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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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구속되었다
2023.06.25.
“내,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아?”
“지금, 저게 사람을 지키는 거야?”
아스페이런은 나를 보고 있고, 기사들은 강아지를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니, 그래서 이 인간들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건데?’
그 사이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기묘한 분위기의 대치 상태를 끝낸 이는, 당연하게도 우리의 위대하신 군주 아스페이런 로아킨이었다.
아스페이런은 우선 강아지부터 제압했다.
아스페이런이 시선을 한 번 주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했던 강아지가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며 오들오들 떤다.
최애가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안쓰러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스페이런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기사들 한 명, 한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거기 다섯은 이 개를 포박해 연구소로 데려가라. 연구원들이 대기 중일 테니 가두는 걸 도와줘. 끝나면 연구원 전원 당장 크로넨 궁으로 튀어오라 전하도록.”
“옙!”
“너는 내 집무실로 가서 키아라와 카니스를 데려와라. 거기에 연구원 둘도 있을 텐데, 그놈들도 함께 오라고 해.”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둘은.”
거기까지 말한 아스페이런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도 피하지 않고 아스페이런을 노려봤다. 그가 강아지를 위협하는 것을 보고 살짝 부루퉁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다소 불손한 눈빛으로.
아스페이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여자를 ‘그곳’에 넣어 놔라.”
“‘그곳’이라하시면……?”
“내가 설득과 회유를 하기 전에 대기 시켜놓는 곳.”
“아!”
어쩐지 오가는 이야기가 이상했다.
설득과 회유라니? 아스페이런이 말하는 설득과 회유라면…….
‘고문!’
나는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지, 지금 나를 구속하겠다는 거야? 왜? 눈빛이 기분 나빠서?
“알겠습니다, 군주님!”
남의 멘탈이 붕괴되든 말든 기사들의 대답이 우렁찼다. 내 양옆에 서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실로 위압적이다.
기사들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잡힐 수는 없어.
아직 아스페이런 2세도 못 봤는데!
나는 철푸덕 무릎을 꿇고 바닥에 양 손을 짚었다. 입에서 자연스럽게 비통한 통곡이 세어 나온다.
“구, 군주님! 잠시만요!”
“뭐지.”
아스페이런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부디 자비를! 통촉,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극에서나 읊을 것 같은 대사가 내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당연하지만.
“……어서 데려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스페이런이 재차 내린 명령에 두 기사가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바닥에 철썩 달라붙어서 반항했으나 무의미했다. 기사들이 자신들의 멀대 같은 키와 우람한 덩치를 과시하며 나를 번쩍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친구들이 가방에 달아놓은 인형처럼 대롱대롱 들려서 끌려가며 울부짖었다.
“잘못했어요, 군주니임―!”
물론, 대답은 없었다.
오러 마스터에다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인 아스페이런의 마력 감지 능력은 엘로스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특히 그는 괴수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마력에 예민했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다른 마력의 기운이 방해해도 괴수의 마력만큼은 또렷이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달빛늑대개의 뒤를 쫓는 건 그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스페이런은 정무가 이루어지는 프린치아 궁을 나서자마자 빠르게 달빛늑대개의 위치를 잡아냈다. 크로넨 궁 뒤편이었다. 그는 곧장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아스페이런이 마주한 것은, 그가 그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아구 귀여워, 아구 예뻐. 우리 복슬복슬 귀염둥이~!”
“왕!”
달빛늑대개가, 인간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맛보려는 게 아니라 애정을 담아서. 꼬리를 부러질 것처럼 흔들며.
달빛늑대개는 괴수를 잡는 데 도가 튼 아스페이런조차도 상대하기 까다로워할 만큼 사납고 영리한 괴수였다.
그래서 기껏 새끼 세 마리를 포획했으면서도 아직까지 길들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랬던 괴수가 지금, 저기서 안달을 내며 온갖 애교를 부리고 있다. 왜?
아스페이런은 괴수의 애교를 받아주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체 누가 달빛늑대개를 길들일 수 있단 말인가.
“!”
아스페이런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여자였다. 자신을 갈등하게 만들었던 그 여자.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탐을 낸 인재. 사촌 동생 율리시스를 도와준 증인.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다니.
아스페이런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여 무심코 기척을 내고 말았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달빛늑대개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명백하게 강한 이에게 이를 드러낸 것이다.
그 순간, 아스페이런은 전율을 느꼈다.
늘 냉철함을 유지했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직후 기사들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분명 자신은 당장에 여자를 붙들고 방금 떠올린 말을 성급하게 털어놓고 말았으리라.
아스페이런은 자신의 명령에 따라 모두가 사라진 텅 빈 눈밭 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기도하듯 양손을 모아 잡고 방 안을 서성였다. 사방에 산재한 비싸 보이는 물건들을 혹시라도 망가트릴까 겁낸 탓에 행동반경은 좁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붉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아담하고 아름다운 응접실이었다. ‘설득과 회유’라기에 당연히 지하 감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기사들은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폭력과 함께하는 설득과 회유가 아니었단 말인가!”
매우 의외였고, 매우 당황스럽다. 고문이 아니라면 설득과 회유가 대체 뭐야? 뭘 하려는 거지?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괜히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절도 있는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 힘차게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흐어어억.”
그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괴상한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나는 급히 내 입을 텁, 틀어막았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
아스페이런에게는 그가 몹시 아끼는 세 명의 최측근이 있다.
궁의 루멜, 근위 대장 카니스, 그리고 수석 보좌관 키아라.
독자들은 이 셋을 각각 ‘양심’의 루멜, ‘무력’의 카니스, ‘지성’의 키아라라고 칭하며 한데 모아 '아스페이런의 최측근 삼인방'이라고 불렀었다.
“면목이 없네요.”
그리고 조금 전 나를 기겁하게 만든 이 남자가 바로 최측근 삼인방 중 한 명인,
'무력'의 카니스다.
"저 때문에 이렇게 놀라시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카니스가 자신의 짧은 적갈색 머리칼을 털며 머쓱함을 드러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하다가 못 들은 것인걸요. 저야말로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나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니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 나가서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첫인상부터 최악으로 박힐 뻔했네.
‘제때 변명거리가 생각나서 망정이지.’
갑자기 누가 들어와서 깜짝 놀라 그랬다는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카니스는 순순히 믿어주었다.
다행이기는 한데, 너무 순진해서 걱정될 정도다.
‘그나저나 <운바합> 보면서 상상한 얼굴이랑 진짜 똑같이 생겼네.’
거대한 돌산처럼 단단한 신체와 큰 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쾌활함이 담긴 적갈색 눈동자까지. 카니스는 정말 내 머릿속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했다.
그러니 내가 그를 보고 경악을 내지른 것은 맹세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놀란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나는 용기 내어 다시 한번 카니스의 훤칠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음 짓는다.
그러더니 오른쪽 주먹은 왼 가슴 위에 얹고 다른 손은 허리 뒤에 가져다 댄 뒤 상체를 숙이며 멋스러운 기사의 인사를 선보였다.
“그럼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로아킨의 군주 아스페이런 님의 근위대를 이끌고 있는 카니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우리는 잠시 화기애애한 악수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어색함이 완전히 가신다.
그러나 실로 안타깝게도, 훈훈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함께 가실까요? 군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나, 아스페이런한테 (아마도) 찍힌 상태였지.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꼭, 지금 가야 할까요?”
“예? 당연하죠!”
대답이 참으로 해맑았다. 카니스가 어서 가자며 양몰이 하는 양치기 개 마냥 나를 문밖으로 몰아간다.
은근슬쩍 바닥에 발을 붙이고 버텨봤지만, ‘무력’의 카니스에게 이 정도 반항은 무의미.
‘안 돼애―!’
결국,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왔군.”
기이한 모양새의 식물들로 장식된 암녹색 응접실. 그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아스페이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니스에게 먼저 향했던 시선이 한참 밑으로 내려와 나를 본다. 아스페이런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왜 도살장에 끌려 온 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도살장에 끌려 온 소?”
카니스가 허리를 숙여 내 표정을 살폈다. 그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상하네요. 방금 전까지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묻지 마! 너희 군주님이 무서워서 그렇다고 어떻게 말해!’
정말 눈치 없네! 몰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쨌든 뭐라 대답은 해야 했다. 나는 양손을 파닥파닥 흔들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저 군주님을 뵈어 몸 둘 바를 모르겠을 뿐인걸요. 헤헤.”
실없는 웃음과 영양가 없는 아부가 내가 느끼기에도 간신배가 따로 없었다. 아스페이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히, 아스페이런은 더 추궁하는 대신 제 맞은편을 향해 턱짓했다.
“앉아라.”
“넵!”
아스페이런이 가리킨 곳에는 근사하게 생긴 암녹색 소파가 있었다. 나는 그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기 위해 후다닥 소파로 달려가 앉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할 거기에 이런 이상한 응접실로 부른 거지?’
나는 테이블 위에도 자리한, 커다란 파리지옥처럼 생긴 식물을 힐끔거리며 마주 잡은 양손을 주물렀다.
정수리로 와 닿는 아스페이런의 뜨거운 시선이 따갑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댔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한참. 드디어, 아스페이런이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