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이대한 회장>
지이이잉!
체스터 포트의 거대한 성문이 활짝 열렸다.
부웅 부웅 부우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최고급 승용차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리무진 버스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가하고 평화롭던 체스터 포트!
갑작스러운 손님들의 방문으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결코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코레그룹 전략기획실에서 철저하게 준비한 비밀행사였다.
“와! 대단하네.”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체스터 포트구나.”
삼십 대 후반과 사십 대 초반의 남자.
깨끗한 정장을 잘 차려입은 그들은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여긴 그냥 성이네요. 축구선수가 사는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이걸 보면 이대한 선수가 정말 코레그룹의 대주주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주위를 돌아봤다.
놀라고 있는 이들은 비단 그들만은 아니었다.
다들 체스터 포트의 위용에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체스터 포트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1층 로비를 뒤흔드는 청아한 목소리.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에바였다.
그녀는 깔끔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채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누군지 알아봤다.
이미 코레그룹의 그룹 홍보이사로 정식 발령이 난 상태라 모를 수가 없었다.
“먼저 각자 방을 배정해드리겠습니다. 일정은 그룹 메신저를 통해 보내놨으니 참고하세요.”
우르르!
에바의 말이 끝나자 사방의 문이 활짝 열리며 메이드들이 몰려나왔다.
영화나 야동에서 나오는 야한 메이드복을 입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글래머 미녀들이 메이드복을 입고 나오자 절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 박상진 2팀장 님이시죠?”
“네? 아! 네. 맞습니다.”
이번에 전략기획실로 승진 발령된 박상진 팀장.
금발의 푸른 눈의 메이드가 유창한 한국말로 물어오자 깜짝 놀라 버벅거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네.”
박상진는 다급히 여행용 가방을 끌고 메이드를 따라갔다.
그런데 경쾌한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엉덩이가 너무나도 육감적이었다.
“크큼.”
그는 급히 시선을 옆으로 돌려 그녀의 뒤태를 외면했다.
그래도 메이드가 어디로 가든 잘만 쫓아갔다.
“구조조정본부 인수합병팀 신창용 팀장님!”
“네에?”
“별관으로 모실게요.”
“아! 예.”
신창용 팀장은 금발의 메이드가 다가와 살갑게 웃자 얼굴을 붉혔다.
그는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쫓아가듯 그렇게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비슷한 일들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곳의 메이드는 모두 한국어가 아주 능숙했다.
거기에다 자신이 맡은 손님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체스터 포트의 수준이 어떤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코레그룹 계열사 사장단은 저를 따라오세요.”
“전략기획본부와 구조조정본부의 본부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르르!
에바의 한 마디에 초로의 사내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런 그들에게 메이드들이 몰려와 각각 여행용 가방을 넘겨받았다.
대신 최고급 태블릿을 하나씩 손에 쥐여줬다.
걸어가면서 손으로 터치를 하자 코레그룹의 전체 조직도가 나타났다.
다시 만지작거리자 코레그룹 계열사 사장단의 사진이 떴다.
자신의 얼굴이 나오자 다들 호기심이 생겨 한 번씩 클릭해봤다.
사진이 확대되면서 자세한 신상명세서가 주르륵 떨어졌다.
그 모습에 놀란 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잠시 멈춰주세요!”
에바가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다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코렙그룹의 법무팀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전부 대외비입니다. 회의실에는 비밀유지계약서에 서명하신 분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아!”
놀람과 궁금증, 호기심이 뒤섞인 탄성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럼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에바는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질문이 있으신가 보네요. 말씀하세요.”
“만약 비밀유지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먼저 본인이 누군지 여러분께 소개부터 하시죠!”
“네, 전 이번에 코레엔터 사장을 맡게 된 최성모입니다.”
사십 대 초반의 젊고 잘생긴 최성모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로터리시네마의 경영본부장이었던 그는 이번에 전격적으로 코레엔터 사장을 승진 발령된 유능한 차세대 경영인이었다.
확실히 엔터 쪽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생각이 유연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났다.
“그럼 최성모 코레엔터 사장의 질문에 답변하겠습니다.”
최성모에게 쏠렸던 시선이 일거에 다시 에바에게 몰렸다.
“비밀유지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현재 직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룹의 미래에 참여하는 회의와 모임에는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음.”
다들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까 편하게 잘 생각하세요.”
에바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문이 열리자 곧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들어갔다.
말이 강요가 아니지, 만약 비밀유지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당장 코레그룹 안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배제될 게 분명했다.
그걸 깨달은 사장단은 망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최성모 코레엔터 신임사장도 기꺼이 이 대열에 참여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에바의 말대로였다.
코레그룹 법무팀 수십 명이 그들을 한 사람씩 맡았다.
그리곤 비밀유지계약서에 관해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곧 전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안에는 이미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레그룹의 핵심 회사인 코레디펜스 오세종 사장을 시작으로.
코레투자 김보고, 코레시스템 고승천, 코레테크 전영실, 코레정밀 이창호, 코레에너지 서희, 코레메디컬 허준, 코레재단 양채호 등
코레그룹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거물들이 앉아있었다.
코레그룹의 같은 사장이라도 엄연히 위치와 등급이 달랐다.
특히 코레그룹에 전격 인수합병된 로터리 그룹과 한양그룹 출신의 사장들은 감히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번에 대한TV 채널의 사장이 된 유아영과 부사장으로 올라선 조동혁은 예외였다.
“다들 각자 이름이 적혀있는 좌석에 앉으세요.”
에바는 말을 하면서 상석으로 보이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말에 다들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좌석을 찾아 앉았다.
쿵!
조용히 문이 닫혔다.
코레그룹의 기존 및 신규 사장단 그리고 본부장들이 모두 회의실에 들어온 것이다.
그로 인해 잠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침묵이 일어났다.
그들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서로 눈치를 봤다.
그제야 거대한 회의실의 고풍스럽고 화려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중세의 대전(大殿) 같은 분위기가 나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서로 눈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구경하는 사이!
소리 없이 안쪽의 문이 활짝 열렸다.
회의실에 앉아있던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그들은 놀랄 틈도 없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레디펜스의 오세종 사장을 필두로 상석에 앉아있던 사장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90도로 숙였기 때문이다.
“회장님을 뵙습니다.”
거기에다 마치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그들의 입에서 똑같이 회장님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헉, 이대한 선수?”
“이대한 선수가 왜?”
“설마 이대한 선수가 코레그룹의 회장님?”
다들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이대한입니다.”
대한의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제야 이들은 이대한이 코레그룹의 회장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무도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다들 속으론 경악해 마지않았다.
세상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씹어 먹는 축구선수가 코레그룹의 회장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난리가 날 것이다.
“다들 고개 들고 자리에 앉으세요.”
“네, 회장님.”
모두 대한의 말대로 고개를 들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기존의 사장단은 이미 이대한이 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빨리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괜히 축구선수라고 무시했다간.
어렵게 얻은 이 황금 같은 기회가 바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빠르게 태세전환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레엔터의 신임사장 최성모 같은 이는 쉽게 충격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까지 떡 벌어진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다들 놀라셨죠?”
“네.”
“아닙니다.”
대한은 대답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놀라는 게 당연하다.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분명히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봐줄 수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정색하면서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놀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코레그룹의 전략회의이자 그룹 사장단 회의이니 바로 절차를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대한의 일방적인 말에 아무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오세종 코레디펜스 사장이 일어났다.
사장이라고 다 같은 사장이 아니다.
말이 사장이지 그는 회장이나 다름없었다.
코레디펜스의 자회사만 12개에다 손자회사까지 합치면 수십 개도 넘는다.
그러니 그 어떤 사장보다 오세종의 발언은 무게가 있었다.
그는 대한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로터리 그룹과 한양그룹은 완전하게 코레그룹에 인수·합병 및 통합됐습니다.”
“조직도를 보면서 하죠!”
“네, 회장님.”
오세종은 다시 한번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사방의 벽이 열리더니 거대한 LED TV가 보였다.
곧 전원이 들어오고 코레그룹의 조직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코레그룹의 지주회사 코레(Coré) 아래로 한양그룹의 지주회사 한양칼과 로터리그룹 지주회사 로터리지주를 두기로 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회의가 시작되자.
다들 정신을 집중하고 오세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 코레그룹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략회의라는 것을 직감했다.
대한이 괜히 이들을 코레그룹 계열사의 사장으로 뽑은 것이 아니다.
에바를 통해 철저하게 사전검증을 거쳤다.
능력은 물론이고 사생활과 도덕성 및 충성도까지 꿈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 테스트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뽑힌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물론 대한은 코레그룹과 계열사의 사장단과 임원들을 모두 안드로이드로 뽑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대한이 생각하는 진정한 그룹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안드로이드가 뛰어나도 그건 계산일 뿐.
기업을 운영하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인간의 번뜩이는 기지와 창조력은 절대 기계가 쫓아올 수 없는 영역이다.
“코레디펜스 사장 유임, 최근 로터리캐피털을 합병한 코레투자 김보고 사장 유임, 로터리 대홍기획과 로터리 정보통신기술 및 로터리닷컴 등을 합병해 몸집을 키운 코레시스템 고승천 사장 유임, 코레테크 전영실 사장 유임, 로터리정밀화학 분리 후 정밀 분야 합병한 코레정밀 이창호 사장 유임, 로터리케미컬과 로터리정밀화학 분리 후 화학 분야를 합병한 코레에너지 서희 사장 유임, 코레메디컬 허준 사장 유임, 코레재단 양채호 사장 유임…….”
오세종 사장이 말을 할 때마다 다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산총액 기준 재계 5위의 로터리 그룹과 13위의 한양그룹이 어떻게 인수·합병되고 통합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새롭게 코레그룹에 합류한 명단입니다.”
“계속하세요.”
오세종은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먼저 정리한 기업부터 말하겠습니다. 한양그룹에선 한양정석기업 해체, ㈜한양 분리 후 해체, 한양진에어 매각…….”
다들 티는 안 내고 있었지만.
한양그룹 출신 사장들은 속이 쓰렸다.
피 같은 한양그룹의 계열사들이 사정없이 해체되고, 분리해 매각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