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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목걸이에 담긴 진심 (14/20)


14. 목걸이에 담긴 진심
2023.07.16.


밤 열한 시.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잠들었을 시각.

“아이고, 삭신이야.”

나는 뻐근한 어깨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연구소 건물 3층에 위치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괴수 사육사 자리에 취직한 지 오늘로 2주째.

2주 동안 매일 강아지들을 위한 하루 4번의 산책은 기본, 별도의 훈련과 놀이까지 병행했더니 이제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 수는 없다.

나는 침대에 드러눕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반짇고리를 꺼내 들었다. 내일 또 우리 강아지들을 신나게 놀아주려면, 튼튼한 장난감을 미리 대량으로 만들어둬야 한다.

나는 두꺼운 천 몇 장을 골라 들고 미친 과학자처럼 웃었다.

“으흐흐흐……. 내 모든 걸 걸고 반드시 너희를 최고의 강아지로 키워주겠어. 나의 큐티 타이니 어썸 멍멍이들…….”

작은 초크를 손에 쥐고 온 정성을 다해서 천 위에 도안을 그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 지금 뭔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 같은데?

* * *

지난 2주 동안, 아스페이런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끄으으윽.”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내지르며 꼭 맞잡은 주먹에 이마를 가져다 박았다. 강렬한 통증에 골이 지이잉 울린다.

보호자의 난데없는 자학에 놀랐는지 우리 삼멈머―큐티, 타이니, 어썸을 한데 모아서 이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가 잘 놀다 말고 나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착하고 귀여운 내 새끼들. 엄마 걱정하는 것 좀 봐.

나는 낑낑대는 아이들을 고루고루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안심했는지 삼멈머가 다시 눈밭을 가로지르며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놀이터 구석에서 눈치 보고 있었는데.’

심지어 갇혀 있던 우리에서 나오고 처음 이틀 동안은 내게 쉽사리 다가오지도 못했었다. 나와 회랑에서 먼저 만났었던 어썸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저렇게 신나서 눈밭을 뒹굴고, 장난감을 물어뜯고, 쓰다듬어 달라며 애교를 부린다.

그게 너무 기뻤던 나머지 나는 삼멈머에게 온 마음과 정신을 쏟아부었고…….

결국 아스페이런을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루라도 빨리 아스페이런의 신뢰를 얻고 친분을 쌓아서 최측근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는,

1. 달빛늑대개를 열심히 돌본다.

2. 아스페이런이 기뻐한다.

3. 아스페이런의 총애를 얻고 최측근이 된다.

4. 최측근의 권한으로 아스페이런의 결혼을 추진한다.

5. 아스페이런은 해피 웨딩을 올리고 나는 시한부 인생에서 해방된다!

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다가가 주겠어.

나는 퍼걸러 구석에 놓인 물품 상자를 뒤져 수첩 하나와 펜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퍼걸러를 꾸밀 적에 혹시 몰라서 가져다 두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꺼내 보지는 않았던 번쩍번쩍한 새것이다.

수첩을 펴서 우선 첫 장에 ‘최애 결혼시키기 프로젝트-살아남아라 빙의자’라고 적어 보았다.

“음―.”

좋아, 좋아. 이제 뭔가 좀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그다음 장에 ‘목표1. 최측근 되기’라고 썼다. 밑줄도 두 줄이나 쫙쫙 그었다.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차례다.

‘어디 보자. 일단 최측근이 되려면, 얼굴을 자주 봐야 해.’

원래 많이 보면 볼수록 정도 쌓이고 마음도 가는 법.

그런데 나는 지난 2주 동안, 아스페이런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나의 비중은 아스페이런의 안에서 점점 흐려져 결국 ‘신하1’로 남게 되겠지.

그럴 수는 없다. 최측근 삼인방을 본받아서 고목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아스에게 척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나는 수첩 구석에 아스를 사지로 옭아매고 있는 나를 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스페이런을 정기적으로 만날 핑계는 많아. 나는 아스의 특명을 받은 신하니까. 하지만 아스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일단 얼굴을 봐야 하는데…….’

일국의 군주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알현 요청을 넣어야 하나? 그럼 그 알현 요청은 누구한테 해야 하고?

나는 펜 끝으로 이마를 벅벅 긁었다.

“어렵네…….”

“뭐가 말입니까?”

그때, 부드러운 저음이 내 고민을 끊고 들어왔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울타리 바깥쪽에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아스페이런의 최측근 삼인방 중 한 명인, ‘무력’의 카니스다.

“아, 카니스…….”

오랜만에 만난 카니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나는 퍼뜩 내가 끼적이고 있던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미친 천재성 탓에 나와 아스는 지나가던 개도 너끈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리얼리티하게 그려져 있었다.

만약 이 그림을 누군가 봐서 아스페이런의 귀에 들어간다면, 나는 군주님께 음습한 마음을 품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곧바로 추방 행이야!

나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퍼걸러 안에 굴러다니던 쿠션 밑에 수첩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하고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 손님을 맞이했다.

“카니스 경! 오랜만이에요.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예, 오랜만입니다, 슈리아 양.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잠시 들렀습니다. 슈리아 양이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해서요.”

“저야 언제든 잘 지내죠. 로아킨은 밥도 맛있고 아름답, 엣취!”

잘 말하다 말고 눈치 없이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카니스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감기에 걸리셨습니까?”

“아뇨, 그냥 조금 추워서, 에취! 제가 추위를 많이 타, 에취 에취 에취!”

연속 세 번의 우렁찬 재채기. 방금까지 온도 조절 마법이 걸린 퍼걸러 안에 있다가 갑자기 추운 곳으로 나와서 그런 모양이다.

카니스가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아킨의 추운 기후가 슈리아 양에게 맞지 않은가 봅니다.”

“괜찮아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잖아요. 곧 익숙해질 거예요. 에취!”

자신만만하게 장담했으나 끝에 덧붙은 재채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 탓일까, 카니스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어떻게 방법이……. 아, 이걸 드릴까요? 도움이 될 겁니다.”

카니스가 주섬주섬 제 목덜미를 더듬더니 목걸이 하나를 풀어서 건넸다. 가죽 줄 끝에 울퉁불퉁한 모양의 붉은색 보석이 달린 예쁜 목걸이였다.

나는 조심스레 목걸이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감탄했다.

“와, 예뻐라. 보석이 독특하네요.”

“체온 조절 마법이 걸린 목걸이입니다. 옛날에 제가 로아킨의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군주님께서 주신 건데…….”

……군주님께서 주셨다고? 그럼 하사품?

이 사람이, 선물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나는 얼른 다시 카니스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요, 카니스 경. 군주님께서 하사하신 걸 받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카니스는 목걸이를 받아가지 않았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음 주인에게 갈 때가 되었어요. 군주님께서도 목걸이가 계속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쪽을 원하실 겁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 제가 걸어드리겠습니다. 잠시 실례를…….”

그리 말하며 카니스가 허리를 굽히고 시선을 맞춰 왔다. 그 선한 눈동자에 또 한 번 거절의 말을 읊으려던 입이 딱 다물렸다.

내가 빳빳하게 굳은 틈을 타 카니스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불편하지 않도록 줄 길이까지 조절해주는 커다란 손이 섬세하면서도 정중했다.

이윽고 하고자 한 일을 모두 끝마친 카니스가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맑고 순수한 미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정말 잘생겼네…….’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분량이 아스페이런보다 적었는데도 독자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는 정말이지 전형적인 ‘햇살 댕댕 기사 단장 캐릭터’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햇살 댕댕…… 아니, 카니스는 목 뒤를 주무르며 목걸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력을 충전해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목걸이에 마력을 채워두면, 여기에 입력된 식이 발동해서 몸을 최적의 온도로 유지해 주는 거죠.”

카니스가 마력을 흘려 넣자 보석에 은은한 빛이 서렸다. 추워서 덜덜 떨리던 몸이 금세 따뜻해진다.

“아! 정말 딱 좋게 따뜻해졌어요.”

“오랫동안 발동하지 않았던 마법식이라 걱정했는데 제대로 작동해서 다행이네요. 마력이 떨어지면 제가 다시 충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찾아오세요.”

나는 목걸이를 살피던 것을 멈추고 카니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슈리아 양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털어버릴 수 있을 만큼이요.”

말을 끝마친 카니스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가 제 앞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슈리아 양이 막 이 벨로이 성의 한 식구가 되었을 때 드리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너무 늦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카니스에게서 쑥스러움과 함께 나에 대한 호감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그가 자신에게 반했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이야기를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빙의자. 그가 내어주는 호의의 근원이 무엇인지 정도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상냥한 눈빛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동질감이었다.

<운바합>에서 서술하기를, 카니스는 사실 엘로스가 아닌 엘바스 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카니스에게도 벨트라움에 제물로 바쳐진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나처럼.

카니스가 나를 볼 때마다 얼핏 내비치던 염려를 기억한다.

그때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 사연을 들은 이후부터 줄곧 이웃들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내 마음이 어떨지,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지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어 보았으니까. 사람들의 배신이 얼마나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지 아니까.

그렇기에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기꺼이 따뜻함을 나누어 주는 거겠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 감사해요.”

그래서 나는, 부담스러워하는 대신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리고 나중에 저보다 더 이 목걸이가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저도 목걸이를 건네줄게요. 카니스 경이 그런 것처럼요.”

“예. 그럼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어쩐지 그와 좋은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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