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폭풍전야
(6/20)
6.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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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폭풍전야
2023.06.18.
‘내 사람으로 삼고 싶은 건가.’
아스페이런은 본래 인재욕(慾)이 강한 편이었다.
특히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유형의 인재를 좋아했다.
확실히, 그 여자가 이 인재상에 부합하기는 했다.
‘게다가 머리도 제법 쓸 줄 아는 것 같고, 대담함도 있지. 언변도 있는 편이고…….’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을 이곳에 붙들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스페이런은 제 미간을 문질렀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별처럼 반짝이던 여자의 눈동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결국, 아스페이런은 그답지 않게 결정을 보류하고 말았다.
“그건 그 증인의 의견을 물은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상을 내리겠다는 약조도 있었고.”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키아라가 다음 안건을 꺼내들었다.
여자를 만나러 가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생각조차 깊게 할 수 없을 만큼, 아스페이런은 오늘도 아주 바쁠 예정이었다.
아스페이런이 막 새로운 서류를 확인하려 하는 찰나였다. 조용하던 집무실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잠깐, 잠깐만요!”
“아 글쎄 이럴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먼저 군주님께…… 좀! 기다리라니까!”
“비키라니까!!”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활짝 열리며 하얀색 연구원 가운을 입은 두 사람이 우당탕 쏟아져 들어왔다.
그 뒤쪽으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종과 보좌관들이 보인다. 소란의 이유를 알게 된 아스페이런의 관자놀이에 불끈 힘줄이 돋았다.
“……됐으니 물러가라.”
아스페이런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했다. 적잖이 언짢아 보이는 모습에 두 시종은 인사를 올린 뒤 냉큼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소란의 원인인 두 침입자는 집무실 바닥에 엎어져서 헉헉대고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느라 힘을 다 뺀 모양이다.
아스페이런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골방에 처박혀 지내느라 군주에 대한 예의도 다 잊었나? 내가 손수 연구원들을 위한 예절 교육이라도 해줘야겠어?”
아스페이런이 확인 중이던 서류를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서류를 치운 뒤에야 바닥에 엎어진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묻는다.
“응? 프롬.”
프롬이라 불린 남자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완전히 일어나지는 않고 대신 죄인처럼 무릎을 꿇었다.
함께 들어 온 여자, 티티라도 함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었다.
아스페이런이 오른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 하는 거지? 내가 무료할까 염려되어 공연이라도 하러 온 건가? 그 충심이 실로 갸륵하군그래.”
“구, 군주님!”
거기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프롬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바닥에 힘껏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사고 쳤습니다!”
“네가 여기 와서 답지 않게 기어 다니고 있는 걸 보면 안다. 그래서 뭐지? 또 연구실을 터트리기라도 했나?”
프롬과 티티라는 아스페이런이 즉위 후 만든 벨트라움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제멋대로에 본인의 연구밖에 모르는 연구원들이 사고를 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때문에 아스페이런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그게……. 다, 달빛늑대개 한 마리가 탈출했습니다.”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보고였다.
아스페이런이 미간을 와작 구겼다. 달빛늑대개가 탈출했다니.
달빛늑대개는 몇 달 전 포획하여 연구소에서 돌보고 있는 새끼 괴수였다. 아무리 어려도 괴수는 괴수. 혹, 날뛰기라도 한다면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스페이런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쳤나?”
“아, 아뇨.”
“돌았나?”
“아닙니다!”
“그럼 여기까지만 살고 싶었던 모양이군.”
음산하게 내뱉은 말에 티티라의 몸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조용히 상황을 파악하던 키아라가 앞으로 나섰다. 진노하신 군주님을 진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군주의 최측근이자 수석 보좌관인 그녀의 몫이었으므로.
“염려 마십시오, 군주님. 마력 제어구를 채워두었으니 평범한 대형견 정도의 힘밖에 내지 못하지 않습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 그게.”
그러나 프롬이 늘어놓은 추가적인 내용에 키아라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티티라의 말로는 제어구에 살짝, 금이 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 망가질지 모른다고…….”
콰직.
아스페이런이 짚고 있던 책상에 금이 가더니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책상에 올려두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와장창 쏟아져 깨지고 부서진다. 그 잔해들을 앞에 두고 아스페이런의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스페이런을 제외한 방안의 모든 이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의 군주는 성군이자 왕국을 구원한 영웅이었으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성정이 그다지 온화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욕을 하며 사람을 패면 팼지 물건을 마구 부순 적은 없었다.
‘잘못한 놈만 조지면 되지 굳이 죄 없는 사람까지 고생시킬 필요는 없다’가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군주님께서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셨다는 것을.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두 연구원은 부서진 책상에서 자신들의 미래까지 보았다.
예쁘게 붙어 있던 자신의 머리와 몸통이 서로 영원히 작별을 고하게 되는 미래를 말이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라 빌어야 한다.
티티라가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르더니 냅다 바닥에 이마를 들이박았다.
쿵, 푹신한 카펫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충격에 집무실 바닥이 부르르 떨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비록 저는 소장님께 제어구가 곧 망가질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지만! 그럼에도 소장님이 무시하신 것이지만! 어쨌든 다 제 잘못입니다!”
“티티라! 자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사실을 말해서 죄송합니다!”
패닉에 빠진 두 연구원을 두고 아스페이런은 눈을 감았다. 저 멍청한 꼬락서니를 보니 화를 낼 의욕도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스페이런은 여느 때와 같은 무심함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포획해야 하니 내가 직접 가도록 하겠다. 프롬, 탈출한 지 얼마나 지났지?”
“저, 정황상 두 시간은 넘지 않았습니다.”
“멀리는 안 갔겠군.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조심스레 움직이느라 아직 연구소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거다. 키아라, 카니스.”
“예, 군주님.”
“옙!”
“기사단에 연락해서 연구소 일대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달해. 만일을 대비해서 사람들은 전부 실내로 들여보내라. 그리고.”
아스페이런의 냉랭한 눈동자가 두 연구원에게 향했다.
“저 새끼들 목 닦아놔.”
“구, 군주니임!”
연구원들의 처절한 애원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아스페이런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심심하다.
“27, 28, 29…….”
아스페이런이 가버린 후로 얼마나 지났지? 사흘? 나흘?
“32, 33, 34…….”
율리시스라면 순식간에 범죄자 놈들을 소탕해버렸을 텐데……. 그럼 슬슬 소식을 전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37, 38, 39.”
잠깐, 혹시.
“날 까맣게 잊어버린 거 아니야?!”
마지막 40을 세는 대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이 몸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대흉근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헉. 쉬어도 일어서서 쉬어야지.”
나는 서둘러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근육을 풀어 주었다.
현재 나는 가벼운 맨몸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이제 몸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계속 방 안에만 누워 있으려니 아무래도 좀이 쑤셔서 말이지.
‘흠. 진씨 집안 맏딸다운 훌륭한 선택이야. 엄마랑 아빠께서 자랑스러워하시겠군.’
기운차게 몸을 풀어 주던 나는 기분이다 싶어 냅다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했다. 물구나무서기는 엄마와 내 동생 연두가 우울해할 때마다 선보였던 나의 특기 중 하나였다.
“……오! 된다!”
양다리가 어렵지 않게 하늘을 향해 뻗어졌다. 몸이 휘청거리지도 않는다. 이쯤 되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 신체 능력 괜찮네!”
체력도 좋고 근력도 좋다. 앞으로 꾸준히 단련해준다면 웬만한 성인 남성들에게도 지지 않았던 전생의 나와 비슷한 수준이 될 듯싶었다.
“심신이 건강하면 뭐든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지.”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이제 아스에게 어떤 부분을 어필해서 일자리를 얻어낼지 생각을…….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며 물구나무선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양손으로 힘겹게 든 루멜의 눈과 거꾸로 뒤집힌 나의 눈이 마주친다.
“…….”
“…….”
나는 슬그머니 다리를 내리고 몸을 바로 했다. 방 안에 서먹한 정적이 흐른다.
‘수, 숨막혀…….’
서로 어색하게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천사 같은 루멜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먼저 말을 걸었다.
“……음, 역시 방 안에만 있으려니 좀 무료하죠?”
‘크흑, 이런 다정한 의사 선생님 같으니라고.’
환자의 기이한 행위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저 친절함을 보라. 딱 문을 열었는데 환자가 뜬금없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나였으면 귀신들린 줄 알았을 거야.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강 정돈하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으음,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하하하.”
“하하하.”
겸연쩍게 마주 웃으며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차려진 음식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내가 이 병실에 들어온 후, 루멜은 홀로 있는 나를 생각해서 끼니마다 가능한 한 식사를 함께해 주고 있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루멜과도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버터 바른 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맛있군.
그때였다. 열심히 쇠고기 수프를 퍼먹고 있는데, 루멜이 흥미로운 제안을 던졌다.
“무료하시다면, 근처에서 가볍게 산책을 하는 건 어떨까요?”
“산책이요?”
나는 반색하며 물었다. 루멜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제 기력을 많이 회복하시기도 했고, 가벼운 운동을 해주는 것도 좋으니까요.”
“군주님께 허락받지 않고 마음대로 나가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갇혀계신 게 아닌걸요. 음, 하지만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아요. 건물을 벗어나면 아주 추우니까요.”
루멜의 말에 의하면, 이곳 수도 벨로이는 로아킨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 무척 춥기 때문에 모든 궁과 건물에 난방용 온도 조절 마법을 걸어놨다고 한다.
덕분에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실내에서라면 어려움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어쩐지, 여기에는 보일러도 온돌도 없는데 따뜻하더라.’
“여기 크로넨 궁 뒤편에 긴 회랑이 있는데, 그곳까지는 온도 조절 마법의 영향권이에요. 산책하기 딱 좋죠. 식사가 끝나고 한번 다녀오는 건 어떠세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로아킨에 온 지 대략 나흘째. 이제야 겨우 밖을 구경해볼 수 있겠구나!
의욕이 마구 샘솟아서 나는 숟가락을 재게 놀렸다. 오늘따라 양송이 수프 맛이 더욱 고소했다.
조금 뒤에 있을 첫 산책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때의 나는, 그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