연발하는 와중에 이런 칭찬을 들으니 어쩐지 면목 없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어썸의 털을 쓰다듬었다.
“대단하다니, 그렇지 않아요. 애들이 워낙 똑똑하고 착해서 저는 딱히 하는 일이 없거든요…….”
“이런, 슈리아 양. 바로 그 착하게 군다는 게 신기하고 대단한 거야. 슈리아 양은 무의식중에 저 애들을 평범한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쟤네는 괴수야. 일반 강아지랑은 다르다고.”
틸리스 경이 핀잔하듯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일반 강아지랑은 다르다고…….’
아.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알았다!”
“어? 뭘?”
“감사해요, 여러분! 덕분에 해답을 찾았어요! 전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기사들과 삼멈머를 두고 당장 사육소에서 뛰쳐나왔다.
지금 내게 뭐가 부족한지, 뭘 해야 하는지, 드디어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