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복수는 확실하게 응징은 짜릿하게 (3/20)


3. 복수는 확실하게 응징은 짜릿하게
2023.06.08.


“깜짝이야!”

다락에서 내려 온 소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소녀는 다름 아닌 이장의 손녀딸인 밀라였다.

이장은 언짢은 마음에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꾸짖었다.

“이 할아비가 분명 말하지 않았어! ‘그 애’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할아버지의 고함 앞에서 밀라는 태연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나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온 거거든요? 이것 때문에요!”

“음? 이게 무어야?”

이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녀딸이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좋은 향이 나는 앙증맞은 주머니였다.

“포푸리예요. 말린 허브를 넣어서 만든 거요.”

“……네가 만든 거냐?”

“제가 이걸 어떻게 만들어요? ‘그 애’가 만든 거예요. 문이 완전히 열려서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소일거리라도 하겠다면서 만들던데요. 재료는 제가 가져다줬고요.”

주머니를 다시 가져간 밀라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걔는 자기가 간 뒤에 사람들한테 선물로 나눠주라고 했는데, 미쳤어요? 이 예쁜 걸 공짜로 주게. 도시에 장이 서면 제가 가져다 팔 거예요.”

살뜰하게 제 몫을 챙기는 손녀의 모습에 이장은 마음이 흐뭇해졌다.

게다가 입이 트인 뒤로 망아지마냥 날뛰던 ‘그 애’가 결국 제 운명을 받아들였다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이장은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손녀딸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그래, 그래. 역시 우리 손녀는 나를 닮았단 말이야. 그것 팔고 번 돈은 네 지참금에 보태…….”

쿠구궁―.

갑작스러운 강력한 진동에 이장과 밀라는 바닥에 엎어졌다. 바깥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은 엉금엉금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에 솟아 있던 노란색 빛줄기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점차 하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빛이 완전히 하얀색으로 변하면, 트로노스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괴수가 튀어나올 것이다.

이장은 대경실색하여 손녀를 떠밀었다.

“나는 당장 도련님께 가보마! 너는 가서 ‘그 애’를 데리고 오거라, 얼른!”

“네, 네……!”

두 사람이 허둥지둥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진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이 마을의 끝을 고하듯이.

* * *

마을 서쪽 외곽에 자리한 낮은 언덕.

그 앞에 예쁘장한 외모의 한 여자가 제물을 상징하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물끄러미 서 있었다. 그녀의 곧은 시선은 구름 너머까지 길게 솟은 거대한 빛기둥에 닿아 있었다.

저렴한 원단의 붉은색 치맛자락이 바람결에 따라 하늘하늘 흔들린다.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이장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너무 원망 말거, 우렛취!”

의미 없는 위로를 하려던 이장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괴상한 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여자에게서 진한 허브 향이 진동을 한 탓이다.

여자는 그런 이장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제 발로 의연하게 앞을 향했다. 여자가 반항하면 억지로 떠밀 생각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들고 있던 장대를 머쓱하게 등 뒤로 숨겼다.

빛기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일찍이 도착했던 빅시르 부렌이 서 있었다.

빅시르 부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문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슴을 펴고 섰다.

마침내 여자가 대화가 가능할 만큼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빅시르 부렌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짝다리를 짚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 무섭나? 응?”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무룩한 몸짓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여자의 얼굴은 누가 봐도 심장이 아릿해질 정도로 처연해져 있었다.

촉촉한 눈동자를 마주한 빅시르 부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놈을 가만히 응시하며 여자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애절한 목소리였다.

빅시르 부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에 여자와의 달콤하고 즐거운 삶, 결혼부터 죽음까지가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크흠, 무서워서 아양 떨기는. 역시 이X도 어쩔 수 없는 계집이었던 게지.’

마음이 흡족해진 빅시르 부렌은 목을 큼큼 가다듬고 자상한 목소리를 꾸며내었다.

“난 아량 있는 사내니까, 지금이라도 내 여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특별히 용서해주마. 자, 이리 와라.”

빅시르 부렌이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가 제게로 힘차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빅시르 부렌의 입이 싱글벙글 벌어졌다. 그러다 점차 가까워지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왜, 왜…… 저렇게 눈을 번뜩이며 달려오고 있는 거지.’

꼭, 철천지원수를 똥통에 자빠트리기 직전의 얼굴로…….

“……자, 잠깐! 멈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빅시르 부렌이 다급히 외쳤다. 물론, 당연하게도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빅시르 부렌의 가랑이에 강력한 드롭킥이 내리꽂혔다.

뽀각,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사람들의 경악 속에서, 찢어지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응징, 완료.’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쏜 뒤 완벽한 낙법으로 마무리한 나는 만족스럽게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힐끗 보니 빅시르 부렌은 입에 거품까지 문 채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뒤집힌 벌레마냥 버둥거리는 몸짓이 추하기 그지없었다.

“쓰레기 새X.”

나는 콧김을 흥 뿜었다.

갇혀 있던 지난 이틀 동안, 이장과 번갈아가며 식사를 가져다주었던 이장의 수다쟁이 손녀는 밥을 먹는 내게 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대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빅시르 부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 막내 도련님은 부인도 있으시면서 계속 그렇게 새로운 여자를 찾아 돌아다니신단 말이야.

- ……결혼을 했다고?

- 몰랐어? 하긴, 누가 너한테 그런 얘기를 떠들겠니. 결혼하셨어. 근데 사이는 별로래. 부인이 못생겨서 싫다나 뭐라나. 아, 그래서 예쁜 여자만 보이면 가서 건드는 건가?

- …….

-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편이야. 첩으로 들이겠다고 하셨다며? 다른 여자들은 그냥 한 번 가지고 놀고 버리셨는데. 그래서 영지 곳곳에 도련님 사생아가 가득하잖아. 푸하하! 그러고 보니 넌 아직이야?

- 아직이냐니?

- 넌 아직 도련님 안 모셨냐고. 저번에 뒷골목으로 같이 가는 거 봤는데……. 참, 그 직후에 문이 열렸었지. 그래서 아직 못 했……깜짝이야! 너 뭐 부쉈니?

한량처럼 돌아다니며 여자들에게 찝쩍대기나 하는 단순 변태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빅시르 부렌은 상상 이상의 변태 쓰레기 범죄자 새X였다.

무려 영주님의 막내아드님이시니 지금껏 누구도 놈을 막지 않았겠지. 또한 놈은 앞으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갈 것이다.

‘그걸 그냥 둘 수는 없지.’

여중 여고 여대 코스를 밟은 이 몸께서 그간 응징한 변태 자식들만 몇 트럭이던가.

오늘, 변태를 토벌하기 위해 전설의 에그 브레이커 갓노란님이 귀환하셨다.

나는 내 3324894번째 업적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어지간히도 아픈지―당연한 일이지만―놈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슬쩍 뒤를 돌아보니 마을 사람 몇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쯧.”

혀를 한 번 차고 즉시 언덕 위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이 타이밍에 붙잡히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정상에 다다르자 거대한 빛기둥이 번쩍이며 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계를 관통하듯 길게 내리꽂힌 문의 모습은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과 몹시 흡사했다. 그래서일까.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란빛 기둥은 점차 하얀색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이 빛이 완전히 하얗게 됐을 때, 이 마을에는 재앙이 내릴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왜냐하면 ‘아스페이런을 만나러 가야 한다’라는 목표를 설정한 후 내가 택한 방법이 바로, 그냥 눈 딱 감고 트로노스에 뛰어드는 것이었으니까.

소설 <운명을 바꿔보려 합니다>에는 남주인공 율리시스가 트로노스에 제물로 바쳐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모든 오해와 갈등의 시발점이 되는 아주 중요한 에피소드로, 백만 독자의 가슴과 위장을 쓰리게 했었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아무튼 율리시스는 이후 엘로스로 넘어가 있는 줄도 몰랐던 사촌 아스페이런과 만나며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맨몸으로 괴수들의 세계에 내던져진 율리시스가 무사히 엘로스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렇다는 건, 율리시스가 들어간 문 근처에 엘로스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율리시스가 들어간 문이 생긴 숲은 이 마을 옆에 있는 숲과 같은 곳이었다.

추측해 보자면 즉, 이 마을에 생긴 문 근처에도 분명 엘로스로 통하는 문이 있을 터.

‘게다가 로아킨에서는 트로노스 정찰조가 매일 규칙적으로 문 주위를 정찰한다고 했어. 괴수들한테 잡아먹힐 확률보다 구출될 확률이 더 높아!’

다만 완전히 운에만 맡길 수는 없으니, 괴수들에 대한 대비책도 하나 준비해 두었다.

바로 살균 효과가 있는 허브를 이용하는 것이다.

작중에서 여주인공 보니타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괴수들은 살균 효과가 있는 허브 향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갇혀 있던 이틀 동안 이장의 손녀를 꿰어서 얻어낸 한 무더기의 말린 허브와 린넨 조각들로 포푸리를 만들었다.

하루 종일 허브를 끼고 있었던 덕분에 전신에 진한 허브 향이 흠뻑 배었다. 뿐만 아니라 옷 안 쪽에 포푸리 여섯 개 정도를 달아놓기도 했다.

이제 나는 괴수들에게 있어 똥밭에서 몇 바퀴 구른 주먹밥이나 다름없었다. 절대 먹지 않겠지.

‘준비는 완벽해.’

다시금 계획을 정돈한 뒤, 언덕 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언덕 밑에서는 사람들이 쓰러진 빅시르 부렌과 나를 번갈아 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나는 그 모양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손을 척, 들어올렸다.

그리고.

“저 애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나의 양쪽 가운뎃손가락이 위풍당당하게 우뚝 섰다.

나는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그리고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려서,

“이기적인 새X들아―!!!”

힘차게 사자후를 내질렀다!

저 멀리 마을 사람들의 입이 일제히 떡 벌어지는 게 보인다.

음, 짜릿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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