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인간은 형편없다
(12/20)
12. 인간은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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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간은 형편없다
2023.07.09.
밤 10시. 로아킨의 군주인 아스페이런의 공식 업무가 끝나는 시간.
마지막 서류까지 모두 검토를 끝마친 아스페이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예, 군주님.”
수석 보좌관인 키아라를 필두로 보좌관들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은 안으로 들어와 아스페이런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고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들어가십시오, 군주님.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모두 수고했다.”
아스페이런은 신하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무가 이루어지는 프린치아 궁을 나섰다. 호위로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근위대장인 카니스 한 명만을 거느린 채였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며 카니스가 말을 걸었다.
“오늘 밤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군주님.”
“음. 흡족한 일이 여럿 있었으니.”
그간 골치를 썩였던 새끼 괴수 문제도 해결되었고, 마음에 드는 인재도 손에 넣었다.
이제 이 만족스러운 기분을 유지하며 침소로 돌아가 개인적인 업무를 본 뒤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다사다난했던 오늘 하루도 끝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이리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하도록 놔두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스페이런은 저 멀리에서 비틀대며 걸어오는 검은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게 뭘까요? 괴수?”
카니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잠시 그것의 마력을 느낀 아스페이런은 고개를 저었다.
“괴수는 아니다.”
“그럼 뭘까요? 설마, 유령!?”
“헛소리하지 마.”
핀잔을 준 아스페이런은 잠깐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프롬이군.”
“예에?”
깜짝 놀란 카니스가 목을 쭉 빼고 검은 그림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과연, 점점 가까워지는 저 인영은 벨트라움 연구소의 소장인 프롬이 맞았다.
두 사람의 뛰어난 청각에 프롬의 가쁜 숨소리와 군주님, 군주님, 하는 소리가 포착되었다.
아스페이런은 미간을 주물렀다. 듣고 있자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온다.
운동부족 연구원의 발걸음은 아주 느렸다. 결국 아스페이런은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프롬을 자신의 앞으로 배달시켰다.
제 앞에 널브러진 프롬을 내려다보며 아스페이런이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비아냥댔다.
“야밤에 술꾼처럼 비틀거리며 성을 활보하는 취미라도 생긴 거냐?”
프롬은 그대로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스페이런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왜 아무 말도 없나, 프롬? 혹시 이제 더는 혀가 필요하지 않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인 거라면, 내 손수 제거해 줄 수도 있다. 언제든 말만 해.”
그 순간, 프롬이 느닷없이 아스페이런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스페이런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침내 내보인 프롬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프롬이 대성통곡했다.
“군주님! 군주니임―!”
“뭐야.”
“그 여자, 그 여자는 악마입니다! 악마라고요!”
제에발 좀 쫓아내주십시오오― 저 좀 살려주세요오오―.
아스페이런은 프롬을 매정하게 처내다가 그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여자? 슈리아를 말하는 거냐?”
프롬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성이 떠나가라 울부짖기만 했다.
아스페이런과 카니스는 의문 가득한 시선을 교환했다. 연구원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었다.
‘……가봐야겠군.’
아스페이런은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느닷없이 닥쳐온 새로운 사건에 젊은 군주님의 미간 주름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 * *
아스페이런은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프롬을 주워들고 즉시 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프롬이 안내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괴상한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너무 힘들어요, 힘들어. 내 인생에 이렇게 힘든 일은 처음이라구요.”
“이게 다…… 제가 쓰레기라서…….”
“자고 싶어…….”
연구가 아니면 전부 귀찮아하던 ‘그’ 연구원들이, 각자 청소도구를 하나씩 든 채 죽어라 방을 쓸고 닦고 있었다.
심지어.
“그만 칭얼거려요! 그럴수록 잘 시간, 연구할 시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알겠습니까!”
“흐윽, 흑”
“그만 울라니까! 그럴수록 힘만 빠진다고요. 울 힘으로 걸레질이나 열심히 해요!”
“흑, 네에…….”
“좋아요. 자, 그럼 세크는 마저 바닥을 닦고, 티티라는 강아지 우리를 닦아요! 키리는 강아지 밥그릇 설거지하고! 우리 얼른 얼른 끝냅시다!”
“네, 네엡……!”
군주의 명이 아니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주제에 누군가의 호통을 듣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까지 한다.
아스페이런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카리스마 있는 명령과 지휘가 흘러나오고 있는, 방에 딸린 작은 세면장을 쳐다보았다.
곧 누군가가 세면장 안에서 뿅 튀어나왔다. 순간 아스페이런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오늘 아스페이런이 새로이 들인 신하 슈리아였다.
아니 대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헤실헤실 웃으며 인사하고 다니던 연구소 신입이 어쩌다 선임 연구원들을 데굴데굴 굴리게 된 거지?
군말 없이 구르고 있는 저 놈들은 또 뭐고?
“저는 이제 한 마리만 더 씻기면 돼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헉, 군주님?”
폭삭 젖은 개를 수건으로 감싸 품에 안은 슈리아가 아스페이런을 발견하고는 펄쩍 뛰어 올랐다.
슈리아의 외침에 바닥을 기어 다니던 연구원들이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들이 동시에 외친다.
“군주님, 살려주세요!”
“시끄러워.”
아스페이런은 발치에 매달리는 연구원들을 툭툭 걷어 차 치워버렸다. 비정하기 짝이 없는 발놀림이다.
그가 슈리아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이놈들은 왜 이러고 있고.”
번잡스러워진 방과 엎어져서 울고 있는 연구원들을 잠시 둘러본 슈리아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 * *
“구석에 굴러다니는 먼지, 털. 천장의 거미줄, 지독한 냄새.”
척, 나의 손가락이 사육실 내부를 쭉 훑었다.
“텅 비고 지저분한 물그릇! 한참 된 개밥! 변이 가득 쌓인 우리와 그 안에서 근 두 달 동안 갇혀있어야 했던 강아지들!”
나는 강아지들이 갇힌 우리를 가리켰다가 주먹을 허공에 흔들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자, 이것들을 보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들죠?!”
내 앞에 나란히 일렬로 선 연구원들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동시에 대답한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그게 아니지!”
속이 터져서 내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쳤다.
목 아래로는 뻑뻑한 닭가슴살 100개를 연달아 삼킨 듯 답답했고, 목 위로는 마그마가 끓는 듯 뜨거웠다.
“생각해 봐요. 누군가가 당신들을 좁고 냄새나는 곳에 두 달 동안 가둬두고, 물도 안 주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거기에는 화장실도 없어요! 어떨 것 같아요?”
“글쎄요…….”
세크가 동의를 구하듯 다른 연구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희는 이미 비슷하게 살고 있어서요~. 지저분하고 좁은 방에 갇혀서 하루 종일 물도 잘 안 마시고, 밥도 잘 안 먹고.”
“그, 그렇기는 하죠…….”
티티라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연구원, 키리와 프롬도 마찬가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지금 당장 작은 쪽 우리에서 강아지를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빼낸 뒤, 빈 강철 우리로 연구원들의 머리통을 마구 두들겨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최애에게 살인범으로 낙인찍힐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내 안의 모든 인내심을 끌어올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내리눌렀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짓씹듯이 말했다.
“그건요, 그쪽들이 결정해서 한 일이잖아요. 그쪽들이 연구하느라 바쁘고 귀찮아서 안 한 거잖아요! 강아지들은 당신들 때문에 억지로 갇혀서 방치까지 당한 거고요!”
연구원들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소리를 질렀을 때 잠깐 깨어났던 키리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이 사육시설의 심각함에 대해 더 강력하게 토로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그때, 우리의 대단히 지혜로우신 연구소장님께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뭐라고요?”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들을 붙들고 훈계를 늘어놓는 거지? 자네가 우리의 상사라도 되나? 군주님께서 힘 좀 실어주셨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쯧…….”
“…….”
“문제점을 발견했으면 알아서 고치도록 해. 그게 자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우리는 바쁜 사람이야. 귀찮게 하지 말고 좀 스스로 생각하게나. 나는 무능하다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아하.’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 소장님, 본격적으로 텃세를 부리기 시작하셨군.
이런 식으로 협조 요청도 거부하고 심통을 부리겠다 이거지.
뜨겁게 끓어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나는 분노에 잠시 굳어졌던 뇌를 회전시켰다.
‘이 인간들은 정상이 아니야. 상식과 감성으로 호소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 상황이 본인들에게 손해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켜야 해.
그 후에 자발적으로 나에게 협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허리를 짚었던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전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제부터 이 일은 제 일이고…… 저는 여러분의 상사가 아니죠. 여러분은 아주, 아―주 바쁘시고요.”
“크흠! 알아들었나 보군.”
프롬이 연구원 가운을 펄럭이며 방을 나서려 했다. 나는 그 뒤에 대고 말했다.
“그토록 바쁘다 하시니, 앞으로 제 업무 보고서도 곧장 군주님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보자…… 일단 제가 처음 도착했을 때 환경이 어땠는지 쓰고, 개선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요청해야겠네요.”
“……뭐?”
자리에 멈춰선 프롬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당황한 척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서 가보세요! 한창 바쁘신 와중에 정말 실례했습니다. 앞으로는 실수로라도 연구원분들께 도움을 청해 귀찮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할게요.”
“응?”
“물론 군주님께서는 제가 아직 부족하니 연구원분들께 많이 배우고 무슨 일이든 충분히 상의한 뒤에 결정하라고 하셨지만, 여러분은 무척 바쁘셔서 괴수 따위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으시니까요.”
“엉?”
“그러니 혹여나 무슨 문제가 생겨도 괜히 도움을 구하며 민폐 끼치지 말고, 소장님 말씀대로 제가 ‘알아서’ 잘 해보겠습니다. 이건 ‘제 일’이잖아요?”
“잠깐.”
“걱정 마세요! 소장님께서 제게 큰 깨달음을 주셨다고 오늘 일은 군주님께 ‘확실히’ 보고하겠습니다!”
말을 끝마친 뒤 나는 씨익 웃었다. 정리하자면 이거였다.
군주님은 분명 너희한테 나를 잘 도와서 괴수를 관리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자기들은 바쁘고 귀찮으니까 나 혼자 알아서 하라고?
알았어. 그렇게 할게. 다만 내가 ‘알아서’ 해보려다가 사고를 쳐도 전부 너희가 자초한 일이고 결국엔 너희 책임인 거 알지?
혹시라도 그때 가서 다 내 잘못으로 몰아갈 생각하지 마. 너희가 한 말, 태도, 하나도 빠짐없이 군주님께 말씀드릴 거니까.
그뿐이냐? 너희가 지금까지 강아지들 어떻게 관리했는지도 다 보고할 거야. 군주님께서 과연 뭐라고 하실까?
똑똑한 연구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부 간파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롬이 벌컥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