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선물 feat. 판도라의 상자>
“미국 유타주 출신이죠?”
엘라가 묻자 아폴로는 아까보다 더 얼굴이 빨개졌다.
이제는 홍당무에서 아예 토마토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솔레이크시티가 집이에요.”
“그럼 운석도 솔레이크시티에서 발견했어요?”
“아니요. 그건 교외의 캠프장에서 찾았어요.”
대한과 엘라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지니는 운석 안에서 발견했고요?”
“네, 집에 가져가서 책상 위에 놓고 잠을 잤는데 아침이 되니 두 쪽으로 쪼개져 있더라고요.”
아폴로의 말에 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에바와 만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베타글루칸(A)은 지니에게 배웠나요?”
“네, 지니한테 배웠어요.”
“지니와는 얼마나 같이 있었어요?”
“일주일이요.”
“아! 일주일.”
아폴로의 말에 대한은 눈을 빛냈다.
“그럼 일주일 만에 그 몸이 완성됐다는 말인가요?”
“뭐 비슷해요. 그동안 꾸준히 운동과 훈련을 통해 완성하긴 했지만. 이미 그 전에 큰 줄기는 지니가 잡아주고 갔어요.”
지니 생각이 났는지 아폴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에바와는 확실히 다른 케이스네.’
―같은 피코셀이라고 해도 감히 에바와 비교할 수는 없죠.
엘라의 말에 대한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폴로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알겠다.
에바는 특별하다.
그것도 기존의 피코셀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왜 그렇게 특별한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폴로를 만나기 전까지.
대한은 모든 피코셀이 에바와 같은 줄로만 알았다.
“지니가 많이 보고 싶겠어요.”
“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갔어요. 건강도 주고 튼튼한 몸도 주고 세상에 없는 무술도 전해주고. 아! 마지막 말은 이제 맞지 않겠네요.”
아폴로는 대한을 쳐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는 이상,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괜히 정부의 눈에 띄면 인체실험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 알아요. 그래도 저도 되도록 오러를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대가 너무 강해서 순간적으로 유혹을 참지 못했어요.”
대한의 따끔한 충고에 아폴로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엘라는 주먹으로 살짝 대한의 팔을 쳤다.
곱게 한번 흘겨본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은 아폴로가 걱정돼서 앞으로 조심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에요. 야단을 친 게 아니니까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아! 네. 그럼요. 저는 괜찮습니다.”
엘라의 말에 아폴로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모습이 대한에게는 오히려 무지하게 거슬렸다.
그래도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신의 펀치와 킥을 맞고 기절한 몸이라서 그런지.
왠지 무슨 말만 하면 금세 주눅이 들곤 했다.
일종의 자격지심인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엘라의 말에는 껌뻑 죽는다는 점이다.
엘라도 그걸 깨달았는지 살살 달래서 그간의 사정을 송두리째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대한은 아폴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에바!’
―네, 마스터.
‘어떻게 됐어?’
―아폴로의 집과 일대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는 물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별다른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럼 아폴로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거네.’
―네, 그래요. 우연히 피코셀이 든 운석을 발견해서 건강을 되찾고 몸을 강화시킨 게 틀림없어요.
‘알았어. 수고했어.’
―천만에요.
대한은 슬쩍 엘라를 쳐다봤다.
엘라도 에바를 통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때, 에바도 찾지 못했던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아니 굴러들어왔다.
“…그래서 지니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운석을 가공했어요. 그랬더니 이런 모양이 됐어요.”
“아!”
아폴로가 갑자기 테이블 위에 야구공만 한 쇠공을 올려놓았다.
대한은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아챘다.
에바를 담고 있던 용기였다.
그런데 엘라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이, 이건.”
엘라는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쇠공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한은 옆에서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가만히 살펴보니 쇠공 표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수한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슨 글자 같기도 했다.
“이거 제가 좀 살펴봐도 되죠?”
“물론이죠. 원하시면 선물로 드릴게요.”
아폴로의 말에 대한은 순간 울컥했다.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조금 전까지 지니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운석을 가공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고새를 못 참고 엘라에게 냉큼 바쳐!’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열이 오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남모르게 심호흡을 할 따름이었다.
“선물 고맙게 잘 받을게요. 이런 멋진 선물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엘라는 아폴로의 선물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한을 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줬다.
그녀의 말에 당연히 아폴로의 입은 헤벌쭉 벌어졌다.
“하하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이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멋진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아폴로에게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가끔 만나서 이렇게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네요.”
“그 정도면 문제없어요. 어쨌든 알았어요. 선물은 내가 한번 고민해볼게요.”
“아니, 뭐 고민을 할 것까지야.”
엘라의 말에 아폴로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좋아했다.
그걸 바라보고 대한의 심사는 점차 뒤틀리고 있었다.
그때, 엘라가 그의 옆구리를 푹 쑤시고 들어왔다.
“오빠는 나한테 뭐 선물할 거 없어요?”
“없는데. 왜? 나도 저런 거 만들어서 선물이라도 하라는 거야?”
대한은 말을 하면서도 살짝 짜증이 났다.
마치 자신과 아폴로를 비교하는 듯한 이 분위기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엘라는 오히려 반색을 했다.
“어머! 그럼 혹시 오빠도 저런 거 가지고 있어요?”
“뭐? 이 쇠공 같은 거 말이야?”
“네, 운석 말이에요.”
“당연히 가지고 있지. 그런데 그걸 어디에다 뒀더라?”
막상 운석 얘기가 나오자 어디에다 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분명히 어떤 종이상자에다 던져 놓은 것만 생각났다.
“찾는 것은 제가 할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나한테 운석을 선물로 줘요.”
“그걸 왜 선물로 받고 싶은 건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 아니야?”
대한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자신이 알기로 운석은 피코셀을 담는 용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혹시 선물 주기 싫어서 그래요?”
“아, 아니야.”
엘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대한은 뜨끔했다.
솔직히 그깟 운석쪼가리가 뭐라고 안주겠는가!
우주로 나가면 그것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훨씬 멋있고 근사한 놈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아니라고요?”
“아니, 내 말은 선물로 주겠다는 뜻이야. 아폴로도 준 걸 내가 못 줄 리 없잖아.”
대한은 말을 하면서 슬쩍 아폴로를 노려봤다.
순간적으로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자.
아폴로는 흠칫 놀라더니 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도 지은 죄가 뭔지 아는 모양이었다.
“그럼 약속한 거예요?”
“그, 그래.”
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엘라는 순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겨 왔다.
향긋한 체향과 함께 부드러운 여체가 느껴졌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붙잡더니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어휴! 안 준다고 했으면 큰일 날뻔했네. 아니 그딴 운석쪼가리가 뭐라고 이렇게 좋아하냐?’
대한은 엘라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애초에 불가사의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든 그녀가 좋아하자 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반대로 대한의 품에 안긴 엘라를 훔쳐보는 아폴로의 마음은 찢어지다 못해 그만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도 엘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폴로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이미 눈치챘다.
만나자마자 계속 얼굴을 힐끔거리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여자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미리 벽을 쳐두지 않으면.
아마 스스로 만든 희망고문에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엘라는 조용히 속으로 에바를 불렀다.
‘에바!’
―말씀하세요.
‘마스터가 허락했으니 에바를 담았던 강화 케이스를 찾아봐!’
―찾을 것도 없어요. 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럼 이따가 나한테 가져와!’
―네.
평소와는 달리 둘이 대화를 할 땐 에바는 엘라에게 항상 존댓말을 썼다.
그만큼 철저하게 위계질서를 지킨다는 의미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조직(?)의 넘버 투(2)는 엘라였으니까.
“아폴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요. 좀 쉬었다가 다시 시합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폴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공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 스포츠 매니지먼트로 들어올래요?”
“계약 기간이 좀 남아서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요.”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아폴로는 그냥 자신의 의사만 밝혀줘요.”
“뭐 엘라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당연히 저야 좋죠.”
“알겠어요. 그럼 현재 계약한 매니지먼트 회사와 컨택해서 이적을 추진할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엘라의 적극적인 스카우트 제의에 아폴로는 금세 표정이 풀렸다.
대한은 그녀의 행동을 말릴까말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뭔가 뇌리를 스치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사실 아폴로 만큼 쓸만한 샌드백(?)을 구하기는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폴로는 대한이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흠칫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뭔가 위험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대한은 아직 다 잡은 물고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바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난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창문 밖으로 돌렸다.
밤이라 템스강의 강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강변을 따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가로등의 불빛이 참 보기 좋았다.
‘저 밝은 불빛 아래에서 아폴로와 대련을 하면 참 재미있겠다.’
대한은 일부러 떠오르는 생각을 끊었다.
이어지는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줴패면’이라는 뒷말을 조용히 삼킨 채 그는 기대 가득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참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을 뒤로하고 대한은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을 나섰다.
“대한! 해트트릭 축하해!”
“오늘도 정말 끝내줬어.”
“맨유 놈들! 퍼져서 아예 일어날 생각을 못 하네. 크크크!”
“저녁에 파티 가는데 같이 가자.”
대한을 중심으로 동료 선수들이 한마디씩 떠들어댔다.
그는 시종일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굳이 잘난 체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알아서 다들 띄워주니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이었다.
쏴아아아!
대한은 샤워실로 들어갔다.
쉰 냄새가 풀풀 나는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전신을 맡겼다.
몸이 실타래처럼 풀어지듯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샴푸와 린스로 머리를 감았다.
바디워시로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마른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밖으로 나왔다.
라커를 열고 협찬받은 유명 브랜드의 캐주얼 복을 꺼내 입었다.
그러자 벽에 붙어있는 전신거울을 통해 환하게 미소를 짓는 잘생긴 한 미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거울 속의 녀석을 향해 씨익 미소를 한번 지어줬다.
“마스터!”
“에바!”
밖으로 나오자 에바가 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에바의 어깨를 한번 툭 치며 그는 방탄차에 올라탔다.
부릉 부릉!
거대한 방탄 SUV는 벌써부터 달리고 싶은지 크게 포효하고 있었다.
막상 차에 타니 반가운 손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
“어!”
낯익은 몸매의 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챙 넓은 모자의 망사를 한쪽으로 걷어냈다.
얼굴이 드러나자 대한의 입꼬리가 위로 끌려 올라갔다.
역시 생각대로 그녀는 모니카였다.
“대한!”
“모니카!”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격하게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만난 두 남녀!
진한 프렌치 키스와 함께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회포를 풀었다.
그녀는 이미 몸이 후끈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대한은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모니카를 상대하며 물었다.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응, 대한은 아니야?”
“당연히 나도 많이 보고 싶었지.”
“다행이네. 헤헤!”
모니카는 대한의 대답에 만족한 듯 바로 헤실거렸다.
그녀는 정말 그에게만큼은 참 쉬운 여자였다.
만약 모니카의 지인들이 그녀의 이런 행동을 봤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다들 놀라서 까무러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