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천사 프로그램>
우주탐사선 히릭스 보조 격납고.
거대한 공간에 빈틈없이 빽빽하게 캡슐이 놓여있다.
타원형의 몸체는 메탈실버 빛깔로 자체 발광하는 모습.
하지만 위쪽의 덮개만은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금속으로 되어있다.
지이잉!
격납고의 천장이 원형으로 열리고.
위에서 아래로 투명한 원판이 내려왔다.
원판의 위에는 젤리 같은 반투명한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는 대한과 엘라, 그리고 에바가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판은 내려오다가 서서히 속도를 죽였다.
그리곤 격납고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중앙 허공의 한점에 멈춰 섰다.
“천사 프로그램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에바의 빠른 대답에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정확히 1,004개의 캡슐!
안에는 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두 잠이라도 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정확히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럼 저들에겐 며칠이 지난 거야?”
뻔히 알고 있는 질문을 했다.
에바도 뻔히 알고 있는 대답을 다시 해줬다.
“저들이 있는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200일이 지난 상태입니다.”
“1,000일이니까 닷새면 끝나겠군.”
“네, 훈련 프로그램이 3년을 넘지 않도록 만들어놨습니다.”
엘라는 둘의 대화를 듣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이 프로그램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그녀다.
캡슐에 들어간 이들은 하루에 200일 분량의 압축된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당연히 단순한 교육과 훈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도 없이 암시를 반복하고 철저한 정신교육을 통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배양하는, 세뇌에 가까운 무서운 인간개조 프로그램이었다.
비록 가상현실 캡슐을 통해 시간을 빠르게 돌려 사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반복되는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뇌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뇌세포가 어느 정도 파괴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부작용이 심하면 녹아내리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인명 경시 사상이 있는 스파이럴 제국에서조차 이걸 불법으로 정해 일체 사용을 금지했겠는가!
하지만 대한과 에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프로그램을 부활시켰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을 개조하려면!
그에 맞는 강하고 독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물론 대비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004명의 훈련생(?) 모두에게 미리 나노셀을 투여해놓았다.
혹시라도 뇌가 녹는 불상사가 생기면 나노셀을 통해 재생시키려는 것이다.
‘말렸어야 했는데.’
엘라는 속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자기 생각을 철회했다.
만약 말렸다면 아마 이들 전부는 예외 없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대한의 분노는 자신이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피붙이에 관한 정이 그토록 크고 집요할지 몰랐다.
만약 에바가 적기에 끼어들어 ‘이들을 활용해서 적대세력을 일소하자.’라는 아이디어를 내어놓지 않았다면.
아마 이들은 죽는 날까지 지옥 같은 삶 속에서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겨 나갔을 것이다.
“아키라!”
그때 대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라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한의 시선을 쫓아 그가 바라보고 있는 캡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많은 캡슐 중에서, 대한은 용케도 아키라가 누워있는 캡슐을 발견했다.
그만큼 놈을 향한 분노가 크다는 방증이었다.
“마스터, 쓸데없이 힘 빼지 마세요.”
“으음.”
에바의 말에 대한은 살짝 눈을 감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살기를 다스리려면.
역시 배틀푸르나(SSS) 보다 좋은 게 없다.
의지가 일자 마력이 동했다.
진자운동이 시작되자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시원해졌다.
다시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바가 말을 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어차피 저들은 이제 마스터의 수족입니다.”
“알고 있어.”
“과거야 어쨌든, 이들과 함께 마스터와 가족, 그리고 코레그룹을 적대하는 모든 단체와 세력에 맞서야 합니다.”
에바의 말에 대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100% 맞는 말이다.
세뇌에다 나노셀!
그것도 모자라 뇌 속에 심은 생체폭탄까지.
저들은 절대 대한을 배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 배신하게 되면.
저들의 가족은 처절한 보복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세뇌나 나노셀 그리고 생체폭탄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대한에 충성하는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배신의 반대는 충성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배신하지 않고, 마스터에게 충성하면 가족들은 그의 보호를 받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암시와 세뇌의 근간이 되고 있었다.
물론 사사로이 가족과 만나거나 연락하는 것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어떤 놈부터 응징할지 계획은 세워놨지?”
“물론이죠. 마스터를 가장 많이 음해하고, 부모님을 가장 귀찮게 하고 괴롭혔던 사람과 단체 및 국가를 최우선 응징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게 어딘데?”
“국가부터 말하자면 첫째가 일본, 둘째가 중국입니다.”
“너무 당연한 결과라서 솔직히 놀랍지도 않군.”
정말 당연히 그럴 거로 생각했던 결과라서 별 감응이 없었다.
그만큼 일본과 중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세 번째는 미국, 네 번째는 유럽연합(EU)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연합에 속한 국가들이죠.”
“유럽연합이라고? 러시아가 아니라?”
“좀 의외의 결과인가 보네요.”
“아니야.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지정학적 위치나 현재 국제사회의 역학구조를 보면 한반도의 통일과 대한민국의 약진은 러시아에 결코 해가 되는 일은 아니야. 오히려 도움이 됐으면 도움이 됐지.”
둘의 대화 중에 엘라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개인은 모르지만, 모든 나라를 전부 응징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어요. 차라리 몇 곳만 뽑아서 집중적으로 본때를 보여주는 게 좋겠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확실히 그런 방법이 더 효과적입니다.”
엘라의 말에 에바가 바로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대한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득이 뭐고 실이 뭔데? 부모님과 너희들만 무사하다면 나한테는 저들이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없어.”
“그렇게 막 나갈 일이 아니에요. 마스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누구?”
“모니카, 고리나, 류연, 한새롬, 나나!”
“마스터의 팬들도 있네요. 그들이 속한 나라가 곧 마스터가 보복하려는 나라입니다.”
“음.”
엘라와 에바는 은근히 연합작전을 펼쳤다.
듣고 보니 전혀 일리 없는 말은 아니었다.
모니카, 고리나, 류연, 한새롬, 나나!
전부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들이다.
그리고 팬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과 지지는 사실 그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도 막 나갈 생각은 없었다.
다만 독하게 일을 처리할 생각에 좀 강한 톤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걸 보고 엘라와 에바가 좀 걱정을 한 모양이다.
“어쨌든 첫 번째 대상은 일본이지?”
“그렇습니다. 천사 프로그램이 끝나면 저들 모두 자국으로 돌려보내 곧바로 응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개인과 단체는 빼놓지 않고 처리할 겁니다. 다만 국가는 일본, 중국, 미국, 유럽연합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일벌백계의 교훈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오빠, 그런데 영국 안 가요?”
엘라의 갑작스러운 말에 대한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어휴!”
솔직히 영국에 가서 공을 차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누구보다 어머니가 자신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세계를 좌지우지할 힘과 재력이 있는 대한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효도는 물질로만 해결할 수 없었다.
“가실 거죠?”
“가긴 가야지. 아니다. 당장 떠나자.”
엘라의 재촉에 대한은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어차피 코레그룹의 홍보이사로 발령했으니까, 앞으로 대외적인 일은 전부 에바가 알아서 하도록 해.”
“네, 마스터.”
대한은 그렇게 에바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그가 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에바가 알아서 했다.
이번에도 문제없이 잘 해결할 것이다.
슝!
우주탐사선 히릭스에서 우주셔틀 하나가 빠져나왔다.
한반도를 목표로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투명한 비행체.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포천의 별장 상공에 도착했다.
별장 옥상에 내린 대한은 지나가는 투로 슬쩍 말했다.
“부모님에게 인사나 하고 가자.”
“네.”
대한의 말에 엘라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네?”
“같이 안 가?”
“저도요?”
“그럼 언제까지 인사도 안 드리고 있을 생각이었어?”
“자, 잠깐만요.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엘라의 당황한 모습에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음의 준비가 어딨어? 그냥 가서 얼굴만 보여드리면 되지.”
“복장도 그렇고 화장도 전혀 안 했잖아요.”
“무슨 소리야? 화장을 왜 해? 생얼이 훨씬 더 예쁘고 좋은데.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도 꽤 괜찮아.”
대한은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엘라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물러났다.
“오빠! 한 번만 봐줘요.”
“이게 봐주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잖아.”
“그래도.”
엘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큰 부담을 느꼈다.
대한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의 부모님을 만나는 것은 좀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두 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대한은 막무가내였다.
“영국에 가서 같이 지내려면 지금 얼굴을 보여드리는 게 좋아.”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마! 엘라가 한국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유창하게 잘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정말 많이 노력한 줄 알고 아마 크게 좋아하실 거야.”
“진짜죠?”
“응, 확실해.”
솔직히 대한은 잘 몰랐다.
그래도 그녀 앞에선 확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어머니는 엘라를 예뻐하실 것이다.
예전부터 누굴 데려와도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라면 ‘오케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한동안 실랑이를 한 끝에!
결국, 두 사람은 같이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다.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엘라!
그녀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푸하하하!”
대한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에휴!”
그걸 본 엘라는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옆에서 에바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걸 반기기라도 하듯 창공을 가르는 전용기의 창문엔 하얀 구름 송이가 몽실거렸다.
“세상에! 그렇게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엘라의 모습은 처음 봤어.”
“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상황이 되면 떨렸을 거예요.”
“그건 엘라의 말이 맞아요.”
대한의 놀림에 엘라와 에바가 합동으로 맞섰다.
하지만 그는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엘라를 좀 놀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이리 와!”
대한은 두 팔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새처럼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라!
여자가 자존심도 없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품에 냉큼 안겼다.
소파는 그녀가 다가오자 자동으로 더 넓고 커졌다.
쪽!
둘은 에바의 앞에서 서로 입을 맞췄다.
엘라와 분리된 에바는 전처럼 질투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감정적인 부분이 무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한도 더는 에바가 옆에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았다.
미안한 감정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게 참 신기했다.
“좋아!”
“네.”
“뭐가 좋아.”
“그냥 다 좋아요.”
“그중에서 뭐가 제일 좋아.”
“이렇게 직접 오빠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나도 좋아.”
둘의 대화는 참 유치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대한과 엘라는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꼭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한참 동안 설왕설래를 하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떨어졌다.
“일본의 반응은 어때?”
뜬금없이 묻는 대한의 질문.
개떡 같은 질문을 에바는 찰떡처럼 알아먹고 답했다.
“여전히 아키라는 이번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상태입니다.”
“반전을 일으킬 준비는 다 됐지?”
“물론이죠. 지금 시작할까요?”
“응. 그렇게 해. 하지만 너무 서두르진 마!”
“왜요?”
“사전포석을 잘해놔야 아키라가 나올 때쯤 뒤집을 수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럼 천사 프로그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빵’ 터트릴 수 있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케이.”
대한은 에바의 말에 흔쾌히 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