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름이 생긴 날
(9/20)
9. 이름이 생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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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름이 생긴 날
2023.06.29.
“왜 그리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냐.”
생각지도 못한, 다정한 어투.
나는 고개를 들어 이 응접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아스페이런과 눈을 마주했다.
아스페이런의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움츠러들 필요 없다. 잡아먹으려 부른 게 아니니.”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끔뻑였다. 저거, 농담하는 건가?
‘에이, 설마. 아스페이런이 농담이라니.’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렸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슬쩍 아스페이런을 훔쳐보았다. 그는 서류 검토를 그만두고 옆에 산처럼 쌓여 있던 종이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안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잡아 뺀 아스페이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내게 건넸다.
“우선 감사 인사부터 할까. 네 고발 덕분에 ‘인간 제물’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관련 보고서인데, 원한다면 읽어보도록.
“아, 넵! 감사합니다.”
허둥지둥 아스페이런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읽어보니 그곳에는 빅시르 부렌과 소소리 마을의 최후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최대 사형부터, 재산 몰수에 작위 박탈, 노역형까지…….
‘전부 다 죗값을 치렀네.’
강한 본보기를 보였으니 이제 ‘인간 제물’ 같은 끔찍한 사건은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겠지.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읽은 뒤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아스페이런에게 다시 돌려주며 겸허하게 말했다.
“제가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 겸손 떨 것 없다.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지난번에 약속했던 상을 내려야겠지.”
‘……상!’
눈이 번뜩 뜨였다.
에이, 뭔가 했더니 상을 내리기 위해 부른 거였구나! 근데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은 거람.
‘금전 같은 건 됐어! 내게 필요한 건 오직 네 옆자리뿐이다!’
네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기필코 너를 결혼시키고 말 거야……!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 상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순조롭게 로아킨에 눌러앉기 위해서는 완벽한 작전을 짜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아스페이런이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다만 그 전에, 네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아, 제안…… 예? 제안이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제안이라니, 갑자기 무슨 제안? 아스페이런이 날 필요로 한다면야 내 입장에서는 물론 좋은 일이긴 하다만.
나는 떨떠름하게 아스페이런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툭툭, 테이블을 두드린다.
“너, 벨트라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뜬금없이 웬 벨트라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일단 머릿속을 더듬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읊었다.
“으음, 엘바스와 엘로스 사이에 위치한, 괴수들이 살고 있는 제 3의 세계라고 알고 있어요.”
“맞아. 혼돈으로 가득 찬, 위험한 세계지.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런데 알고 있나?”
아스페이런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사실, 벨트라움은 이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공기가 있고, 생명체가 살고, 나름의 규칙이 있지.”
여전히 말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벨트라움을 위험하다 생각하는 이유는, 그곳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벨트라움에 대한 공포는 초기보다 훨씬 줄어들었지. 왜일까?”
“……이제 알고 있으니까요.”
문이 무엇인지, 괴수가 무엇인지, 벨트라움이 무엇인지.
또, 문이 열리면 어떻게 해야 하고 괴수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제 모두, 알고 있으니까.
“벨트라움에 대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나의 백성들은 더욱 안전해질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벨트라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집단을 만들었다.”
<운바합>을 읽었기에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벨트라움에 얼마나 거부감이 강한지 알고 있었다. 아마 연구소를 세울 때에도 반대가 극심했겠지.
그럼에도 아스페이런은 기어코 연구소를 만들었다. 자신의 백성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를, 안전하기를 바라서.
‘과연, 만백성이 사랑하는 로아킨의 영웅왕.’
아스페이런의 이명(異名)을 떠올리며 나는 밀려오는 감동 속에 풍덩 몸을 맡겼다.
덕심이…… 차오른다.
“그런데 최근, 벨트라움 연구가 벽에 부딪쳤다.”
“벽이요?”
최애의 멋짐에 흠뻑 빠져 흐물흐물해졌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아스페이런이 생각만 해도 언짢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설명을 시작했다.
“탐사대의 현 탐사 방식이 아주 느리고, 비효율적이라서 말이야.”
정리하자면 이랬다.
벨트라움은 대기의 마력 밀도가 엘로스나 엘바스보다 높은 편이라, 체내에 마력이 적은 동물들은 들어가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킨다고 한다.
때문에 말이나 개 같은 동물들을 탐사에 데리고 갈 수 없었고, 그렇다 보니 탐사대는 도보와 단거리 이동 마법만으로 탐사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느리고 비효율적이어서야 탐사에 제대로 된 성과가 있을 리 없다.
결국, 벨트라움 연구는 요 근래 계속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아스페이런이 느른하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해결 방안을 찾던 와중에, 우연히 어미 잃은 새끼 괴수 세 마리를 발견해서 포획하게 되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괴수를 길들여서 탐사에 활용할 수 없을까, 하는.”
“성공하셨나요?”
“아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다른 생명체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서 가까이 가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스페이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는 잘 따르더군.”
“네?”
“역시 몰랐던 건가…….”
아스페이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쏟아졌다.
“오늘 네가 데리고 놀았던 그 개, 탐사대가 생포해둔 새끼 괴수 중 한 마리다.”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방금 내 귀로 들어온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괴수? 그 깜찍이 멈머가…… 괴수였다고? 내가 괴수랑 놀았다고?
‘나, 나도 모르는 새에 황천 코앞까지 뛰어갔었구나!’
이제야 아스페이런이 왜 나를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건지, 기사들은 왜 졸도하려 했는지 전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 강아지…… 괴수라기에는 딱히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어. 강아지도 나를 잘 따랐고. 왜지?’
“그 모습을 보고 알았다. 네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이어진 아스페이런의 말은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능력이 있다니요?”
“벨트라움에 들어갔던 사람이 드물게 새로운 능력을 각성하는 경우가 있어. 그처럼 너도 능력을, 그러니까 괴수들이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능력을 각성한 걸로 보이는군.”
“……예?”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갑자기 특수 능력 발견이라니?
나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그, 강아지가 저를 잘 따랐다는 것만으로 확정 지을 수는 없지 않나요? 그 애가 특이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실험을 한 번 더 해봤다.”
아스페이런의 눈동자가 응접실 내부를 훑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응접실에 가득 찬, 기이한 외관의 커다란 식물들.
아스페이런이 말했다.
“여기에 있는 식물들, 전부 식물형 육식 괴수들이다. 네게 그 능력이 없었다면 네가 들어오자마자 달려들었겠지.”
“뭐, 무슨.”
“아, 물론 식물들이 너를 공격하려 들었다면 내가 곧장 막았을 거다. 너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 그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라.”
그야 그렇겠지. 우리 아스는 무고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니까.
능력을 시험하겠답시고 나를 식인 식물 한가운데에 불러들인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맙소사.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구나. 아스페이런의 말대로라면, 정말 나한테 새로운 능력이 생긴 거구나. 그것도 괴수들이랑 친구가 될 수 있는…….
‘그걸 대체 어디다 써!’
나는 괴수들이랑 만나고 싶지 않아. 무섭잖아!
빙의를 하고 괴수들의 세계까지 넘어서 기껏 얻은 게 괴수들과 엮이지 않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니 제안하겠다.”
그런데 그때, 아스페이런의 낮은 목소리가 충격에서 헤엄치고 있던 내 정신을 건져 올렸다.
나는 쭉쭉 잡아당기던 머리털을 놓고 아스페이런을 쳐다보았다. 그가 한없이 무심한 얼굴로 폭탄 발언을 날렸다.
“이곳에 남아 나의 괴수 사육사가 되어 주지 않겠나?”
“……예?”
아스페이런의 깜짝 제안에 후려 맞은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잠깐. 지금, 뭐라고?
“부탁하고 싶은 일은 현재 생포 중인 괴수, 달빛늑대개 세 마리가 인간에게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네 안전은 최대한 보장할 거고.”
“…….”
“받아들인다면 충분한 보수와 함께 땅이든 지위든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주도록 하지. 최고의 대우를 해 주마. 또한, 괴수에 관해서는 네 발언이 연구소장과 같은 무게를 가지게 될 거야.”
“…….”
“로아킨에는 네 능력이 필요하다. 어때,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나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돈다.
‘바보…… 바보 아냐?’
정말 바보 아니냐, 진노란?!
‘괴수랑 친구 되는 능력을 어디다 쓰냐고? 여기다 쓴다!’
머릿속에서 쌈바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성공, 성공이다. 굳이 애쓸 필요도 없이 아스가 먼저 나를 붙잡았다.
아스페이런 결혼시키기 대작전 1차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솔직히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괴수를 길들이는 데 성공하면, 곧바로 아스페이런의 최측근 등극 성공이 아닌가.
그럼 아스페이런의 결혼도 금방 추진할 수 있겠지.
‘이게 바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진노란의 특기, 긍정 회로가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줄기 남은 이성이 급히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면 내 촉새 같은 입은 당장 ‘까짓거 해보죠, 뭐!’라고 외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기왕 수락하는 거, 좀 더 나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대답이 어디 없을까?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스페이런과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아스페이런이 왼쪽 눈썹을 들어올린다.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상을 내리겠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원하는 게 있나?”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옛날 외국 영화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에 한쪽 손을 붙였다. 그리고 씨익, 미소 지었다.
“부디, 제게 이름을 내려주세요.”
“이름?”
“예. 군주님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맹세하려면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스페이런의 눈이 커졌다. 곧, 모양 좋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하하!”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아스페이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에 흡족함이 묻어 있었다.
마침내, 아스페이런이 입을 열었다.
“……슈리아. 그래, 슈리아로 하자. 네 이름은 이제부터 슈리아다.”
슈리아.
슈리아, 나는 입안에서 나의 새로운 이름을 한번 굴려보았다. 마음에 든다.
어쩐지 이 ‘슈리아’라는 이름에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
로판 다독자인 내 머리에는, 이 뜻깊은 순간에 어울리는 수백 가지 멋들어진 인사말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진짜 나의 것은 아니니까.
그냥 나답게 가자. 진실하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깊게 허리를 숙이며 힘차게 외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군주님!”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던 어느 겨울날.
그렇게 나는, 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자리를 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