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죽음보단 삶>
“칙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다카이 이등육좌(2等陸佐: 중령)는 대놓고 분통을 터트렸다.
“벌써 빠져나간 게 아닐까요?”
하지만 그의 기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관인 마사키 이등육위(2等陸尉: 중위)는 자기의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다카이는 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에 얼굴을 한번 때려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위쪽에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알잖아. 아키라는 반드시 우리가 잡아야 해.”
“아키라가 테러범이라는 말을 솔직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특수작전군의 전설이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어떻게 테러범이 우리의 전설이 돼?”
마사키의 위험한 발언에 다카이가 입에서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정말 친척만 아니었다면 당장 어디론가 보내버렸을 것이다.
그때 병사 하나가 급하게 다가와 쪽지를 건넸다.
마사키는 쪽지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카이에게 넘겼다.
다카이는 쪽지를 읽자마자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언제 여길 빠져나가서 나고야시까지 간 거야?”
“제가 그랬죠. 이미 빠져나간 것 같다고.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며칠 동안 여기 산속에서 오돌오돌 떨면서 삽질을 했습니다.”
“젠장.”
“아무래도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왜?”
“느낌이 안 좋아서요. 전역한 선배들도 하나 같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 많다고요. 아키라는 정부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던 사람이에요. 괜히 나중에 독박 쓰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에이. 참!”
마사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다카이는 잠시 고민하다 상부에 그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더는 특수작전군을 동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연히 욕을 한 바가지나 얻어먹었다.
하지만 아키라가 이미 산을 빠져나가 도시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놈을 잡으려고 자위대를 나고야시 안으로 투입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했다.
결국, 육상자위대 특수작전군은 그렇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돌아갔다.
그러나 그게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사실을 둘은 나중에 알게 되어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 * *
“허억 허억!”
아키라는 오늘도 변함없이 달렸다.
산을 타고 다니더니 이제는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그는 어느새 살이 쪽 빠져 해골처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뱃살까지 덩달아 빠졌다는 점이다.
덕분에 슬슬 전성기 때의 감각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웬걸!
“우웨엑!”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몸은 더 견디지 못하고 다 토하고 말았다.
아침에 식당에서 먹은 게 몽땅 넘어왔다.
강한 산성의 위액이 코를 톡 쏘는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이상하게 그걸 보자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났다.
그만큼 생존본능이 앞선 상태였다.
“젠장! 이제 좀 적당히 하자고.”
아키라는 손등으로 입을 닦고 허공을 노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악을 쓰고 욕을 해봐도 무슨 반응이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건데 어쩐지 그는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가는 곳마다 경찰에게 걸릴 이유가 없지. 도대체 누굴까? 어떤 새끼가 날 이렇게 엿을 먹이는 걸까?’
그는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입을 헹궜다.
그리고는 남은 물을 몽땅 마셔버리고 거칠게 골목 안으로 던져 버렸다.
지금 그는 나고야시를 빠져나와 오사카시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변장한 자신을 귀신처럼 찾아서 쫓아왔다.
조금만 움직이는 것을 멈추거나 방심하면 바로 경찰의 포위망에 갇혀버리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저벅저벅!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아키라는 골목길을 걸어갔다.
큰길을 걷는 것은 위험했다.
일본 전역에 지명수배된 그는 이미 테러범이 되어있었다.
매일 뉴스와 방송에 아키라의 얼굴과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저걸 본 모모에와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이 눈 앞을 가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그제야 아키라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조센징을 전부 열도에서 몰아낸다고 일본이 잘 사는 나라가 될까?’
스스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혐한에 앞장서고 조센징을 괴롭혀왔다.
아니 단순히 입으로만 한 게 아니었다.
응징이라는 미명 아래 실질적으로 폭력을 가열차게 행사해왔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가리지 않았다.
그저 조센징이라면, 조센징이 운영하는 가게라면 어김없이 찾아가 괴롭히고 깽판을 쳤다.
때론 일본을 욕하는 얼가니들을 직접 처단하거나 묻어버렸다.
반도 출신 호스티스를 납치해 섬에 팔아버린 적도 있었다.
독일처럼 패전국으로써 제대로 반성하고 이웃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신문기자를 기습해 팔다리를 부러뜨린 적도 몇 번이나 됐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테러범이라고 하는 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그것으로 밥을 먹었다.
이런 더러운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이 열도와 대화족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신념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충성하고 열심을 냈던 일본은 이미 자신을 버렸다.
오히려 어수선한 정국을 테러범 추격전이라는 이슈를 통해 슬쩍 덮어버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키라가 죽든 말든 전혀 상관치 않았다.
‘이게 나라냐! 이렇게 누명을 씌우는 게 그동안 내가 충성한 것에 대한 보답이냐?’
아키라는 최근 들어 바뀌고 있는 자기 생각을 경계했다.
하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신념은 걷잡을 수 없었다.
둑에 금이 간 것처럼.
물이 새어 나오고 급기야는 제방이 무너져 홍수가 나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 죽는다면 아마 가족은 무사할 것이다.
그 누구도 피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 죽자. 죽어버리자.’
아키라는 솔직히 지쳤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렇게 도망 다녀야 한단 말인가?
이러려면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다.
한번이 어렵지, 극단적인 생각을 하자 연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는 오사카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요도강을 바라봤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요도가와구(淀川区)에 있는 조소오다리(十三大橋) 위였다.
“칙쇼!”
아키라는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신발을 벗고 난간을 넘어갔다.
곧장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띵동!
그때 그의 휴대폰에서 마침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분명히 추적을 염려해 꺼놨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냥 무시하고 뛰어버릴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메시지 알림음이 사랑하는 딸, 하루코였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하루코의 삼단 같은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새침한 쥰페이를 안고 마구 볼을 비비고 싶었다.
아키라는 잠시 죽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대신 얼른 휴대폰을 꺼내 살폈다.
―아빠! 정말 테러범이야?
그는 하루코가 보낸 문자에 기겁했다.
아키라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당장 난간을 건너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고. 난 반드시 살아남는다. 절대 안 죽고 네놈들이 한 짓을 전부 까발리고 말 테다.”
휘잉!
그의 몸으로 세찬 강바람이 불어왔다.
아키라는 요도강을 향해 그렇게 힘차게 소리쳤다.
너무 이를 세게 물어 이빨이 깨질 것만 같았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말이야?”
“헉! 누, 누구?”
아키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까지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차를 세워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 건장한 청년 한 명이 자신 앞에 나타났다.
정말 귀신이 곡할 것 같은 등장이었다.
“아키라! 네가 한 말 정말이냐고.”
“누구십니까?”
“내가 누구인지가 궁금해? 아니면 가족들이 네가 테러범이라고 믿는 게 더 중요해?”
“그, 그건.”
아키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동안 네가 저지른 짓! 후회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맞아. 아니 맞아요.”
그는 왠지 청년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상하긴 했지만, 상대는 너무나 당연하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마치 오랫동안 사람을 부리고 다스려왔던 사람 같았다.
“네가 진심으로 참회를 한다면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누구시죠?”
“널 살릴 수도 죽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아!”
그제야 아키라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가 바로 이자라는 것을.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두려움과 경외심이 먼저 일었다.
물론 화를 낸다고 이자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드러내고 있진 않았지만, 아키라는 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
자신 같은 자가 100명이 와도 이 청년 하나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때 널 죽이는 대신 기회를 한번 주려고 하는데.”
“나를 어쩌려고 그러시죠?”
“최소한 네 가족에게 테러범으로 기억되지 않게 만들어줄 수 있어.”
“으음.”
이건 정말 중요했다.
아키라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대로 테러범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지금까지 네가 한 짓을 반대로 하면 될 것 같아. 물론 쏟아진 물을 주워 담으려고 노력도 많이 해야겠지.”
선문답 같은 청년의 말에 그는 잠시 고민했다.
“당신을 따르면 됩니까?”
“맞아. 그게 제일 정답이겠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원하는 제국의 부활은 어쩌려고 그래?”
“흥, 제국은 무슨! 옹졸한 일본은 틀렸어요. 나 하나도 포용 못 하는 놈의 나라가 무슨 제국을 부활시킨다고.”
아키라의 말은 청년에게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이제는 정면으로 일본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변한 이유는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었다.
필요할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이제 필요 없어지니 바로 버리려고 했다.
단순히 토사구팽도 아니다.
엉뚱하게 테러범이라는 누명까지 씌워서 사회적으로 생매장을 해버렸다.
“한 가지만 약속하면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그게 뭡니까?”
“지금까지 네가 믿고 따르던 것들은 다 버려! 그리고 앞으로는 오직 나를 위해 충성해라! 그럼 너와 네 가족의 앞날은 보장해주마.”
“난 어떻게 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 가족만큼은 건들지 말아주세요.”
“호오! 그래도 가족 귀한 것은 알고 있으니 완전 쓰레기는 아니네.”
“감사합니다. 허억!”
사실 청년은 칭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분노의 눈빛으로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꿀꺽!
아키라는 순간 침을 꿀떡 삼켰다.
몸이 절로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마치 사자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밀어 넣은 것 같은 기분!
그렇다. 이건 포식자의 강한 살기였다.
그것도 전혀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가공할 살기!
“그걸 잘 아는 놈이 남의 가정을 그렇게 박살을 내?”
“죄, 죄송합니다.”
아키라는 순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당장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이 거대한 살기에 잡아먹힐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회개와 충성은 곧 한 가지다. 그렇게 하겠어?”
“네, 하겠습니다. 절 중용해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하지만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테러범의 누명은 벗고 싶습니다.”
“흥, 그거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오히려 넌 너를 테러범으로 몬 놈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게 될 테니까.”
“아!”
아키라는 감탄사를 발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살기는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의 앞에는 존재감이 절절 흐르는 한 명의 거인이 서 있었다.
아키라는 괜히 가슴이 떨려왔다.
이제야말로 평생 모셔야 할 진정한 주군을 만난 기분이었다.
비록 좋은 일로 만난 게 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됐다.
털썩!
그 생각을 끝으로 아키라는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잃은 것이다.
청년!
아니 대한은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이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자보다 더 나쁜 놈들이 바로 뒤에서 부추긴 놈들이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수없이 많은 사람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놈들!
그들이야말로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자신의 여동생의 진정한 원수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한은 바로 그 원흉들을 뿌리째 뽑으려 하고 있었다.
부우웅 끼익!
대한의 옆으로 고급승용차가 줄줄이 멈춰 섰다.
그는 아키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에 올라탔다.
뒤늦게 다른 차에서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나와 아키라를 안고 갔다.
“돌아가자!”
“네, 마스터.”
부웅 부웅 부우웅!
대한의 한 마디에 차들이 줄줄이 다리를 건넜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다리는 건넜어.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대한은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손아귀에 쥔 모든 것을 터트려버릴 기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