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이름 없는 여자 (2/20)


2. 이름 없는 여자
2023.06.04.


“네가 이해하거라. 그동안 우리가 네게 얼마나 잘해줬니? 기억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너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범죄자 할배가 혓바닥만 기네.’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수프를 퍽퍽 퍼먹었다.

수프는 건더기 하나 없이 묽었고 함께 온 빵은 못을 박아도 될 만큼 딱딱했지만, 이런 것이라도 먹어서 기운을 보충해야 했다.

“넌 은혜를 갚는 거야. 그뿐이냐? 우리 마을의 영웅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원망 말고…….”

덜그럭.

슬슬 좀 가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 알뜰하게 싹싹 긁어먹은 수프 그릇을 문에 난 작은 개구멍 너머로 휙, 밀어버렸다.

그러자 시끄럽던 중얼거림이 드디어 멎었다. 열심히 떠들던 할배, 즉 이 마을의 이장이 혀를 쯧 차며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마침내 완전히 고요해졌을 때, 나는 슬쩍 개구멍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장은 없지만 그 대신 계단 밑쪽에 장정 둘이 지키고 서 있는 게 보인다.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염병할……. 어떻게 도망갈 틈을 안 주네.’

<운바합>에 빙의하고 한판 거하게 비명을 지른 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이 방에 갇히고 말았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흥분은 많이 가라앉았고, 내가 빙의한 이 몸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근처에 있던 반신 거울 앞에 섰다.

뿌연 거울 속에 밀밭 같은 연갈색 단발머리를 가진, 밝은 갈색 눈의 여자가 비쳤다. 혈색 좋은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제법 귀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나랑 좀, 닮은 것 같은데.”

놀랍게도 원래의 내 얼굴과 굉장히 흡사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얼굴을 이 세계에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게 잘 바꿔 보면 아마 이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게다가 키랑 덩치도 비슷하고.

“다른 세계의…… 도플갱어?”

정말 도플갱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거울을 볼 때마다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구먼.”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몸을 관찰할 때였다. 갑자기 굳게 닫힌 문에서 잘그락잘그락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비열한 미소를 지은 한 남자가 들어섰다.

썩은 동태가 친구야 반갑다 할 것 같은 눈동자, 욕심이 더글더글 뭉쳐 처진 눈 밑 살,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역겨운 입.

나는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저 자식의 이름은 빅시르 부렌.

‘이 몸’의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린 개망나니 자식이었다.

“여어, 예쁜이. 잘 있었어? 살이 좀 빠졌나? 너무 마르면 만질 게 없어서 별론데.”

망할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추잡한 희롱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나는 욕을 내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등장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상대의 시각·청각·후각을 전부 녹아웃 시키다니, 정말이지 비범한 개자식이다.

빅시르 부렌이 휘익휘익 휘파람을 불며 건들건들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끈적한 시선이 느껴진다.

“오늘은 말 안 해? 어제는 잘만 비명 지르더니. 말해봐. 기왕이면 애교도 좀 떨어보고.”

‘또라이 아냐?’

당장 저 자식의 꼬부라진 머리털을 죄다 뜯어 놓고 싶다는 욕망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해.

나는 주먹을 야무지게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인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은 지껄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님 노래라도 한 곡 뽑아보든가. 크흠, 목소리가 제법 귀엽던데. 얼굴이 귀여워서 그런가.”

그러고는 술 냄새 짙게 밴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툭 친다.

……변태 쓰레기에 대한 나의 넓디넓은 자비와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나는 놈의 손을 거세게 쳐내버리고 코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빅시르 부렌이 피식 웃는다.

“왜? 부끄러워? 하긴, 이 몸을 앞에 두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여자는 지금껏 없었…….”

“너 입 냄새나.”

좁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빅시르 부렌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놈이 얼이 빠져서는 물었다.

“무, 뭐?”

“입 냄새난다고. 비린내 나. 신장 안 좋은 거 아냐?”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선 뒤 과장되게 기침을 하며 손도 휘휘 저어 주었다. 빅시르 부렌의 입이 더욱 크게 벌어진다.

곧, 놈이 한겨울에 나신으로 내쫓긴 사람마냥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이, 이, 싸가지 없는 X이! 제 이름도 모르는 근본 없는 계집 좀 예뻐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감히, 감히 내게!”

제 이름도 모르는 근본 없는 계집.

저열한 모욕이었다. 다만 문제는.

‘저게 다 사실이라는 거지.’

나는 갇혀 있는 동안 입수했던 내가 빙의한 여자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알아낸 바로는, 이 여자는 정말로 이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족도, 친구도 없다. 심지어 이곳이 고향도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반년 전, 여자는 어느 날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났다고 한다.

질 좋고 깔끔한 옷을 입은 그녀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거기에 더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소 꺼림칙해 했으나, 결국 의논 끝에 여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좋은 옷과 바른 몸가짐,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예쁘장한 외모가 귀한 집 아가씨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억도 이름도 없는 여자는 마을에 정착했다. 손재주가 꽤 좋았던 덕에 바느질 등의 일감을 도맡아 하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도 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삶이었다. 웬 개망나니 새X 하나가 술병을 끼고 거들먹거리며 마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망나니가 바로 지금 여기 있는 빅시르 부렌. 이 근방을 다스리는 늙은 영주의 막내아들이었다.

빅시르 부렌은 여자를 보자마자 헤벌쭉해져서는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치근대기 시작했다. 제 첩이 되라고 말이다.

그러나 빅시르 부렌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던 여자는 당연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거절당한 빅시르 부렌은 분노로 눈이 뱅글 돌아버리고 만다.

마을에 괴수들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을 본 빅시르 부렌은 결정을 내렸다.

감히 자신을 거절한 괘씸한 여자를 괴수들에게 제물로 바쳐버리겠다고.

그렇게 해서 지금 이런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내가 특별히!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받아주려고 했거늘! 좋아, 해보자고! 네 그 반반한 낯짝이 괴수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일그러질지 아주 기대가 되는군!”

제자리에서 펄펄 뛰며 소리친 빅시르 부렌은 그대로 쿵쾅대며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제깟 게 그래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래도 시끄러운 쓰레기통을 상대하고 나니 조금 피곤하군. 나는 흐물렁 흐물렁 침대로 걸어가 철푸덕 드러누웠다.

그대로 한숨 잘까 싶었지만…….

“음.”

몸이 편해지니 머릿속에 근심이 가득 찬다. 이제 슬슬 나의 막막한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되겠는데 말이야.

<운바합>에 빙의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났던 미션창은, 그날 잠시 허공에 떠 있다가 자동으로 사라진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혼자 ‘미션창!’이니 ‘상태창!’이니 부르짖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별 기능은 없이 단순히 내게 시한부 상태를 알려주기 위한 용도였던 걸까?

‘그럼 대체 누가 보낸 거지? 혹시 <운바합>의 작가님?’

모르겠는 것투성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미션창을 무시하면 내가 정말로 죽게 될 거라는 사실.

내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아스페이런을 결혼시켜라’라는 미션을 수행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일단…… 아스페이런에게 가야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운바합>에는 세 개의 세계가 등장한다. 아스페이런이 살고 있는 세계 엘로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세계 엘바스, 그리고 두 세계의 사이에 있는 괴수들의 세계 트로노스.

막 빙의했을 때 들은 정보에 의하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엘바스에 있는 그란시아 제국이었다. <운바합>의 남주인공 율리시스가 다스리는 나라 말이다.

즉, 아스페이런에게 가려면 세계를 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대량의 운을 필요로 하는 무모한 모험이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바로 아스페이런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전생에 몇 번이나 읽었던 <운바합>의 내용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한번 해 봐?”

결심은 금방 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정했으니, 이제 대량의 ‘운’을 위한 기반을 다질 때였다.

16858844590371.jpg

 
마을 이장은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그 애’를 위한 음식 몇 가지가 놓인 쟁반이 들려 있었다. 묽은 스프 그릇을 내려다보는 이장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기존의 두 세계, 엘바스와 엘로스 사이에서 새로이 발견된 제 3의 세계 ‘트로노스’.

트로노스는 모든 상식에서 벗어난 세계이자 일반적인 생명체는 살 수 없는 ‘괴수’들의 영역이었다.

본래 세 개의 세계는 단절되어 있었으나, 대략 500년 전부터 엘로스와 엘바스에 트로노스로 통하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통해 온갖 괴수들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공격했다.

마법이나 오러가 아니면 상처 입힐 수 없는 괴수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법사와 오러 유저가 극히 드문 시골 지방은 문이 열리는 순간 그냥 죽은 목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문이 열렸을 때, 이장은 그대로 혼절할 뻔했다.

물론 괴수들에 대한 대비가 철저히 짜인 지금은 황실에 구조 요청을 하기만 하면 곧바로 토벌대가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괴수와의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마을은 난장판이 될 게 분명했다.

어떤 방법을 취한대도 마을에는 어느 정도 피해가 올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바로 그때였다. 최근 뻔질나게 마을에 드나들었던 영주님의 막내 도련님이 낄낄낄 웃으며 나타난 것은.

- 뭘 그리 걱정해? 구조 요청할 필요 없어! ‘인간 제물’을 바치면 되잖아!

인간 제물.

「문에서 괴수가 나오기 전에 살아 있는 인간 제물을 바치면 문이 사라진다.」는, 근원 모를 소문으로부터 시작된 문 대처 방법.

잔인하기 짝이 없지만, 실제로 제물을 바치면 열에 일곱 정도는 문이 닫혔기에 예로부터 사람들이 몰래몰래 이용하던 수법이었다.

확실히 인간 제물을 바치면 괴수가 나올 일도 없을 테니 마을은 조금의 피해도 없이 무사할 것이다.

그러나 암암리에 허락하는 분위기였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새로 즉위한 율리시스 황제가 인간 제물을 엄격히 금지했다. 발각되는 순간 분명 화를 면치 못할 터.

이장이 망설이자 빅시르 부렌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 쫄기는! 네놈들만 입 꾹 다물면 이깟 촌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을 황제가 어떻게 알겠어?

당당한 주장에 이장의 마음은 점점 기울었다.

게다가 빅시르 부렌이 지목한 제물은 ‘그 애’였다. 이름도 가족도 없는, 자신들이 아량을 베풀어 거두어 준 여자.

결국 이장은,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마을을 지킬 수만 있다면 고작 한 명 희생시키는 것 정도야 별 것 아닌 일이지. 솔직히 본인도 기쁘게 제 한 몸 바쳐야 하는 것 아닌가?’

정작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그 한 명이 될 생각이 없으면서 이장은 잘도 그리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마침내 ‘그 애’가 갇혀 있는 다락방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한 소녀가 위쪽에서 살금살금 걸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분명 도련님께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아 놓았을 터인데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탐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노인은 안 그래도 주름이 진 얼굴을 더더욱 와그작 구기고 지팡이를 흔들며 크게 호통쳤다.

“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