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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르는 개 산책 (7/20)


7. 모르는 개 산책
2023.06.22.


“추, 춥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떨었다.

회랑까지 온도 조절 마법의 영향이 닿는다고는 해도 실내보다는 추운 편이라기에 루멜의 털 망토까지 빌려 입고 나왔는데. 이 정도로는 냉기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나 보다.

‘뭐 하나라도 더 걸치고 나올 걸!’

애초에 추위도 많이 타는 편이면서.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군.

하지만 더 껴입겠다며 병실로 돌아갔다가는 두 번 다시 추위 속으로 나올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기왕 나온 거 적어도 30분은 걷다가 들어가자. 나는 질질 끌리는 망토 끝자락을 추스르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루멜의 말대로 크로넨 궁 뒤편의 회랑은 가볍게 산책하기에 딱 좋았다.

화려한 정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 펼쳐진 눈 쌓인 전나무 숲의 전경이 아주 운치가 있었다.

나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전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타박타박 걸어갔다. 저렇게 높은 전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건 처음 본다.

전나무에 한창 정신이 팔린 탓에, 회랑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 그들과 제법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누구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나와 서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가만히 붙박여 있는 두 사람을 관찰했다.

둘 다 똑같이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른 차림. 손에는 각자 기다란 빗자루와 대걸레, 나무 양동이를 들고 있다.

청소하러 온 하녀인가?

‘엄청 가볍게 입었네. 현지인에게 이 정도 추위는 별 것 아닌가 봐.’

어쩐지 서울의 추위 따윈 별거 아니라며 우쭐대던 철원 출신 친구가 생각이 났다.

아무튼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사람을 만났으니 인사해야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더 좋고!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데, 문득 저 사람들의 시선이 아까부터 어느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하얀색 강아지 한 마리를.

‘!’

사모예드처럼 털이 북슬북슬한 하얀색 강아지다. 크기는 20kg짜리 쌀 포대보다 조금 작은 정도. 골격 등을 봤을 때 아직 성견은 아니고, 청소년 시기쯤 된 것 같다.

그리고 강아지는, 지금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미세하게 떠는 모습과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날름거리며 코를 핥는 모습을 봤을 때 확실하다.

무슨 일이지? 어디서 온 아이일까?

‘그리고…… 그럼 저 사람들은 강아지가 무서워서 못 움직이고 있는 건가?’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나는 차분히 두 여자에게 다가갔다.

강아지가 그들을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이 틈에 저들이 자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까부터 움찔거리던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뒤돌아 뛰어가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안 돼!’

등을 보이며 달리는 순간, 분명 강아지가 달려들 텐데!

다행히 그들과 나의 거리는 이제 겨우 다섯 발자국뿐. 나는 빠르게 움직여 두 사람과 강아지 사이를 막아섰다.

등 뒤에서 두 여자가 행동을 멈추고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하지만 뒤돌아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강아지와 나의 눈이,

마주쳤으니까.

착각이었을까. 순간, 강아지의 눈이 붉은빛으로 번쩍였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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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아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나는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강아지를 노려보았다. 강아지 역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다행히 눈빛에서 적의나 공격성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돌변할지는 모르는 일.

그렇게 한동안 나와 강아지는 서로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기 싸움이 이어진다.

그러다 마침내, 강아지가 먼저 시선을 돌리며 물러섰다.

그래도 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대로 가만히 강아지를 주시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뒤편의 두 여자에게 속삭였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제 말을 들어주시겠어요?”

“네? 네, 네.”

덜덜 떨며 답하는 목소리가 앳되다. 멀리서 봤을 때는 나와 나이가 비슷할 줄 알았는데, 어쩌면 더 어릴지도.

상대가 나보다 어린 친구라는 생각이 들자 겁에 질린 숨소리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조용조용 설명을 시작했다.

“멀리서 보니 저 강아지 때문에 곤란해하시는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네? 하, 하지만 저걸 상대하셔도…… 괜찮으신가요……?”

괜찮냐니, 무슨 뜻이지? 흥분한 강아지를 제압해 본 적 있냐는 뜻인가?

그렇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죽기 전의 나는 대형견을 키우는 애견인이었고, 삼촌네 반려견 훈련소에서 아르바이트도 제법 오랫동안 했었는걸.

나는 두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런 일 많이 해봤거든요. 걱정 마세요.”

“많이…… 해보셨다고요? 정말요?”

“정말로요! 자, 그러니까 이제 걱정 마시고,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지금 강아지가 저는 의식하고 있지만, 대신 두 분께는 더 이상 관심을 두고 있지 않거든요.”

“네.”

“그러니 이제 천천히 뒤로 물러나세요. 강아지를 자극하지 않도록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면 회랑을 벗어나게 되실 텐데 괜찮으세요? 회랑 밖은 추울 텐데요.”

“괜찮아요. 오늘은 그렇게 추운 편이 아니니까…….”

추운 편이 아니라고? 난 얼어 죽을 것 같은데. 현지인 대단하네!

“다행이네요. 그럼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면서 실내로 들어가세요.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등을 보이거나 뛰면 안 돼요. 강아지가 흥분해서 달려들 수도 있어요.”

“네. 그럴게요.”

“좋아요. 이제 가세요.”

두 친구는 바로 뒷걸음을 치는 대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인다.

“저희가…… 기사님들을 바로 모셔올게요……!”

“?”

왜 저렇게 비장하게 말하는 거지? 기사들은 또 왜 데려오고?

조금 의아했지만 금방 의문을 털어버렸다. 저런 말을 던진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강아지, 어디 기사단 강아지인가 보네.’

홀로 납득하는 동안 등 뒤의 기척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다행히 강아지는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눈밭 위를 서성이며 연신 나를 힐끔거린다. 나도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회랑에 완전히 나와 강아지만이 남겨졌을 즈음, 강아지가 머뭇머뭇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풍성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순한 눈동자에서는 나에 대한 적대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주 약간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강아지의 걸음이 빨라졌다. 강아지가 종종종 내 발치로 걸어와 킁킁 냄새를 맡는다.

나는 강아지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내 주위를 강아지가 뱅글뱅글 돌며 열심히 코를 씰룩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만족할 만큼 나를 탐색한 강아지가 꼬리를 거세게 흔들며 내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발라당 배를 깐다.

“!”

모, 모르는 개가 갑자기 나한테 배를 깠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천천히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마주친 강아지의 눈에서 호기심과 애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혹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걸까? 의지할 사람을? 어쩐지 코끝이 찡해진다.

“안녕?”

나는 강아지가 다시 불안해하지 않도록 부러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턱밑을 쓰다듬어 주었다.

강아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손을 동원해 귀 뒤쪽도 긁어주고 가슴 털도 쓸어주었다.

잠시 후, 나와 강아지는 어느새 절친이 되어 바닥에서 함께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구 귀여워, 아구 예뻐. 우리 복슬복슬 귀염둥이~!”

“왕!”

강아지가 내 얼굴을 열정적으로 핥아댄다. 나도 강아지를 끌어안고 이곳저곳 열심히 긁어주었다. 그러면서 강아지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일단 눈에 띄는 상처는 없음. 건강상태도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음. 다만, 전체적으로 마르고 꼬질꼬질한 편.

그 외에도 행동과 눈빛 등 이런저런 요소를 종합해봤을 때, 이 아이는 주인에게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하고 방치당한 강아지임이 분명했다.

끙끙대며 품속으로 파고드는 강아지를 보니 문득 우리 집 귀여운 막내, 나의 소중한 반려견 빙수가 생각났다.

빙수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연히 자기를 귀여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강아지를 동시에 떠올리고 비교해보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강아지들은 모두 잔뜩 사랑받고 많이 행복해야 하는데……. 어디서 온 거니? 네 주인이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발가벗겨서 눈에 파묻은 다음 사흘 밤낮을 굶겨야지.

단단히 다짐하며 강아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때, 옆쪽에서 눈을 지르밟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애들이 사람을 보낸 건가?’

나는 고개를 돌려 발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

찬바람에 흩날리는 검푸른색 고수머리. 세상 만물을 오시하는 푸른색 눈동자.

전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새하얀 눈밭 위에, 사랑하는 나의 최애, 아스페이런 로아킨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 근데.’

쟤가 왜 여기 있어?!

반갑기는 하지만 당황스럽다. 등이 조금 축축해진 것 같았다. 나는 머뭇머뭇 그를 불렀다.

“구, 군주님?”

“…….”

아스페이런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눈을 크게 뜨고 입은 살짝 벌리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다.

손수 병실에 넣어뒀던 애가 뜬금없이 여기서 굴러다니고 있어서 놀란 걸까?

안 그래도 인상 사나운 애가 저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으니, 좀 무서웠다.

그런데 잠깐 방심했던 찰나, 내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강아지가 주르륵 빠져나갔다.

“아이고!”

얼른 다시 안으려 손을 뻗었지만 강아지는 잡을 틈도 없이 잽싸게 움직여 내게 등을 보이고 섰다. 그리고.

“으르릉―.”

몸을 살짝 낮춘 채 아스페이런을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세상에!’

지금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거야? 내가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기특해라! 하지만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얼른 강아지를 진정시키려는데 갑자기 저편에서 우르르 땅 무너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화들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한 무리의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나는 손을 뻗은 상태 그대로 굳어서 입을 떡 벌렸다. 저 기사들은 또 뭐야? 왜 누굴 잡으러 온 것처럼 무장을 하고 있지?

‘미치겠네!’

기사들은 급히 달려오다가 아스페이런을 보고 일사불란하게 멈춰 섰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대표로 인사를 올린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아스페이런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시선은 그대로 내게 고정된 채였다.

“그래.”

“저희는 하녀들에게서 목격 제보를 듣고 급히 나오는 길…… 흐어억.”

아스페이런에게 자신들이 온 이유를 잘만 설명하던 기사가 나를 힐끔 보더니 느닷없이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있던 기사들도 나와 강아지를 번갈아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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