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상에 정상적인 상사는 드물다
(10/20)
10. 세상에 정상적인 상사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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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세상에 정상적인 상사는 드물다
2023.07.02.
“준비할 것이 많겠군.”
아스페이런이 길고 곧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머무를 방도 마련해야 하고, 옷도 새로 맞춰야 할 테고.”
“옷을 맞춰요?”
“성에 준비되어 있는 옷 중 네게 맞는 건 없다. 지금처럼 계속 어린애 옷을 입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푸른색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꽃무늬 자수가 아기자기한 것이 심히 깜찍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어린애 옷이었구나.
‘<운바합>에서 아스네 나라…… 그러니까 로아킨 왕국의 평균 신장이 무척 큰 편이라고는 했었지만.’
설마 ‘대한민국 평균 키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슈퍼 울트라 쪼꼬미?!’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침통한 얼굴을 하는 내게 아스페이런이 심각하기 짝이 없는 투로 말했다.
“몸에 맞지도 않는 큰 옷을 질질 끌며 입고 다녔다가는―.”
‘응?’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그러다 넘어져서 다치면 어떡하냐고 말하려는 건가?
세상에, 지금 우리 아스가 날 걱정해주는 거야?
그러나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지고 지저분해져서 남아나는 옷이 없겠지.”
초롱초롱 빛나던 눈빛이 짜게 식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페이런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네가 입고 굴렀던 루멜의 망토,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데.”
“헙.”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고 보니 산책갈 때 입었던 그 망토, 루멜이 빌려준 거였지.
빌린 망토를 입고 내가 했던 짓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긴 망토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줄도 모르고 펄쩍 펄쩍 뛰어다니기, 강아지랑 놀기,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기…….
음. 걸레짝이 다 됐겠군.
‘젠장, 젠장!’
일단 무릎 꿇고 사과부터 한 뒤에, 나중에 월급 받으면 좋은 걸로 하나 사줘야겠다.
내가 자기반성에 빠져 있는 동안 아스페이런은 나와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방치했던 마법진을 마저 완성시켰다.
“나다.”
그가 허공에 대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이 중얼거린다. 아마 저게 통신 마법진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통신 마법을 종료한 아스페이런이 내게 말했다.
“이후에 사람을 보낼 테니 함께 가서 치수를 재고 오거라.”
“네에…….”
“가시덩굴 위에서 굴러도 문제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으라 일러두마. 앞으로는 옷 망가질 걱정 없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
아스페이런의 특기.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빈정거리기.
글로 읽을 때는 너무 재밌고 좋아서 뒤로 넘어갔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약이 올라서 뒤로 넘어갈 것 같다.
더 분한 건, 내가 옷을 엉망으로 입은 건 사실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아스페이런을 몰래 쏘아보았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아스페이런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스페이런이 한쪽 입꼬리를 무섭게 끌어올린다.
‘주, 죽는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스페이런의 ‘저 괘씸한 것을 당장 옥에 처넣어라!’ 하는 명은 들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변해 있는 아스페이런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제 막 얻은 신하라 그냥 넘어가 줄 건가 봐.’
그 사이, 아스페이런이 등 뒤에서 조용히 호위를 서고 있던 카니스에게 물었다.
“카니스, 키아라는?”
“명하신 대로 연구원들과 함께 대기 중입니다.”
돌아온 대답에 아스페이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럼 이제, 네가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이들을 만나러 가볼까. 따라오너라.”
나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곁을 스쳐지나가며, 카니스가 만면에 밝은 미소를 띠고 속삭였다.
“함께 일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슈리아 양.”
“!”
아스페이런과 대화하러 오기 전, 이미 한 번 나누었던 인사말.
그런데 이전과는 뭔가 다르게 다가왔다. 나의 새로운 이름과 함께 들었기 때문일까?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에 답했다.
“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카니스 경!”
아스페이런이 향한 곳은 우리가 있던 응접실의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자, 응접실보다 조금 더 따스한 느낌의 커다란 암녹색 방이 나타났다.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방 중앙에 자리한,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이었다.
그 덕분에 본래 하나였던 방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재미있는 구조였다.
책장 건너편은 무수한 책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문 바로 앞쪽에는 긴 소파 두 개와 테이블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소파 앞에, 한 여인이 서 있다.
옆으로 길게 땋아 내린 보랏빛이 도는 잿빛 머리칼. 한 치의 틈도 찾아볼 수 없는 진한 검은색 눈동자.
나는 그녀가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아스페이런의 최측근 삼인방 중 ‘지성’을 담당하는 수석 보좌관, 키아라 고르도였다.
키아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아스페이런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군주님.”
“그래, 수고했다. 그놈들은?”
“저쪽에 있습니다.”
키아라가 책장 너머를 가리켰다.
분위기상 ‘그놈들’이 내 미래 동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누굴까? 방 안에 들어왔지만 저쪽에 뭐가 있는지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기웃거리고 있는데 아스페이런이 나를 키아라의 앞으로 내밀었다.
“인사해라. 앞으로 괴수 사육사 일을 맡게 될 슈리아다.”
“원하는 바를 이루셨군요. 경축 드립니다.”
그리 말하고 나를 본 키아라가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곧, 키아라가 표정을 지우고 한쪽 손을 내밀었다.
“군주님의 수석 보좌관인 키아라 고르도입니다.”
“아, 슈리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말랑…….”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하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책장 쪽으로 몸을 돌린 아스페이런이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와라. 연구원들을 소개시켜 주지.”
“넵!”
역시 책장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내 직장 동료가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헐레벌떡 아스페이런을 따라 책장을 지나쳤다.
이후 기대로 잔뜩 부푼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두 눈을 절로 의심하게 되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히잉, 힘들어 죽겠어요, 소장님. 이러다 오늘 가서 분갈이도 못 해주겠네.”
“기분 나쁘니까 앙탈 부리지 말게, 세크. 그리고 자네만 힘든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다 제가 못난 탓이에요…….”
“…….”
연구원 가운 같은 것을 입은 남자 둘과 여자 둘이 엎드려뻗쳐 자세를 한 채 일렬로 늘어서 있다.
뿐만 아니라 네 사람 모두 한쪽 손에는 펜을 쥐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종이를 고정한 뒤 무언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연신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반성문 다 쓴 사람?”
“저 두 장 남았어요~.”
“저는 20장…….”
“20장? 군주님께서는 10장을 채우라 하셨는데 어떻게 20장이 남을 수 있나?”
“아뇨…… 20장이 넘었어요…….”
“우와! 티티라 씨 대박이네요. 저 두 장만 주세요.”
“그러다 군주님께서 눈치채시면…….”
“걱정 마세요~ 제가 적당히 고칠게요.”
눈앞에서 은밀한 범죄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줄곧 조용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여자가 작은 소리를 내었다.
“드르렁-.”
누가 들어도 명백하게 코를 고는 소리였다. 아까부터 다른 이들에게 하대를 하던 남자가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코를? 코를 골아? 보나 마나 키리 그 화상이겠지. 뭐 하나, 세크! 안 깨우고!”
“아이, 소장님~. 잠든 키리 씨 깨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면서 그러세요~. 저는 못 해요~.”
“뺀질거리기는! 그럼 티티라 자네가 깨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깨웠는데 일어나지를 않네요. 다 제 목소리가 작아서겠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드르렁-.”
“미치겠군, 하여간에 쓸만 한 놈이 없어!”
네 사람이 왁왁 대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스페이런이 마침내 중재에 나섰다.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쾅!
“깜짝이야!”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네 사람이 일시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직후, 큰소리를 낸 장본인을 확인한 그들은 아연실색하여 우당탕 바닥에 넘어졌다.
경악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아스페이런이 벽을 후려쳤던 손을 가볍게 털었다.
“아주 신나서 떠들던데……. 반성문 가져와 봐. 목을 따는 대신 내린 벌이니 모두 최선을 다했겠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나조차 절로 몸이 쪼그라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백.
꿀꺽, 네 명의 죄인이 동시에 침을 삼켰다.
* * *
“인사해라. 이쪽은 앞으로 괴수 관리 일을 맡게 될 슈리아다.”
나는 갈가리 찢긴 반성문 조각을 제각기 머리에 붙이고 있는 네 명의 연구원들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 아스페이런의 무시무시한 호통을 정면에서 들은 탓인지 다들 조금씩 넋이 나가 있었다.
아스페이런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인사.”
“예, 옙!”
연구원들이 내게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비뚤어져 있던 안경을 저마다 제대로 고쳐 쓰는 걸 보니 모두 집 나갔던 넋이 다시 돌아온 모양이다.
가운데에 서있던, 마치 구름 같은 독특한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크흠. 반갑네, 슈리아. 나는 벨트라움 연구소의 소장인 프롬일세.”
“저는 세크예요, 슈리아 씨. 그런데 혹시 식물 좋아해요?”
“저는 티티라예요……. 보잘것없는 이름이지만 기억해 주신다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뒤이어 다른 연구원들도 자기소개를 마쳤다. 딱 한 명만 빼고.
모두의 시선이 아까부터 졸고 있었던 여자에게 향했다.
“키, 키리……!”
“드르렁―.”
티티라가 조심스럽게 흔들었음에도 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프롬이 쯧쯧 혀를 차며 대신 소개했다.
“저 키리의 이름은 화상일세.”
“에궁, 소장님~ 바뀌었잖아요~.”
“저 화상의 이름은 키리일세.”
말을 정정한 뒤 프롬이 갑자기 극대노해서는 세크를 매우 치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 안다고! 내가 몰라서 그런 줄 알아? 나는 천재라고!”
“아야, 아야, 아야.”
푸닥푸닥 먼지가 날린다. 방금 아스한테 그렇게 혼나놓고 또 이렇게 싸워대다니. 역시 이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다.
‘나,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심란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인사에 답했다.
“저는 슈리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나는! 나는! 소장이라고! 네 상사라고!”
“아야, 아야. 그만하세요, 소장님~ 아파용~.”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것도 제 탓, 저것도 제 탓…….”
“드르렁― 쿨쿨.”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