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만재능(Feat. 대한 TV)-296화 (294/331)

296화 <끝이 아닌 시작>

“대한아!”

“네.”

“고맙다.”

“천만에요.”

이태산은 크게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모습에 대한은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효도한다고 하긴 했는데…….

인제 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태산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생각이 떠오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네 어머니가 말이다.”

“예.”

“그놈이 웃고 있었대.”

“뭐라고요?”

“자신이 쓰러져서 하혈하는 것을 보더니 그 일본놈이 웃고 있었다고 하더라.”

“네에?”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대한은 팔다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속에서 천불이 넘어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급히 심호흡을 한차례 했다.

폭발하려는 화를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이태산이 창가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진짜 장난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어째 용서가 안 되는구나.”

“아!”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네 어머니도 아마 오랫동안 이 일을 잊지 못할 거야.”

“아버지!”

“응?”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그래.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다.”

무소불위의 권능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이태산은 막연히 자기 아들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 일쯤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저, 위에 잠깐 올라갔다 올 테니까 아버지도 좀 쉬세요.”

“그래. 내가 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보다.”

“그건 아니에요. 아까 한 얘기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전문가를 불러서 상의를 해보려고 그래요.”

“알았다. 그럼 가서 쉬어라.”

“예, 아버지! 이따 봬요.”

대한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위층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엘라와 에바가 쪼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오빠! 괜찮아요?”

“마스터, 두 분은 좀 어떠세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두 여자를 보자.

대한은 그나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곧 아버지가 한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개새끼네.’

아버지가 지역구 보궐선거에 나가는 일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돈이야 좀 들어가겠지만.

사실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었다.

아니 당장 청와대에 연락하면 아마 다음 선거에는 비례대표로 올려서 뽑아줄지도 몰랐다.

문제는 마지막에 한 얘기였다.

“둘 다 우리 대화한 거 듣고 있었지?”

“네.”

“예, 죄송합니다. 너무 궁금해서 그만.”

대한의 말에 엘라와 에바는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건물에 돌아다니는 에어볼이 몇 갠데 모르겠어. 나무라는 거 아니니까 고개 들어라.”

“네, 오빠!”

“예, 마스터.”

엘라와 에바는 잽싸게 고개를 들고 그의 양쪽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여체가 양쪽에서 몸을 짓누르자 무거운 마음도 살짝 풀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놈이 웃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지?”

“네, 마스터.”

“참 나쁜 놈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에바는 긍정을, 엘라는 크게 화를 냈다.

대한은 엘라가 화를 내자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 일은 좀 더 냉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지금부터 그걸 좀 알아보자고.”

“당장 제거하는 거 아니었어요?”

에바가 고개를 살짝 모로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대한은 차가운 미소를 대답했다.

“그건 너무 쉽잖아. 때로는 살아있는 게 지옥보다 더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군요.”

에바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라는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한을 쳐다봤다.

“오빠! 그냥 죽여버려요. 그게 편해요.”

“놈의 뒤에 누가 있는 줄 알고? 만약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그, 그건.”

대한의 싸늘한 대꾸에 엘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능하면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바로 한 손을 들더니 그녀의 말을 아예 원천 봉쇄했다.

“일이 먼저야.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네에.”

완강한 대한의 반응에 엘라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대한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자 시선을 에바로 돌렸다.

그러자 에바가 즉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보궐선거는 전문가를 동원해 최고의 전담반을 꾸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한 가지만 확실히 정해주세요.”

“뭘?”

“일반적인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할 건가요? 아니면 무조건 당선시킬 건가요?”

“으음.”

대한은 에바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에바의 성향상 ‘무조건’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그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알아서 해!”

“무조건 당선시키라는 뜻이나 마찬가지군요.”

“그래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거 알지?”

“잘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아슬아슬한 줄타기 한번 하죠.”

“염산은 절대 안 돼!”

“눼에 눼에!”

에바의 불만스러운 대답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한은 소파에 앉아 홀로그램을 펼쳤다.

“그럼 본격적으로 다음 일을 시작해볼까?”

“네, 마스터.”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대한과 에바를 바라보고 있는 엘라!

그녀는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 * *

일본 도쿄 지요다구 우치칸다 1조메.

“식사하세요!”

“응.”

아키라는 아내 모모에의 부름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던 신문은 잘 접어 한쪽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아침은 뭐야?”

“당신 좋아하는 낫토를 준비했어요.”

모모에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맛있겠네.”

아키라가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그녀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등교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온 아이들은 달랐다.

“뭐야? 냄새 배게 아침부터 낫토야?”

“가끔은 자식들을 위해서 프렌치토스트라도 굽는 게 어때?”

짧은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다가온 하루코의 말에 쥰페이가 맞장구를 쳤다.

“낫토가 얼마나 맛있고 건강에 좋은데.”

“그건 아빠 생각이고.”

“너 어렸을 때 낫토 많이 먹었던 거 기억 안 나?”

“내가?”

아키라의 말에 하루코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맞는 말이야. 정말 하루코는 낫토 없이는 못 사는 아이였어.”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모모에까지 나서서 지원사격을 하자 아키라는 두 손을 허리에 착 대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야레야레!”

그 모습에 쥰페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쥰페이, 오무라이스 어때?”

“좋아.”

모모에의 제안에 쥰페이는 당장 희색이 만면했다.

하루코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얼른 엄마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루코는 낫토에 미소시루다.”

“아이, 구려!”

하지만 단호한 모모에의 말에 그만 볼을 잔뜩 부풀리고 말았다.

그래도 주는 밥을 거부하는 법은 없었다.

이제 한참 자라는 나이라 식탁에서 고개만 돌려도 배가 고팠다.

흔히 무쇠도 씹어먹을 기세라는 말이 어울리는 하루코였다.

아키라는 그런 하루코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루코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밀치려다가 언뜻 멈췄다.

이게 아빠의 사랑표현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대신 대가를 낸다면 기꺼이 참아줄 수 있었다.

그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어휴!”

아키라는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모모에 몰래 재빨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상큐!”

“유아 웰카므.”

둘은 영어로 말을 빠르게 주고받았다.

하지만 모모에는 이미 눈치를 채고는 날카롭게 하루코를 쳐다봤다.

순간 가슴이 뜨끔해진 하루코가 얼른 밥그릇에 코를 처박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 버릇 나빠지게 자꾸 돈 주지 말아요.”

“알았어.”

매번 대답은 참 잘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모모에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요새 이렇게라도 아침에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가정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오므라이스 다 먹었다.”

“나도 밥 다 먹었어.”

하루코와 쥰페이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순식간에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더 안 먹어?”

“많이 먹었어. ごちそうさま(잘 먹었습니다)!”

“나도. ごちそうさま(잘 먹었습니다)!”

둘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을 한번 흔들고 잽싸게 집을 빠져나갔다.

“차 조심해라!”

“네.”

“예.”

어디를 가나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은 비슷한가 보다.

모모에의 말에 하루코와 쥰페이는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갑자기 집이 조용해졌다.

“휴우! 아침 전쟁이 끝났네요.”

“하하! 전쟁이라. 당신 말이 맞네.”

아키라는 모모에의 말에 빵 터졌다.

전쟁이라도 한 것 같은 정신 없는 아침이 지나갔다.

하지만 별로 기분 나쁜 전쟁은 아니었다.

이렇게 매일 아침 지지고 볶고 사는 게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당연한 일상인지 모른다.

“이것 좀 드세요.”

“어? 이거 와규(和牛) 아냐?”

“맞아요. 며칠 전에 당신이 출장 갔다가 사 온 거예요.”

아이들 몰래 모모에가 준비한 회심의 한 수!

밥상 위의 와규는 언제나 옳았다.

“아침부터 와규라!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군.”

“많이 드세요.”

“당신도 같이 들어.”

“네.”

둘은 사이좋게 세계 최고 수준의 쇠고기라는 일본산 소고기!

와규를 스테이크로 구워 먹었다.

아키라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로.

그리고 모모에는 붉은 속살이 적당히 익은 미드움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절로 미소가 돌았다.

“오늘은 안 나가세요?”

“출장 갔다가 왔잖아.”

“이렇게 널널하게 일하는데도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해요.”

“남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저야 뭐 월급만 꼬박꼬박 잘 들어오면 그걸로 만족이에요.”

“그거 끊길 일은 없을테니까 안심해!”

“제발 죽을 때까지 그러길 바랄게요.”

모모에는 웃으며 포크로 찍은 와규 한 점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육질의 소고기 맛이 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테이블을 비췄다.

여느 때처럼 즐거운 모모에의 아침 식탁의 풍경이었다.

아키라도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자 절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쾅!

그때, 강한 폭음과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흔들렸다.

“꺄악!”

놀란 모모에가 급히 식탁 아래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키라는 이게 지진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다다다다!

잽싸게 창가로 달려간 그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자신의 눈으로 지금 현장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에요?”

모모에가 잔뜩 웅크린 채 아키라를 바라보며 외쳤다.

하지만 아키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급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조금 전, 창문을 통해 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키라는 절로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제야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눈앞에 보이는 참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 이게 뭐야?”

“세상에 트레일러가 집을 덮쳤어.”

“안에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떻게? 벌써 즉사했겠지.”

“트레일러 운전사는 살아있을까?”

“지금 운전사가 문제는 아니잖아.”

아키라는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하는 말을 들으며 천천히 옆집을 향해 다가갔다.

1층 단독주택이 커다란 트레일러에 깔려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완벽하게 집을 부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제야 모모에가 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오카모토 상의 집이잖아. 어떻게 해?”

“안에 있었다면 다 죽었을 거야.”

“아! 어제 다들 가족여행 간다고 했었는데.”

“그으래? 정말 다행이다.”

삐용 삐용!

그제야 경찰차와 응급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그새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그러게 말이야. 다친 사람이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야.”

“그래도 너무 끔찍하네요.”

“뭐가?”

“저 트레일러가 옆집이 아니라 만약 우리 집을 덮쳤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상상만해도 몸에 소름이 돋아요.”

“아!”

모모에의 말을 듣자 아키라는 뒤늦게 양팔에 왕소름이 돋아올랐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됐다면!

아마 지금쯤 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카모토 상에게는 안 됐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에요.”

“…….”

“이런 사고는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데.”

아키라는 모모에의 ‘사고’라는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정말 단순히 사고가 난 걸까?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겠지.’

상상하기조차 싫은 가설!

그는 급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떠오른 생각을 털어버렸다.

“휴우! 들어갑시다.”

“네.”

경찰차와 응급차가 도착하자 아키라는 모모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놀란 모모에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아키라는 팔로 그녀의 어깨를 꼭 감쌌다.

모모에는 그의 이런 행동에 의지가 되는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탈칵!

현관문이 닫히자 아키라의 집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전혀 몰랐다.

이게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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