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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친해지길 바라, 나랑 (15/20)


15. 친해지길 바라, 나랑
2023.07.20.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뭐가 어렵다고 하신 겁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한참 훈훈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던 참에, 카니스가 문득 내게 물었다.

내가 뭔가 어렵다는 말을 했었나?

“아까요? 아.”

맞다. 나 방금까지 아스를 만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지.

마침 잘됐다. 카니스는 아스페이런의 최측근인 데다가 성에서 지위도 높은 근위 대장님이니, 군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군주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만나 뵐 방법을 몰라서요. 혹시 군주님을 알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알현이요?”

카니스가 제 턱을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반 관료들은 알현 요청을 따로 보좌관이나 시종 편에 넣어야 하지만, 슈리아 양은 바로 집무실로 오셔도 될 겁니다. 슈리아 양은 연구소장인 프롬 씨와 비슷한 지위를 가지고 계시니까요. 그런데 급한 일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니스가 호탕하게 말했다.

“잘됐네요! 마침 군주님께서 이 근처에 계십니다.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시러 잠깐 연무장에 들르셨거든요. 저와 함께 가시죠!”

“지, 지금요?”

“네! 급하신 일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요…….”

그,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단 말이야. 게다가 아직 어떻게 입을 털어서 아스를 설득할지 계획도 못 짰는걸!

그러나 카니스는 내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 가시죠, 슈리아 양!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카니스가 염소몰이 하는 개 마냥 나를 연무장 쪽으로 몰아갔다. 나는 무력하게 그의 인도에 따라 끌려가야 했다.

어쩐지 카니스와의 만남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 * *

“그래서…… 나를 만나러 왔다고?”

아스페이런의 물음에 나와 카니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페이런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촉촉하게 젖은…… 내 최애…….’

평소보다 좀 더 색이 짙어진 그의 고수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창백했던 뺨에는 약간의 생기가 돌았고, 딱 달라붙는 얇은 상의가 감싼 신체는 조각상처럼 완벽한 균형이 잡혀 있었다.

나는 이 귀한 장면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스페이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스페이런이 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더니 옆에 널려있던 거대한 수건을 내 머리 위에 덮어씌웠다.

“앗! 안 보여!”

“군주님? 왜 그러십니까?”

버둥거리는 나를 도와 카니스가 얼른 수건을 치워주었다. 카니스의 물음에 아스페이런이 다시 미간을 구겼다.

“……방금 아주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나쁘시다니요?”

“됐다.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라.”

땀을 닦은 수건을 옆으로 휙 던진 아스페이런이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섰다.

그러자 그의 정말이지 끝내주는 상완 이두근이 한층 더 돋보이…… 핫, 이게 아니지.

나는 마음속으로 내 뺨을 철썩철썩 내갈겼다. 최애를 눈앞에 두니 어째 점점 욕망에 눈이 머는 것 같다.

아스페이런이 기분 나쁘다며 내쫓기 전에 얼른 본론을 밝혔다.

“군주님께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부탁?”

아스페이런이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섰다.

“군주님, 부디 하루에 한 번씩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말을 끝맺은 순간, 연무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던 기사들이 갑자기 “우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왜 저러는 거지? 다람쥐라도 봤나? 하지만 연무장에는 기사들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페이런 역시 연무장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아스페이런과 눈이 마주친 기사들이 다시 조용해진다.

순식간에 소란을 정리한 아스페이런이 내게 말했다.

“마저 이야기해라. 시간을 내어달라니, 그 이유는?”

좋아. 지금부터 설득을 잘해야 한다. 나는 머릿속에 정리해둔 대강의 계획을 되새기며 말문을 열었다.

“달빛늑대개 때문이에요. 군주님께서는 달빛늑대개를 벨트라움 탐사에 데려가겠다고 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저 외의 다른 사람과도 정기적인 교류가 필요해요.”

“어째서?”

“지난 2주간 달빛늑대개들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 애들은 자신의 무리가 아니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니 함께 호흡을 맞춰 탐사를 진행하려면 우선 그 애들의 무리 안에 들어가야겠지요.”

“…….”

“하지만 성견이 된 뒤에는 더 이상 무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 지금부터 꾸준히 정을 쌓아야겠죠. 특히 달빛늑대개들의 주인인 군주님께서는요.”

“……흠.”

아스페이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카니스가 거들어 주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강아지와 산책하는 시간을 가지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군주님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너무 과로하고 계세요.”

나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페이런이 제 턱을 톡톡 두드린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하루 한 번은 너무 많아. 일주일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그걸 누구 코에 붙이려고? 나는 항의했다.

“그 정도 횟수로는 정을 쌓기는커녕 애들 이름도 외우지 못할 거예요, 군주님. 다섯 번은 어떠세요?”

“안 돼. 나는 바쁘다. 두 번.”

“군주님께서 늘 공사다망하시다는 거야 저도 물론 알고 있지요. 하지만 두 번은 여전히 너무 적어요. 그러니 최대한 의견을 조율해서, 네 번은 어떨까요?”

“뭐가 최대한 조율했다는 거냐. 네 좋을 대로 맞춘 거면서. 세 번으로 하지. 더는 안 된다.”

“저도 더는 물러설 수 없어요, 군주님! 네 번으로 해주세요.”

“세 번.”

“네 번!”

나는 간을 배밖에 내놓은 토끼처럼 겁을 상실하여 꿋꿋하게 사딸라, 아니, 네 번을 외쳐댔다.

아스페이런이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제 의견을 밀어 붙여대는 녀석은 처음인데.”

결국,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수락의 말이 떨어졌다.

“알았다. 네 번으로 하지.”

“역시! 군주님의 도량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으십니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바로 다음 날부터, 아스페이런과 친해지기 위한 나의 특급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한 올도 뻗치지 않고 얌전히 내려앉은 머리카락, 오케이.

한 치의 불순함도 띠지 않은 눈동자와 신뢰감을 주는 미소를 장착한 입매, 오케이.

주름 하나 없이 멀끔한 블라우스에 단정한 이미지를 주는 감색 치마와 웃옷, 오케이.

진흙 등의 기타 얼룩이 조금도 묻지 않은 깔끔한 부츠도, 오케이.

마지막으로 업무 필수용품이 든 작은 가방을 맨 뒤 움직이기 편하고 튼튼하며 무척 따뜻하기까지 한 검은색 털외투를 걸치고 나면, 전투 준비 완료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전신 거울 앞에서 뱅글 돌았다. 좋아, 몇 번을 확인해 봐도 흠잡을 데 하나 없다.

오늘 내가 출정할 전장의 이름은 ‘군주님과의 첫 강아지 산책’.

나의 유능함을 마음껏 뽐낸 뒤 아스페이런에게 ‘자네를 내 곁에 두길 잘했어!’라는 뉘앙스의 말을 듣는 게 오늘의 목표다.

나는 백전백승의 장군처럼 가슴을 쫙 펴고 위풍당당하게 사육시설로 향했다.

사육시설의 놀이터에서는 우리 달빛늑대개 삼멈머가 장난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엉겨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내가 울타리 근처로 다가가자 아이들이 꼬리를 흔들며 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우리 귀염둥이들, 장하기도 하지.

오늘 삼멈머의 컨디션도 최고로 오케이였다. 큐티는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이 아주 건강해 보이고, 타이니는 순한 얼굴이 사랑스럽고, 어썸은 초롱초롱한 까만색 눈에서 총기가 넘쳐 흐른다.

나는 아이들의 턱밑을 한 번씩 긁어준 뒤 가방에서 빗을 꺼내 눈에 띄게 솟아 있는 털만 조금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벨로이 성의 장인분들께 의뢰해서 특별 제작한 강아지용 하네스를 입히고 리드줄을 달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오늘 오후 산책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산책할 거야. 그렇지만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 큐티, 타이니, 어썸은 평소처럼 마음껏 달리고, 냄새 맡고, 잘 놀면 돼. 알았지?”

“왕!”

삼멈머가 동시에 크게 짖었다. 이 애들은 어찌나 똑똑한지, 정말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리드줄을 단단히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갈까?”

“월!”

아스페이런과 만나기로 한 곳은 내가 삼멈머의 산책 장소로 늘 애용하는 연구소 주변 전나무 숲의 산책로였다.

산책로 입구에 아이들을 데리고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약속 시간인 오후 2시 정각이 되자마자 아스페이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냉큼 인사를 올렸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아스페이런이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흥겹게 발끝을 까닥였다. 정말이지, 내 최애는 오늘도 끝내주게 잘생겼구나.

피곤한 듯 평소보다 깊어진 눈매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도, 전부 완벽 그 자체다. 마치 명작으로 손꼽히는 흑백 영화 속 우아한 남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외모를 감상하는 동안 아스페이런도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오늘은 제법 가볍게 입었구나. 평소에는 너무 껴입어서 바닥을 굴러다닐 것 같더니.”

“네?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물론 카니스가 체온 조절 마법이 새겨진 목걸이를 선물해주기 전에는 너무 추워서 외투를 세 겹 정도 겹쳐 입기는 했었지만.

거기에 더해 목도리와 모자, 장갑으로 완전 무장을 하기는 했었지만…… 아무튼 균형도 못 잡고 굴러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근데 잠깐, 나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다는 건?’

혹시 나를 보러왔었나? 나는 슬쩍 떠보았다.

“그런데요, 군주님, 제가 옷을 많이 입고 다녔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지나가다가 봤다.”

아스페이런이 별것 아니라는 듯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연구소는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굳이 발걸음 하지 않는 이상 이 근처를 지나갈 일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로 최근에 아스페이런이 연구원들을 만나러 온 적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친히 왕림했었다는 뜻이 아닌가.

입꼬리가 비죽비죽 위로 올라갔다. 그가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부터 조금씩 느꼈는데, 역시 아스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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