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흑역사 적립
(16/20)
16. 흑역사 적립
(16/20)
16. 흑역사 적립
2023.07.23.
‘귀중한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한테 유독 너그러운 것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하긴, 몸소 스카우트한 재목이니 당연한가.
나는 양 뺨을 감싸 쥐며 씰룩거리는 입가를 가렸다. 좋아, 이 기세를 몰아 아스페이런의 안에 단단히 똬리를 틀어주겠어.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의욕이 마구 샘솟았다. 나는 우선 아스페이런에게 삼멈머를 한 마리씩 소개했다.
“이쪽부터 차례대로 큐티, 타이니, 어썸이에요. 큐티는 활발하고, 타이니는 차분하고, 어썸은 호기심이 많아요. 분명 세 마리 모두 훌륭한 탐사 파트너로 자랄 거예요.”
“하네스를 찬 건가? 내가 보던 것과 형태가 좀 다른데.”
동문서답하는 아스페이런의 시선이 강아지용 하네스에 꽂혀 있었다.
마침 딱, 내가 자랑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나는 신나서 설명했다.
“아이들이 착용했을 때 편하도록 형태를 바꿔봤어요. 튼튼하고 안정감 있게요.”
확인해보니까 로아킨에서 썰매견에게 채우는 하네스는 얇은 가죽 줄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아플 것 같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전생에 키웠던 우리 집 강아지 빙수의 하네스와 비슷한 모양으로 한번 만들어보았다. 로아킨의 하네스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아스페이런은 흥미 깊은 시선으로 삼멈머의 하네스를 살피다가 물었다.
“직접 만든 건가?”
“고안은 제가 했는데, 제작은 장인의 거리에 계신 장인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모두 정말 친절하시더라고요.”
“……친절? 그 퉁명스러운 노인네들이?”
아스페이런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반박하고 나섰다.
“퉁명스럽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으셨는걸요. 흔쾌히 의뢰를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고 하셨어요. 손수 공방도 구경시켜주시고요.”
“공방을 구경시켜줘……?”
아스페이런의 표정이 더욱 묘하게 변했다. 서로 의문 가득한 시선이 오간다.
작은 혼란이 우리 사이를 휩쓸고 있는데 큐티가 내 옷자락을 잡고 낑낑거렸다. 기껏 나왔으면서 산책은 하지 않고 멀뚱하게 서 있기만 하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제야 산책로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리드줄을 조절하며 아스페이런에게 설명했다.
“항상 여기에서 산책해요. 하루에 네 번 정도요.”
“잘 걷는군. 나를 꺼려하지도 않고.”
아, 그러고 보니 아스페이런은 지금까지 인간을 적대하는 삼멈머 아니면 나한테만 딱 달라붙어 있는 삼멈머밖에 못 봤었지.
나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쫙 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경계했었는데, 산책하면서 계속 사람들과 마주치고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를 안 끼친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이제 안 그러더라고요. 어쩜 이렇게 배우는 게 빠른지.”
그런데 우리 애들의 장한 이야기를 들은 아스페이런은 삼멈머를 칭찬하기는커녕 얼굴을 찌푸리며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이 산책로를 이용하는 놈들은 거의 없을 텐데. 누굴 마주친다는 거지?”
“그, 기사님들이 이 길로 자주 다니시던데요……?”
연구소 근처에 기사들 연무장이 있어서 그런가, 한 번 산책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두세 명은 마주쳤었다.
기사님들은 전부 매너가 넘쳐서, 만났을 때 삼멈머에게 무작정 다가오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친절한 웃음과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삼멈머의 인간 거부증이 많이 줄어든 건, 전부 다 기사님들의 사려 깊은 마음씨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길고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스페이런의 험악한 미간 주름은 펴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할 짓이 없어서…….”
‘헉.’
혹시 지금 기사님들이 일은 안 하고 한가롭게 산책이나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서 열 받은 건가.
고마운 분들이 화를 입도록 둘 수는 없다. 화제, 화제를 돌리자.
마침 눈앞에 좋은 소재가 있었다. 나는 부러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그나저나 애들이 식성이 엄청 좋아서요~ 이러다가는 달빛늑대개들 식비 때문에 로아킨의 국고가 거덜 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예요. 으하하.”
나름 회심의 농담이었으나, 아스페이런은 정색하며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이가 없군. 로아킨의 국고가 그렇게 허술해 보이나?”
……무서워.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내가 정확히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그, 그럴 리가요! 세상에서 제일 빵빵! 제일 튼튼! 세계 제일 로아킨의 국고! 아아, 로아킨. 나의 조국.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그렇게 나의 ‘우리나라’는 로아킨이 되어버렸다.
지금부터 ‘독도는 우리 땅’하고 노래라도 불렀다가는, 대한민국의 귀중한 영토를 멋대로 타국에 넘겨버린 몹쓸 쓰레기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스와 친해지고 싶어서 기껏 만든 자리인데, 우리 사이는 숨 막히도록 어색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 저게 뭐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응시했다. 저 앞에서 조그만 회색 덩어리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상냥하게도 아스페이런이 정답을 알려주었다.
“흰 벼슬 청설모로군.”
“흰 벼슬 청설모요?”
조금 더 가까워지자 회색 덩어리의 외양이 온전히 보였다.
과연, 아스페이런이 말해준 이름처럼 회색 청설모는 머리에 흰색 닭 볏 같은 것을 달고 있었다.
엄청 직설적인 이름이네. 나는 손뼉을 치며 키득거렸다.
“정말 이름 그대로 생겼네요. 귀엽…….”
그 순간, 흰 벼슬 청설모가 후다닥 뒤돌아 도망쳤다.
이때의 나는 세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첫째, 내가 청설모에 관심을 가진 것 이상으로 삼멈머도 청설모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라는 사실.
둘째, 청설모가 도망치는 모습은 삼멈머를 더욱 자극했을 것이라는 사실.
셋째, 나는 지금 혼자서 삼멈머의 리드줄을 모두 잡고 있다는 사실.
오늘의 나는 확실히 안일했다. 그리고 그 안일함은, 파국을 불러왔다.
청설모가 도망치자 삼멈머가 앞으로 훅, 튀어 나갔다.
내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방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시에 튀어 나가는 강아지 세 마리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튕겨져 날아갔고, 그대로 고꾸라져서 바닥과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슈리아!”
아스페이런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삼멈머도 허겁지겁 내게로 돌아와 낑낑 운다.
나는 괜찮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흐린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아스 앞에서 두 번이나 넘어졌어.’
어디선가 내가 원했던 듬직한 신하의 이미지가 저 멀리 훨훨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방심했어요.”
“…….”
“산책할 때는 당연히 강아지들에게 집중해야 하는 건데. 순간 신기하게 생긴 청설모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
“그래도 나름의 교훈은 얻었어요. 앞으로 오늘처럼 애들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 또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리드줄 위치를 좀 수정하려고요.”
“…….”
“가슴 앞쪽에 고리를 만들어서 거기에 리드줄을 연결할 거예요. 그럼 애들의 급발진을 좀 막을 수 있거든요.”
“…….”
“그래요. 그러니까, 제가 정말 잘못했으니까요, 군주님.”
나는 열심히 떠들어대던 입을 다물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리고 길게 울부짖었다.
“제발 제 인권 좀 챙겨주시면 안 될까요?!!”
내 이름은 슈리아. 22살. 빙의자.
나는 지금, 놀이공원에서 파는 풍선처럼 최애의 머리 위를 동동 떠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차렷 자세를 하고 똑바로 누운 상태로 고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마치 미라 모양 풍선이 된 기분이다.
대기를 울리는 구슬픈 통곡에 나를 이런 꼴로 만든 장본인께서 드디어 뒤를 돌아보셨다. 아스페이런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무슨 인권을 챙겨달라는 거야?”
“지금, 지금 지나가는 사람 모두 저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저한테도 수치가 있고 체면이 있어요!”
꽥꽥대며 하소연하던 나는 혹시 아스페이런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을까 걱정되어 급히 덧붙였다.
“물론, 이렇게 친히 소인을 옮겨주시다니 군주님의 은혜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요. 제 평생의 영광이구요, 감동입니다.”
아스페이런이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머리 위에서 동동 떠다니던 나를 자신의 허리께까지 끌어내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아스페이런의 얼굴에서는 내 창피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나?”
“지금은 별로 안 좋아요.”
사람들의 저 경악 어린 눈빛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면 내 마음을 알 텐데.
내가 조그맣게 투덜거리자 아스페이런이 별수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럼, 사람들을 다 물릴까?”
“아뇨, 그건 너무 민폐가 아닐지……. 그으, 그냥 저를 정상적인 방식으로 옮겨주시면 안 될까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잖아.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너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요…….”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볼 안쪽 살만 짓씹었다.
나의 온몸이 바닥에 세차게 내던져진 이후, 아스페이런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니 당장 진찰을 받으러 가자고 말했다.
동감하며 일어서려는데 아스페이런이 나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행여 어딘가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함부로 건드렸다가 덧날수도 있으니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옮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안전한 방식’이 미라 풍선일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결사반대하며 바닥에 드러누웠을 거다.
나는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팔딱거려 아스페이런의 주의를 끈 뒤 애원했다.
“그럼요, 아까처럼 이동 마법을 써주시면 안 되나요?”
처음부터 이 상태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조금 전에는 이동 마법으로 산책로에서 크로넨 궁 근처까지 한 번에 이동했었다.
그런데 아스페이런은 크로넨 궁이 눈앞에 보이자마자 나를 공중에 띄워놓고 걷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번거로운 길을 택한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아스페이런은 나를 힐끗 보더니 나의 자세를 바꿔주었다. 이번에는 어딘가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포즈였다. 누워 있을 때보다는 좀 덜 창피하다.
만족스럽게 으흐흐 웃는 내게 아스페이런이 방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크로넨 궁 반경 50m 내에서는 당대 군주 외에 이동 마법을 쓸 수 없어. 군주도 자신 혼자만 이동할 수 있지.”
“뭔가 방어막 같은 게 쳐져 있나 보군요?”
“비슷해. 로아킨 가문의 시조인 닉스 로아킨이 가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크로넨 궁에 이동 마법을 자동으로 파훼하는 식을 새겨놓았거든.”
아스페이런의 시선이 저 멀리 벨로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는 벨로이 성 안으로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들어올 수 없고.”
“시조님께서 새겨두신 마법식이면, 이 성은 역사가 아주 오래됐겠네요.”
“그렇지.”
“그렇게 오래된 마법식이 지금까지 멀쩡하게 남아 있다니 신기해요. 여태껏 아무도 식을 깨지 못했나요?”
“그래. 닉스 로아킨은 초월자였으니까.”
“초월자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크로넨 궁 안, 루멜의 진료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루멜을 만나는 것도 벌써 2주 만이다. 괴수 사육사로 취직한 뒤 망가트린 망토에 대해 사과하러 왔을 때가 마지막 만남이었으니 말이다.
문을 열기 전, 아스페이런이 내 질문에 대해 짤막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존재에 한층 가까워진 사람을 말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 이봐, 루멜!”
아스페이런이 다짜고짜 진료실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산더미처럼 주위에 쌓아두고 무언가를 끼적이던 루멜이 어깨를 들썩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