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최애를 결혼시키지 못하면 죽습니다 (1/20)


1. 최애를 결혼시키지 못하면 죽습니다
2023.06.01.


정말이지, 중매 서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나는 양 주먹을 꼭 쥔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채로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두운 밤을 가닥가닥 뽑아내어 엮은 듯한 고수머리. 심해를 닮은 푸른빛 눈동자.

남자는 서리가 내려앉은 눈 조각상처럼 숨 막히도록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결코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전신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엄이, 범인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압도적인 위압감이,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자의 타고난 기백이, 오히려 그를 거대한 설산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설산 같은 남자는 지금…….

“…….”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얼굴로 홍차를 우리는 중이었다.

“!”

찻주전자에 물을 담은 뒤 뒤집어 두었던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밑으로 떨어지자, 남자가 재빠르게 움직여 찻잔에 진하게 우린 홍차를 따라내었다.

그러고 나서 비장한 낯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어 든다.

‘와, 와아악!’

그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거대한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몹시도 앙증맞은 디자인의 새하얀 밀크 저그였으니까.

“구, 군주님.”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하듯이 진중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극히 섬세한 손길이 홍차가 담긴 찻잔에 데운 우유를 붓는다. 홍차와 우유의 비율은 정확히 1:1.

이윽고 목표한 만큼 우유를 부은 남자가 절도 있게 우유 줄기를 끊었다. 그리고 밀크 저그를 내려놓은 뒤 이번에는 설탕 단지를 집어 든다.

각설탕은 더도 덜도 없이 딱 세 개만. 그보다 적으면 밋밋하고, 많으면 너무 달다.

그 후에 잘 저어 주면…….

“자, 먹어라.”

……내 입맛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맛있는 밀크티가 완성된다.

남자가 묘하게 뿌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떨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가 내게 밀크티를 만들어 준 건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당혹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저 남자, 이곳 로아킨 왕국의 군주이자 나의 최애 캐릭터인 아스페이런 로아킨은…… 냉정하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북부 대공 캐릭터인걸.

‘우리 아스가 이런 달달한 밀크티를 만들다니!’

그것도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대체 그딴 걸 왜 처먹는 거냐고 말했던 애가!

어색함을 걷어내기 위해 일단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베르가모트를 블렌딩한 찻잎을 쓴 덕분에 찻물에서는 기분 좋은 상큼함이 느껴졌다.

나는 낯설어하던 것도 잊고 솔직하게 감탄했다.

“정말 맛있어요!”

“음.”

아스페이런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지.’

나의 최종 목표를 위한 마지막 단계를 실현할 대망의 그 ‘때’가.

아스페이런의 신뢰와 호감을 얻기 위해 지난 몇 달간 했던 무수한 노력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군주의 최측근 자리는, 전부 이 순간을 위한 발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아스페이런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

나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진중하게 물었다.

“군주님, 뭐 하나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조금 무례할지도 모르지만요…….”

“해.”

“옙, 그럼.”

긴장을 풀기 위해 우선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빠르게 내뱉었다.

“군주님, 혹시 결혼하실 생각 있으세요?”

“너는?”

묻기가 무섭게 답변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하고 싶죠?”

“……그런가.”

아스페이런이 제 입가를 매만졌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기뻐 보인다.

“나도 그렇다.”

“오!”

이성 대하기를 돌같이 하기에 걱정했는데, 그래도 결혼을 하고 싶긴 했던 거군?

긍정적인 답변에 기분이 붕붕 들떴다. 이거 일이 제법 쉽게 풀릴 것 같은걸. 그렇다면 지금 진도를 좀 더 빼볼까?

나는 주섬주섬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 왕성 도서관에서 찾은 책이었다. 그것을 아스페이런에게 쓱 내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요즘 관심 가지고 있는 책이 있는데요. 군주님께서도 한번 봐 주시겠어요?”

아스페이런이 책을 받아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책표지를 훑는다.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452년 로아킨 미혼 귀족 초상화집 - 여자편」

“이상형을 찾고 싶어서요!”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책을 보고 대화를 나누며 그의 외모 취향에 대해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책표지만 들여다보던 아스페이런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형?”

“네?”

화르륵.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책에 불이 붙었다.

“엇!”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책은 어떻게 손 써볼 틈도 없이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왜, 왜에…….”

몸이 절로 파르르 떨린다. 어이가 없었다. 책이 뜬금없이 자연발화 할 리는 없으니, 분명 아스페이런이 마법을 쓴 것일 터다.

……정작 본인은 시침 뚝 떼고 있다만.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아! 혹시 여자편이라서 그런가?’

그랬구나! 나는 허겁지겁 다른 책을 꺼내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군요. 여기, 남자편도 있…….”

제대로 꺼내들기도 전에 「452년 로아킨 미혼 귀족 초상화집 - 남자편」 역시 불타 사라졌다.

나는 텅 빈 두 손을 허망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불쑥, 시야 안으로 크고 단단한 손이 들어왔다. 아스페이런의 손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올린다.

그리고 마주친 아스페이런의 푸른 눈동자는,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슈리아.”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네, 네에.”

“너는 무엇이든 해도 좋고, 무엇을 원해도 괜찮아. 다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라.”

“한 가지라면……?”

아스페이런의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에 나긋나긋 내려앉는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는 꺼내지 마.”

“예?”

“다른 이에게 시선 주지 마라. 나에게만 집중해.”

“예에?”

기겁하며 되물었으나, 대답을 요구하는 아스페이런의 시선은 끈적하리만치 집요했다. 결국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엡…….”

“그래.”

그제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낯을 한 아스페이런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호두파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내게 내민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파이를 받아먹었다.

“맛있나?”

자못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아스페이런이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알아서 제 할 일을 척척 하는 몸과 달리 정신은 아까부터 파업해서 저 멀리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지 말라니.’

그럼…… 어떻게 중매를 서야 하지? 어떻게 괜찮은 사람을 소개시켜서, 어떻게 너의 해피 웨딩을 보냔 말이야.

‘젠장!’

절망 어린 비명이 내면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내 이름은 슈리아. 전생의 이름은 진노란.

나는 3년 안에 이 남자, 아스페이런 로아킨을 결혼시키지 못하면 죽을 운명이었다.

16856209860612.jpg


<운명을 바꿔보려 합니다> 줄여서 <운바합>.

<운바합>은 웹소설 무료 연재 사이트에서 절찬리에 완결된 로판 소설이자, 로판 독자 경력 10년 차인 나의 최애 소설이었다.

솔직히 냉정하게 말해서, <운바합>의 스토리 라인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죽고 나서 소설 속 악녀로 환생한 여주인공이 살기 위해 남주인공에게 잘해주다가 훌륭하게 자란 남주인공에게 집착당하는, 흔하디흔한 ‘오해+착각 악녀 환생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바합>이 내 최애 소설 자리에 등극한 이유는, 다름 아닌 <운바합> 안에 나의 인생 최애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페이런 로아킨. 남주인공 율리시스의 사촌 형이자 눈의 왕국 로아킨을 다스리는 북부의 군주.

등장 때마다 외모 찬양만 다섯 줄이 넘어가던 그는 모든 고구마를 한 방에 해치워버리는 극강의 사이다력과 매력적인 입담,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골고루 갖춘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인 캐릭터였다.

다만…… 아스페이런은 눈물이 줄줄 날 정도로 분량이 없었다.

300화에 육박하는 소설 내에서 아스페이런이 직접적으로 등장한 에피소드는 겨우 다섯 개.

제 짝과의 로맨스 장면까지 챙겨간 다른 조연들에 비하면 형편없다 못해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수준이었다.

원통했지만, 그렇다고 작가님에게 아스페이런 분량 좀 달라며 진상처럼 징징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별수 없이 아스페이런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각각 최소 50번씩 돌려보며 서러움을 삭였다.

그러나 꾹꾹 눌러 참아온 불만은 결국 <운바합> 마지막 편이 올라온 날 완전히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글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 마지막 화에서조차도 아스페이런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남주인공의 친가족인데도!

나는 개껌을 빼앗긴 강아지마냥 한밤중에 펄펄 날뛰며 울부짖었다. 어느새 손가락은 미친 듯이 움직여 마지막 화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작가님, 우리 아스 분량 왜 이래요? 역시 솔로라서 그런 건가요? 그럼 제발 우리 애도 결혼시켜주세요. 아스 결혼식 날 축가 불러주는 게 제 인생 최대의 소원입니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추태였으나 그때는 분통함과 술에 취해 약간 맛이 간 상태였었다.

그런데 그런 구질구질한 진상 짓을 해서 벌을 받은 것일까?

바로 다음 날, 나는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트럭에 치여 22살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율리시스 황제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이런 지방 촌구석에 박힌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알 도리가 있겠어?”

눈을 떠보니 내 최애 소설 <운명을 바꿔보려 합니다>의 완결 후 시점에 뚝 떨어져 있었고.

“그러니까 모두 입 다물고 있어. 이 계집애는 말한 대로 문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괴수들에게 던져버릴 거니까!”

빙의한 몸은 곧 괴수들에게 제물로 바쳐져 죽을 운명이었으며.

[미션! 너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고 싶어!

로아킨 왕국의 군주, 아스페이런 로아킨을 3년 내에 결혼시키세요!

실패 시 : 아스페이런 로아킨 평생 독신 엔딩, 진노란의 영혼 영구 소멸.]

웬 미션 창에 의해, 졸지에 시한부 인생이 되어버렸다.

16856209860619.jpg

나는 멀거니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을 올려다보았다.

10년 경력 로판 독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흠. 그래도 여기서 예의상 비명 정도는 한번 질러줘야겠지.

“끼아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도련님, 이 계집애가 갑자기 입이 트였는뎁쇼?”

“이, 일단 데려가서 가둬!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찢어지는 비명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 속에서 나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