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불운의 연속>
지이잉!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아키라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전화를 받았다.
“모시모시!”
―물이 끊겼어요.
“뭐라고?”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니 당장 마실 물도 사 오세요.
“어! 알았어.”
그는 신경질적으로 통화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제저녁부터 집에 전기가 끊겼다.
아침에는 도시가스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이젠 수돗물까지 먹통이 됐다.
메가시티인 도쿄에서 전기와 가스 그리고 물이 끊기면.
더는 문명 생활을 영유한다고 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중세보다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전기와 도시가스 복구를 위해 전화로 문의를 해보니 자기들도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옆집에서 난 사고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문제는 전기는 사흘, 도시가스는 일주일이나 돼야 사람을 보내준단다.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일본의 현실!
언제부터 이렇게 시궁창이 됐는지 모르겠다.
하긴 반도에 사는 조센징보다 못한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아키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터벅터벅!
그는 기껏 나왔던 마트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과 아내를 비롯해 두 아이가 마실 물을 잔뜩 샀다.
이미 식료품을 비롯해 초와 렌턴, 휴대용 버너와 그에 맞는 가스통 등
물건을 잔뜩 사서 트렁크를 꽉 채워놓았다.
할 수 없이 조수석을 열어 생수를 가득 쌓았다.
부릉 부릉 부우웅!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다행히 집까지 오는 길은 큰 문제가 없었다.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트렁크를 열었다.
모모에가 나와서 그를 도와 짐을 날랐다.
그래도 생수 같은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것은 전부 남자인 그의 몫이었다.
낑낑거리며 사 온 물건들을 전부 안으로 옮기자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텅!
트렁크를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쿵! 끼이익! 부아아앙!
갑자기 밖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질 것 같은 엔진 과열 음이 들려왔다.
“설마!”
아키라는 불길한 예감에 급히 밖으로 나가봤다.
“칙쇼!”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차가 박살이 나 있었다.
그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건너편에 사는 이토 상이 창문을 열더니 크게 소리쳤다.
“아키라 상! 뺑소니 트럭이에요. 차를 치고 바로 도망쳤어요.”
“혹시 차량 번호판 보셨어요?”
“스미마셍, 눈이 안 좋아서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아키라는 이토 상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모모에가 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서진 차를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뺑소니 트럭이래.”
“에에? 트럭이 우리 차를 치고 도망쳤다는 뜻이에요?”
“응.”
“맙소사!”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차는 어떻게 해요?”
“별수 있나. 보험처리를 해야지.”
“어휴! 보험료 올라가는 소리가 벌써 귀에 들리네요.”
집값만 살인적인 도쿄가 아니다.
자동차 보험료도 만만치 않게 비싼 곳이 도쿄다.
운이 좋아 뺑소니 트럭이 잡힌다면 모를까!
만약 잡히지 않으면 아마 자동차 보험료는 무시무시하게 올라갈 게 틀림없었다.
모모에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도대체 왜 이런 불운이 계속 이어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정말요?”
아키라는 모모에의 기분을 살려주기 위해 외식을 제안했다.
안 그래도 불이 꺼진 부엌이다.
어떻게 가족의 식사를 준비할지 막막했던 그녀다.
“좋아요.”
아키라의 외식제안은 모모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금세 얼굴이 활짝 핀 아내.
확실히 인생은 타이밍이 분명했다.
석양이 물들자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다.
학교에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단다.
아이들이 모두 놀래고 걱정했다면 낄낄대는 하루코와 쥰페이!
그들을 보자 아키라와 모모에는 없던 힘도 생기는 기분이었다.
“자! 저녁은 밖에 나가서 먹도록 하자.”
“우와! 오늘 외식이야?”
“이상하다. 생일은 벌써 다 지났는데.”
모모에의 말에 하루코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쥰페이는 수상한 눈초리로 아키라와 모모에를 쳐다봤다.
다행히 이미 박살 난 차는 견인차가 와서 끌고 갔다.
엔진이 박살 나버려서 도저히 고칠 엄두가 나질 않는다는 말에 아키라는 눈물을 머금고 차를 폐차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 앞에서 그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었다.
“야키니쿠 먹으러 갈 건데……. 뭐 싫은 사람은 그냥 집에 남아있어도 돼.”
“어서 빨리 갑시다.”
아키라의 말에 쥰페이가 바로 태세전환을 했다.
그는 재빨리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고 가족을 쳐다봤다.
“야키니쿠 서울에 예약은 했어?”
“물론이지. 예약 없이 가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잖니.”
모모에의 말에 쥰페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헤헤! 오늘은 불고기로 배 좀 채워야겠다.”
“왜 일본의 전통요리를 거기서 먹어?”
아키라가 듣고 있다가 태클을 걸었다.
“야키니쿠 하면 불고기잖아.”
“야키니쿠가 무슨 전통요리야? 한식이지.”
“난 김치하고 먹어야지.”
하지만 하루코와 쥰페이는 물론이고 모모에까지 그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흘렸다.
아키라는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잔뜩 기대에 부푼 아이들의 눈초리에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근데 우리 차는 어디에 주차했어?”
“어? 그, 그거 고장 나서 수리하러 카센터에 보냈어.”
“그럼 택시를 타고 가야겠네.”
“빨리 택시 부르자.”
쥰페이의 질문에 아키라는 괜히 등에 식은땀이 났다.
아이들은 한마음으로 빨리 택시를 부르라고 성화였다.
모모에가 웃으면서 전화를 걸어 콜택시를 불렀다.
근처에 택시가 있었는지, 다행히 5분도 되지 않아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
“어서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야키니쿠 서울이요.”
“아! 거기요. 알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이름만 대도 택시기사가 대번에 어딘지 알고 있었다.
아키라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과 아내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15분 만에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하고 와서 그런지 바로 좋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가족 수에 맞춰 갈비와 불고기를 넉넉히 시켰다.
반주로 한국산 맥주도 같이 시켜 모모에와 나눠 마셨다.
아이들은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모모에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행복해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
아키라의 가슴은 작은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이들이 옆에 있기에 자신의 삶이 완성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게 만들리라!
아키라는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식 야키니쿠 전문점인 ‘야키니쿠 서울’의 갈비와 불고기 맛은 정말 끝내줬다.
조센징이라면 이를 가는 그다.
하지만 반도의 여자와 음식 맛은 확실히 일본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건 도저히 어떻게 대체할 방법이 없었다.
아키라와 그의 가족은 배부르게 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갈 때는 몰랐는데 집에 돌아오니 너무 어두웠다.
그들의 안색이 바로 어둠과 동화됐다.
전기와 가스 그리고 수도가 끊긴 집.
정말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장 쥰페이와 하루코가 작게 투덜댔다.
한국식 야키니쿠를 먹고 오지 않았다면 아마 대놓고 불만을 터트렸을 것이다.
“초를 가져올게요.”
“랜턴 사놓은 게 있으니까 그것도 같이 키자.”
모모에가 눈치껏 빠릿빠릿 움직였다.
아키라도 같이 거들자 집안은 금세 초와 랜턴으로 인해 간신히 빛을 되찾았다.
“나도 하나 줘!”
“어휴! 숙제는 다 했네.”
쥰페이는 아키라에게 랜턴 하나를 받아갔다.
모모에는 철없는 하루코의 엉덩이를 한 대 치면서 초를 건넸다.
“꺅!”
“조용히 지내자.”
“음.”
하루코는 모모에의 사나운 눈빛에 단번에 제압됐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초를 가지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참여. 내일 나가서 캠핑 장비라도 사 올 테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모모에의 말에 아키라는 큰 위로를 받았다.
잠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불 꺼진 거실.
초만 타오르고 있다.
TV도 안 되고 컴퓨터도 켜지지 않는다.
할 게 없자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그들은 왜 열악한 오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많은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키라와 모모에는 이 야릇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불이야!”
“불이 났다.”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이 마구 고성을 질러댔다.
아키라와 모모에는 급히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방을 뛰쳐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보니 옆집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맙소사!”
“세상에!
어제는 트럭으로 왼쪽 집이 반파, 아니 박살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아키라의 가족이 사는 집 오른편 집에서 불이 났다.
이 황당한 사태에 두 사람은 그저 입만 딱 벌리고 서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 불이다.”
“옆집에서 불이 났어.”
아키라와 모모에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위험하니 오늘은 호텔로 가서 자는 게 좋겠어.”
“예, 그렇게 해요.”
“우와! 잘 탄다.”
“나 불나는 거 처음 봐!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진짜 처음이야.”
둘의 심각한 얼굴에도 하루코와 쥰페이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이렇게 되면 내일 학교 안 가도 되겠다.”
“호텔에 가면 TV도 있고 인터넷도 있어.”
“컴퓨터도 있을까?”
“그냥 노트북 컴퓨터를 연결해서 쓰면 되잖아.”
“그게 좋겠다.”
철없는 아이들의 말에 아키라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패닉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중요한 물건만 간단히 챙긴 채!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소방차가 몰려와 시원하게 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아키라는 대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특급호텔로 갔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전혀! 이럴 때일수록 돈 아끼지 말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는 게 정신 건강에 더 이로워!”
“알았어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모모에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결 밝아졌다.
특급호텔에 와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아이들은 삐까번쩍한 특급호텔의 위용에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대고 있었다.
아키라는 당당하게 프런트로 가서 딜럭스룸 하나를 잡았다.
키를 받고는 손짓을 하자 모모에와 아이들이 쪼르르 다가왔다.
“이 호텔은 처음인데.”
“언제 호텔에 와 봤어?”
“너 세상에 나오기 전에 난 이미 유럽여행을 다녀오신 분이다.”
“그래봤자.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으면서.”
작게 속삭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아키라는 승강기로 이동했다.
한 가족 네 명이 승강기에 모두 올라타자 그는 10층을 꾹 눌렀다.
“몇 호실이야?”
“1004호!”
“그거 한국에서는 천사라고 하던데.”
“그래?”
하루코는 학교에서 들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아키라는 반도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녀간의 대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덜컹!
“꺄악!”
“어머!”
“으헥!”
그때, 갑자기 승강기에 강한 충격이 왔다.
그러더니 불이 팍 꺼져버렸다.
“으아악!”
놀란 쥰페이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탁탁!
아키라가 급히 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혔다.
“쥰페이! 진정해. 그저 승강기가 고장 난 것뿐이야.”
“으아아!”
모모에는 놀란 아들을 가슴에 꼭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러자 쥰페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비명을 그쳤다.
“아이고, 놀라라! 요새 우리 집에 무슨 마가 꼈나? 왜 이렇게 사고가 잦아.”
하루코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며칠 동안 계속 사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아키라는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전화 좀 해보세요.”
“알았어.”
모모에의 말에 아키라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호텔로 전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강기의 문이 강제로 열리고 그들은 무사히 구출됐다.
“申し訳ありません.(대단히 죄송합니다.)”
호텔 직원들은 일제히 아키라와 그의 가족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특급호텔이라는 곳에서 승강기가 고장 나면 어쩌자는 겁니까?”
“申し訳ありません.”
아키라가 화가 난 목소리로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단히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