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귀엽고 작고 엄청난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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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귀엽고 작고 엄청난
2023.07.13.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군주님께 냅다 달려가서 고해바치겠다고? 지금 무능하다고 자랑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초조해하는 게 보여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본인이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지.
그나저나 저렇게 자존심을 긁으면 내가 아스한테 고자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나를 네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능하다고…… 자랑……? 군주님께 업무에 대해 보고하는 게 어째서 무능한 게 되는 거죠……?”
“크, 크흠!”
“그나저나 저는 아직 괴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 도와줄 분이 필요한데…….”
나는 말을 늘이며 힐끗 프롬을 보았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그의 검은색 동공.
좋아. 여기서 프롬을 좀 더 자극해볼까.
내가 짧은 기간 동안 판단한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아예 괴수 관련 권한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줘보도록 하자.
“사려 깊고 지혜로우신 군주님께서는 기꺼이 제게 도움 줄 분을 새로이 붙여주시겠죠? 예를 들어…….”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스페이런이 괴수 관리를 맡길만한 그럴듯한 곳이 뭐가 있을까.
괴수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고, 괴수에 관심이 있을 만한 곳. 그리고 연구소에게서 괴수 관리 권한을 완전히 빼앗아 올 수도 있는 규모의 집단.
‘음…….’
참, 그러고 보니 여기 벨로이 성에도 마탑이 있었지? 좋아, 마탑 정도면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다.
“마탑의 마법사님을 붙여주실 수도 있겠네요.”
나는 ‘마탑의 마법사’로 깔끔하게 턴을 마무리 지었다. 도발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무슨 소리!!”
프롬이 대노하여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허공을 향해 격하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친다.
“감히 마탑 따위가 로아킨의 미래를 위해 일하는 우리 연구소의 권한을 넘봐? 감히!!”
그간 마탑에 상당히 유감이 많았던 모양인지 생각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프롬은 그렇게 한참 동안 정체 모를 대상을 향해 길길이 날뛰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곧바로 내게 사과해왔다.
“크흐흠! 방금은 내가 실언을 했네. 괴수 사육 관련 업무는 당연히 우리 연구소의 일이지! 모르면 당연히 물어봐야 하고! 바로 전문가인 우리들에게 말이야. 안 그런가, 자네들?”
“예에…….”
프롬의 뜨거운 시선에 다른 연구원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연구소장인 프롬을 꾀고 나면 다른 연구원들도 줄줄 따라오는구나. 예상대로다.
프롬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여기 상태가 좀, 심각하기는 하지. 개선이 필요해. 그래서, 이제 뭘 하고 싶나?”
“청소요.”
나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진작 생각해 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청소부터 해야 해요. 저 우리는 가져다 버릴 거고요. 하지만 방이 워낙 넓고 지저분하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는데요…….”
“안 돼!”
연구원들이 갑자기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뭐가요?”
“다른 사람이라니! 이 연구소에 외부인은 들일 수 없어!”
“이곳은 극비 사항으로 뒤덮여 있다고요~.”
“보, 보안상의 이유로로 좀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내 연구…….”
프롬, 세크, 티티라, 키리가 순서대로 이유를 대며 결사반대했다.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다니. 나는 뺨을 긁적였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 * *
“……그리하여, 연구원 전원이 직접 사육시설을 청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군주님.”
나는 엄숙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아스페이런은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정신이 혼미한 얼굴이었다.
아스페이런의 입에서 부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명하게 솟아난다.
“내가 관리를 일임한 괴수를…… 그런 식으로 방치했다고.”
역시 아스페이런은 강아지들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에 대한 군주님의 진노는 무시무시했다. 그의 주변에서 살기가 피어난다.
연구원 넷은 아스페이런의 앞에 일제히 무릎 꿇었다.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분노를 억누른 아스페이런의 목소리가 한겨울의 칼바람보다 냉랭했다.
“괴수를 길들이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 인원이 충분한 마탑에 괴수를 맡기겠다는 걸 부득불 연구소로 데리고 온 것은 네놈들이었다.”
“구, 군주님…….”
“그때 분명 괴수를 부족함 없이 잘 돌보라고 명했을 텐데. 이따위로 일을 처리하다니 내가 어지간히도 우스웠던 모양이야.”
“아닙니다!”
연구원들이 크게 부인하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아스페이런은 화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나는 줄곧 너희들의 교만을 묵인하고 넘어가 주었지. 왜인 줄 아나? 모두가 꺼리는 연구에 기꺼이 몸을 던져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너희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
“한데 너희는 가면 갈수록 오만방자해지기만 하는구나. 내가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넘어가 줄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나에게 향하는 분노가 아님에도 손발이 뻣뻣해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몸이 덜덜 떨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아스페이런이 살기를 거두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징계를 내리며 노기를 갈무리했다.
“앞으로 1년간 너희들의 개인 연구비를 없애도록 하겠다.”
“……명 받들겠습니다.”
바닥에 이마를 찧어 절을 올린 연구원들이 뒤로 물러났다. 아스페이런이 내게로 다가온다.
“오늘 수고했다 슈리아. 저 답 없는 놈들 때문에 고생 꽤나 했겠구나.”
“아, 아닙니다, 군주님. 청소도 그렇고 연구원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는걸요.”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함과 동시에 슬그머니 연구원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어쩌다 보니 정말로 아스페이런에게 전부 일러바친 격이 되어버려서 양심에 찔렸다. 혹시라도 내게 악감정을 가졌다면 이걸로 다 풀어줬으면 좋겠는데.
내 대답에 아스페이런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약간 누그러트렸다. 연구원들이 그래도 좀 반성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더 이상 괴수 방치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방을 한번 쭉 둘러본 뒤 말했다.
“이곳을 뜯어고치려면 확실히 품이 많이 들겠구나. 혹 필요한 게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 보거라. 무엇이든 내어주마.”
‘무엇이든!’
무엇이든이라니,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던 게 있어서 내일 중에 아스페이런을 찾아가려고 했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마침 잘됐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그럼 저, 땅 좀 주세요!”
어째서일까. 내 요청을 들은 아스페이런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 * *
슈리아가 당차게 요구한 땅. 그것은 연구소 부지의 널따란 공터였다.
당황을 갈무리하고 이유를 묻는 아스페이런에게 슈리아는 말했다.
‘이 강아지들, 그러니까 달빛늑대개를 위한 제대로 된 사육시설을 만들 거예요.’
당연히, 아스페이런은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성 내의 모든 장인과 일꾼들의 노동력을 마음껏 빌릴 수 있는 황금패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이 바로, 달빛늑대개들의 사육시설이 완성되는 날이었다.
아스페이런은 슈리아가 괴수 사육사로서 첫발을 내딛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친히 이곳까지 왕림했다.
“군주니임―!”
완성 된 사육시설을 홀로 둘러보고 있던 슈리아가 발간 얼굴로 달려 나와 아스페이런을 맞이했다.
아스페이런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열렬한 환영에 화답하려했으나, 슈리아가 갑자기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허리를 깊게 꾸벅 숙였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그 모양새에 아스페이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역시 웃기고 이상한 여자였다.
엷은 웃음을 갈무리한 그는 슈리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세 마리의 털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사납기 그지없던 달빛늑대개 삼남매는 몰라볼 정도로 깔끔하고 보송해져 있었다.
심지어 그 사납기 그지없던 녀석들이 슈리아에게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린다.
아스페이런은 작게 감탄했다.
“벌써 네 말을 잘 듣는군.”
“정말 장하죠? 애들이 엄청 똑똑해요. 애교도 많고요.”
슈리아가 허리를 숙여 세 마리의 강아지를 돌아가며 쓰다듬어 주었다. 세 개의 꼬리가 부러질 것처럼 흔들린다.
손에 잔뜩 붙은 흰 털을 여상하게 떼어 낸 슈리아가 말했다.
“자, 이제 가실까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슈리아가 의욕에 가득 차서 소개한 사육시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설원 출신의 달빛늑대개들이 마음껏 뛰어놀 넓은 눈밭과 튼튼한 세 채의 개집, 슈리아가 사용할 원형 퍼걸러등, 모두 실용적이다.
“지하에 있던 사육시설도 싹 고쳐놨어요. 밤에는 아이들이 거기서 지내게 할 생각이거든요.”
“그래, 잘했다.”
아스페이런은 슈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사육소의 전경을 쭉 둘러보았다.
튼튼하고 높은 울타리가 쳐진 사육소는 매우 아늑해 보였다.
“음, 그리고요.”
그때 슈리아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스페이런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슈리아가 긴장한 듯 손을 꼬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연구원님들에게 물어보니, 이 애들이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랬던가.”
“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군주님께서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스페이런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름을 굳이?”
“강아지에게도 이름은 중요해요! 서로 애정을 쌓는데도, 더 나아가서 훈련하는 데도요.”
아스페이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름을 지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름에는 그 존재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어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 괴수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지어주거라.”
“제가요?”
“이 개들과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게 될 이는 너니까, 네가 지어야 이치에 맞겠지.”
슈리아는 달빛늑대개들을 내려다보았다. 직접 이름을 지어도 된다니, 솔직히 기뻤다.
슈리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흐뭇함을 담아 말했다.
“그럼 큐티, 타이니, 어썸으로 할래요.”
“……그건 무슨 주문이지?”
“귀엽고 작고 엄청나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에요.”
“음.”
처음 듣는 단어인데. 이 녀석이 살던 지역에 있던 말인가.
괴수 달빛늑대개에게 귀엽고 작다니, 솔직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런 이름으로 하고 싶다면야.
아스페이런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세 마리 달빛늑대개의 이름은 큐티, 타이니, 어썸이 되었다.
이 세계에는 큐티, 타이니, 어썸이라는 단어가 없었기에, 그 누구도 슈리아의 네이밍 센스가 끔찍하게 구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타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