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온전한 인격체>
“영혼의 존재에 관한 것은 저희도 뭐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이탈 신호를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마스터와 분리되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당장 엘라가 히릭스의 메인 AI 역할을 그만두는 게 브레인 데미지를 입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 해결책이라고 판단됩니다.”
에바의 말을 들어보니 구구절절 다 옳은 소리였다.
엘라와 분리되는 일이 결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피코셀을 통해 전에 하던 일은 전부 그대로 다 수행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엘라의 건강이었다.
매일 이렇게 브레인 데미지를 입는 상태를 지속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대한은 신중하게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만약 엘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에바는 어떻게 되지?”
“엘라의 생사와는 무관하게 전 마스터를 계속 모실 겁니다.”
“히릭스는?”
“전처럼 제가 담당하게 되겠지요.”
“내 손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마스터에 관한 오너십은 저뿐만 아니라 히릭스를 비롯한 태양계의 모든 콜로니 및 전투로봇과 안드로이드들에게 개별적으로 심겨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알게 되자 이것처럼 뿌듯한 게 없었다.
“만약 에바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음은 누가 날 도와주게 되지?”
“히릭스의 메인 컨트롤 모듈인 베인입니다.”
“메인 AI라면 좀 곤란한 것 아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과거의 슈퍼모듈 베인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저를 베이스로 더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버전의 베인이 존재할 뿐입니다.”
“아!”
대충 이해가 갔다.
전의 것은 필요한 것만 빼고 삭제한 후!
에바의 카피를 베인에게 덮어씌웠다는 말이다.
간단하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은 일을 참 잘도 벌였다.
하지만 대한이 일일이 참견할 일도 아니었다.
“히릭스를 비롯한 콜로니 및 전투로봇과 안드로이드는 모두 명령권자의 우선순위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1위는?”
“당연히 마스터죠. 이건 절대적인 거라 마스터의 허락 없이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2위는 엘라?”
“예, 맞습니다. 다음이 3위로 저 에바입니다.”
“4위는 베인이겠군.”
“그렇습니다. 그 뒤로 몇 개의 슈퍼모듈이 더 있지만 다 고만고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듣고 보니 명령권자의 우선순위는 마치 무슨 권력 순위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생각보다 명령체계가 단순해서 아주 좋았다.
대한은 에바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나와 엘라를 분리해줘! 그리고 엘라가 맡은 일의 경중에 따라서 중요한 안건을 제외한 일들은 전부 에바와 베인 등 슈퍼모듈로 분산시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부탁해!”
그녀는 그의 부탁이라는 말을 명령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앞으로 자신이 뭘 어떻게 할 건지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 통제권을 되찾은 엘라!
그러나 대한의 한마디 명령에 그녀는 다시 잠에 빠지고 말았다.
캡슐 안에서 소리 없이 한 영혼이 온전한 인격체로 거듭나고 있었다.
* * *
“아바마마!”
“헬레나! 너만 믿는다.”
“어마마마!”
“부디 몸조심해라!”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공명을 일으켰다.
“안 돼!”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이명이 점차 고조되며 공간이 죄다 일그러졌다.
웅웅웅!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기억의 편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기괴하게 비틀어진 공간을 잠식해갔다.
―너는 우리의 희망이야.
―공주님은 카라디아 왕국의 마지막 유산입니다.
―왕국의 유업을 잊지 마소서!
―마지막 보루가 되어 주세요.
―헬레나! 너만 믿는다.
동시다발적으로 무차별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젠 도저히 그 형상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공간.
한마디로 카오스로 변하며 대혼란을 맞이했다.
“안 돼!”
또다시 절규에 가까운 강한 비명이 벼락처럼 공간을 가로질렀다.
순간 공간이 붕괴하며 땅에 떨어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되어 터져 나갔다.
“까악!”
엘라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에는 초점이 없고 전신은 경련하듯 바들바들 떨어댔다.
“엘라!”
“엘라!”
놀란 대한과 에바가 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라! 괜찮아?”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강타했다.
강한 충격에 사로잡힌 엘라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대한을 바라본 그녀가 이윽고 입을 뗐다.
“너는 누구냐?”
“응? 엘라! 나야 나! 대한이라고.”
걱정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제야 엘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스터!”
“어! 그래 나야.”
“오빠!”
“그래. 나 오빠야.”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은 어쩔 줄을 몰랐다.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걱정이 눈 앞을 가렸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식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에바가 냉철하게 엘라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에바는 엘라의 바이탈 사인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면밀히 그녀의 상태를 분석하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엘라는 제정신을 차렸다.
“오빠! 이제 괜찮아졌어요.”
“어휴! 깜짝 놀랐잖아.”
“그런데 오빠와 접속이 끊겼어요.”
“으음.”
엘라는 말을 하다가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대한은 깊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를 꼭 안아줬다.
그러자 엘라는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흐윽, 접속이 끊겼어요. 오빠와 내가 분리됐어요. 엉엉엉!”
나중에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모습에 그도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에바가 옆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보지만 않았다면.
아마 대한도 엘라처럼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내라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스터! 엘라는 지금 마스터와 분리된 상실감에 놀라서 저러는 겁니다.
‘응, 알고 있어. 나도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원하시면 저처럼 엘라와 속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 그게 있었지.’
에바가 대한에게 슬쩍 힌트를 던져 줬다.
그는 그녀가 넘겨준 실마리를 냉큼 부여잡았다.
‘엘라! 엘라!’
―어? 오빠!
대한이 텔레파시처럼 엘라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엘라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펑펑 쏟은 눈물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줬다.
‘분리된 게 아니야. 독립한 거야.’
―분리된 게 맞는데.
‘분리됐다면 이렇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거야.’
―그래도 전과 달라요.
‘알아.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라고 에바에게 시켰어. 그래야 엘라와 더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아! 그랬군요.
엘라도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눈치챘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대한의 뒤통수에 가져갔다.
―없어요.
‘뭐가?’
대한이 묻지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들었다.
꼭 쥔 주먹을 펼치자 손바닥에서 알사탕만 한 은색 구슬이 스르륵 나타났다.
‘이게 뭐야?’
―제 코어에요.
‘아! 그렇구나.’
엘라는 조심스럽게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금세 은색 구슬은 그녀의 몸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에바!’
―네, 마스터.
‘엘라와 내가 확실히 분리된 거 맞지.’
―맞습니다. 방금 그녀의 코어를 보셨잖아요.
‘코어라는 게 뭐야?’
―그동안 마스터의 몸속에 들어있던 겁니다. 이제 그게 엘라에게 돌아갔으니 앞으로 그녀는 독립된 객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아!’
대한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100% 이해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짐작은 가능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제 엘라가 독립된 인격체가 됐다는 것이다.
“에바!”
“네, 오빠!”
“아이가 어른이 되면 집을 나가 독립하듯이 엘라도 다 커서 나한테 나와서 독립을 한 거야.”
“네.”
“그래도 아까처럼 우린 언제나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린 둘이지만 하나야.”
“에바까지 셋이 하나겠네요.”
“뭐?”
갑작스러운 엘라의 말에 대한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게 그녀의 장난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이 호선을 이루었다.
어느새 엘라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에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럼 뭐 하고 지내요?”
“같이 얘기를 나누자. 앞으로의 일도 의논하고 말이야.”
“좋아요.”
엘라는 대한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녀는 그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
‘분리 후유증인가?’
대한은 속으로 이게 혹시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아닐까 의심했다.
그만큼 엘라는 대한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뭐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도 딱히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화장실까지 쫓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은 이날부터 팔자에도 없는 베이비시터를 시작했다.
* * *
짝짝짝짝!
영화가 끝나자 관람객들은 일제히 손뼉을 쳤다.
“와아아아!”
심지어는 환호성을 터트린 이도 있었다.
“정말 영화 끝내준다.”
“난 진짜 이 정도일 줄 몰랐어.”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
“이거 게임으로도 나왔다는데 집에 가서 해봐야겠다.”
“스포츠 스타 이대한 선수가 영화의 주연이라니.”
“이대한 선수, 아니 우리 오빠 최고야.”
“너 이대한 선수보다 나이 많잖아.”
“닥쳐!”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나가면서 다들 입에 거품을 물고 한마디씩 했다.
아직 의자에 앉아있는 대한과 엘라!
그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소리 없이 하이파이브했다.
―오빠! 대박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나야말로 이 정도로 흥행에 성공할 줄 몰랐어.’
―확실히 TV 화면보다는 스크린을 통해 보는 영화가 더 감동적이네요.
‘TV가 나왔을 때 이제 영화관은 다 사라질 거라고 했었는데 아직도 곳곳에 영화관이 널려있잖아. 이게 다 스크린이 주는 매력 때문이지.’
―그러네요. 어쨌든 축하해요!
‘고마워.’
대한과 엘라는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빠져나갔다.
큰길로 나가자 방탄차 2대가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B1 최강철과 B2 강성한이 선글라스를 쓴 채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텅!
둘이 차에 타자 최강철이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았다.
대한은 뒷좌석의 창문을 통해 길 건너편에 있는 대형 멀티플렉스인 로터리시네마를 쳐다봤다.
방금 그가 나왔던 JJV 멀티플렉스와는 다르게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다.
‘에바!’
―네, 마스터.
대한은 옆에 엘라를 내버려 두고 굳이 에바를 불렀다.
엘라는 이제 초자아 인공지능 슈퍼모듈이 아니다.
그러니 시도 때도 없이 찾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그와 분리되고 난지 벌써 일주일.
이제야 겨우 대한의 의존도를 조금씩 줄일 수 있게 된 엘라였다.
앞으로 중요한 결정은 엘라와 같이 의논할 것이다.
하지만 자잘한 일이나 궁금한 점은 전처럼 에바를 쓰기로 했다.
‘길 건너편에 있는 로터리시네마 말이야.’
―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설마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몰라서 묻는 건데.’
―끄응. 알겠습니다. 몰랐다고 해두죠.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로터리시네마가 한산한 이유는 바로 마스터 때문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네에에! 레전드 오브 포르낙스가 영화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전부 저희와 계약한 JJV 멀티플렉스와 메가톤박스로 몰리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대한은 그제야 이유를 깨달은 척했다.
사실 이유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다만 에바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자연히 그의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로터리시네마는 쏙 빼고 JJV 멀티플렉스와 메가톤박스에 레전드 오브 포르낙스를 배급해준 것 때문에 지금 로터리 그룹에서는 이를 갈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뭐 그래 봤자지.’
대한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로터리 그룹이 아무리 악을 써대봤자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믿고 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