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만재능(Feat. 대한 TV)-300화 (298/331)

300화 <도망자>

“여기 세워주세요.”

“네.”

끼익!

아키라는 더 들어가지 않고 길가에서 내렸다.

그는 택시비를 내고 등에 멘 배낭을 고쳐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아키라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걸어갔다.

거리는 100m도 되지 않았다.

골목을 돌자 바로 모모에의 친정집이 보였다.

두근두근!

그의 심장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더불어 아키라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조급하게, 불안하게 마음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건만.

가족의 안부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모모에! 쥰페이! 하루코!”

아키라는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마당에 커다란 나무가 심어진 베이지색 단층집.

크진 않지만 아담한 모양의 가옥이 정겹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정취를 느낄 새도 없이 서둘러 현관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모모에!”

대답이 없자 점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끼이익!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모모에!”

“오셨군요.”

“모모에! 무사했구나.”

아키라는 모모에를 보자마자 덥석 끌어안았다.

그녀의 멀쩡한 모습을 보자 절로 긴장감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아내를 안고 있자 뒤쪽에 서 있는 쥰페이와 하루코가 보였다.

다행히 둘 다 사지 멀쩡한 채 온전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아니 느낌이 싸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이라니!

거기에다 품에 안겨있는 모모에마저 마치 나무토막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강한 위화감에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모모에가 두 팔로 그를 가볍게 밀며 품에서 빠져나갔다.

아키라는 감히 모모에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쥰페이! 하루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목소리뿐이었다.

“아빠! 미워!”

“왜 왔어.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뭐? 뭐라고?”

아키라는 아이들의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모모에를 쳐다봤다.

해명을 해보라는 뜻으로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모모에는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작게 말했다.

“너희들은 방에 들어가 있어.”

신기하게도 쥰페이와 하루코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쿵!

신경질적으로 방문이 닫혔다.

모모에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거실에 있는 소파로 그를 안내했다.

그렇다. 남편인 아키라를 안내하고 있었다.

마치 남처럼 말이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그걸 몰라서 물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줘야지.”

아키라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모모에는 조금도 떨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네, 있었어요.”

모모에의 대답에 아키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

“그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에요.”

“뭐라고?”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그의 눈에 의문부호만 점점 켜져 갔다.

툭!

그때, 마치 준비라도 해놓은 듯.

모모에가 누런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이건 뭐야?”

“보면 알아요.”

조심스럽게 질문했지만 반응은 여전히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아키라는 떨리는 손길로 봉투를 집었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으로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봉투 안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헉!”

아키라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봉투 안에 든 것은 발가벗은 남녀의 사진이었다.

그들은 보기에도 참 낯뜨거운 민망한 자세로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남자는 당연히 자신이었다.

상대는 비밀작전에 투입되어 마약으로 포섭한 고급요정의 호스티스였다.

게다가 같이 동봉된 극비서류엔 그동안 아키라가 저지른 온갖 더러운 작전과 공작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걸 어떻게?”

비록 몇 년이 지나긴 했지만.

이건 극비에 해당하는 문건이었다.

그런데 이게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지다니.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쪽을 말하는 거예요? 사진이요? 아니면 서류요?”

“모모에! 오해야. 오해라고.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이 사진을 앞에 두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전부 작전의 일환이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정부에서 벌인 작전이란 말이야.”

아키라는 간담을 쏟는 심정으로 모모에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뒤였다.

아니 식다 못해 돌덩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차라리 평생 모르고 살게 해주지 그랬어요.”

“아!”

아키라는 급히 변명하려다가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모모에의 촉촉이 젖은 눈과 원망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

이것들이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현실을 바로 깨닫게 만들어 줬다.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절망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그의 가슴을 산산조각냈다.

“아이들도 봤어?”

“아니요. 아이들한테는 다른 게 날아왔어요.”

툭!

이번에는 하얀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안을 열어보자 누런 봉투와는 좀 달랐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키라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 자세하게 폭로하고 있었다.

“쥰페이와 하루코가 이걸 봤다는 말이야?”

“그래요.”

“으음.”

그는 비통한 신음을 흘렸다.

열도를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건만.

일본제국의 부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건만.

돌아온 것은 결국 아내와 아이들의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거기에다 토사구팽을 당할뻔한 일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당했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 모모에가 결정적인 얘길 했다.

“우리 이혼해요.”

“뭐?”

“이혼하자고요. 아이들은 내가 키울게요. 양육비는 주지 마세요. 그런 더러운 돈으로 쥰페이와 하루코를 키울 수는 없어요.”

“아!”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랬지만 앞으로는 안 돼요. 그리고 당신도 이젠 좀 사람이 되세요.”

쿵!

모모에의 높낮이가 없는 말에 아키라는 그만 심장이 주저앉았다.

이혼하자는 말도 놀라웠지만, 사람이 되라는 말보다 충격적이진 않았다.

“난, 난 그저.”

“변명하려고 들지 말아요. 이게 사실이라는 거 다 알아요. 그동안 당신이 비밀스럽게 움직였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007에 나오는 스파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살인마에다 온갖 더러운 짓은 도맡아 하셨더군요.”

“…….”

모모에의 담담한 존댓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아키라의 가슴에 꽂혔다.

그는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났다.

자신은 그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더러운 조센징 몇 명을 처단한 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이 땅을 좀먹는 재일거류민들에게 통렬한 일침을 가한 게 이렇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몸 팔아서 돈을 벌고 있는 반도의 여자 몇 명에게 열도 사나이의 기개를 보여준 게 그렇게 죽을 일인가?

할 말도 많고 변명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선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나오질 않았다.

삐용 삐용 삐용!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아키라의 휴대폰도 미친 듯이 울려댔다.

그는 모모에의 눈치를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다케시마!

―후지산!

―코드 블랙.

―토사구팽이야?

―아니, 넌 버려졌어. 제거 대상이야. 당장 피해!

―알려줘서 고마워!

―미안하다. 행운을 빈다.

뚝!

아키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급사태가 발생한 이상 멍하니 앉아서 잡힐 수는 없었다.

그는 모모에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참 순종적이고 착한 여자이자 아내였다.

“사랑해! 당신도 아이들도. 이것만은 내 진심이야.”

“흐윽!”

아키라의 말에 모모에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특히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 잊지 않기를 바랄게. 그동안 고마웠어.”

“아키라!”

“몸 건강하게 잘 살아.”

그 말을 끝으로 아키라는 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잡힐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다.

혹시라도 경찰에 붙잡히는 모습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일까 봐.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다다다다!

아키라는 큰길을 피해 골목길로 달려갔다.

사방에서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무래도 넓게 포위망이 펼쳐진 모양이다.

‘개새끼들! 그렇게 충성했건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버려지네.’

그는 이를 갈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경멸적인 시선이 떠올랐다.

가슴에서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당장은 도망치는 게 문제였다.

아무 데나 들어가서 변장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상황이 너무 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코드 블랙이라고 했다.

당연히 경찰만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자신을 제거하려고 히트맨도 보냈을 것이다.

끼익!

그때 그의 앞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빈 택시가 나타나 앞에 선 것이다.

아키라는 볼 것도 없이 무조건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홋카이도 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네.”

부아앙!

택시기사는 두말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신기하게도 택시는 그 많은 경찰차를 하나도 만나지 않고 잘도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는 돌연 의심이 치솟았다.

“그런데 아까 그 골목은 왜 가셨어요?”

“누가 돈을 주고 거기서 잠시 서 있으라고 했어요.”

“누가요?”

“고등학생인데 돈을 주길래 그러겠다고 했어요.”

“고등학생이요?”

“네. 그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 같았어요.”

누군가 고등학생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아키라는 왠지 적에게 도움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일단 자신부터 사는 게 중요했다.

지금 가고 있는 홋카이도 대학병원 근처의 안가까지만 가면.

얼마든지 변장과 위장을 해서 홋카이도를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부아앙!

택시기사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빠르게 도로를 질주했다.

홋카이도 대학병원 앞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내고 꾸벅 인사를 했다.

택시기사도 고개를 푹 숙이며 같이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는 몸을 돌려 골목길로 들어갔다.

시내에 이런 꼬불꼬불한 길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키라는 능숙한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허름한 집안으로 소리 없이 들어갔다.

아래층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2층 방은 비어있었다.

아키라는 화분 아래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방문으로 들어가 벽 한쪽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벽돌 한 장이 스르륵 앞으로 튀어나왔다.

덜컹!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줄을 당기자 뒤쪽에 있는 책장이 옆으로 돌아가며 틈이 생겼다.

장정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아키라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다.

세련된 정장과 구두.

비싼 안경과 액세서리를 한 그는 누가 봐도 돈 많은 중년 부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실력이 죽진 않았군.’

변장과 위장은 그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아키라는 문단속을 잘하고 안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삿포로시의 휘황찬란한 번화가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는 듯했다.

* * *

일본 혼슈 후지산(富士山).

“허억 허억 허억!”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졌다.

당장 폐가 터지고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고 전방을 바라봤다.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서 그런지.

후지산의 모습이 유독 크고 엄청나 보였다.

“후우 후우!”

아키라는 열심히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도 무색하게.

벌써 아래쪽에서 경찰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계속 포위망을 좁혀!”

“빨리 헬기 불러서 놈을 찾아내!”

이곳은 도시처럼 소음이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래쪽에서 떠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다.

그만큼 자신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젠장!’

그는 속으로 거칠게 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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