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게임 포르낙스>
영화는 처음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이내믹한 액션과 스펙타클한 전쟁 씬이 스크린 전체를 가득 채웠다.
스토리도 간결하고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위기의 상황이 연이어 찾아왔다.
용기와 기지로 어려움을 하나씩 극복해나가면 무섭게 성장해나가는 주인공들.
그 안에서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고 또 헌신했다.
마침내 그들은 마스터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위대한 초인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시작된 최후의 전투!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생생한 전투는 가히 압권이었다.
수천의 기사단과 수십 만의 군단이 적을 향해 정면으로 충돌해갔다.
꿀꺽!
대한은 그 장엄하고도 역동적인 장면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참 신기했다.
덕분에 대한은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에 시청자의 하나로 푹 빠져들 수 있었다.
이윽고 장대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영화가 끝났다.
“아!”
“와아!”
대한과 엘라는 거의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불이 켜지며 곧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고개를 돌려보니 에바를 위시한 많은 이들이 나와 소파를 둘러싸고 있었다.
B1 최강철, B2 강성한, M1 김철수, M2 이영수, H1 제니, H2 야엘, L1 리사, L2 틸란 등
엘라를 제외하면 모두 전투로봇과 안드로이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들이 해주는 축하 인사에 대한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마스터! 축하드려요.”
“다들 고맙다.”
대한은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엘라의 외침에 바로 눈을 동그랗게 변하고 말았다.
“오빠! 저거 3십만 맞죠?”
“어? 응. 맞는 것 같은데.”
그의 눈빛이 일순 기쁨으로 물들어갔다.
그 사이를 에바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마스터! 레전드 오브 포르낙스의 현재 시청 수는 322,895입니다.”
“까악! 벌써 30만을 넘겼어요!”
에바의 말에 이어 엘라가 귀여운 비명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인제 보니 괜히 그냥 나와서 손뼉을 쳐준 것이 아닌 모양이다.
“지금까지 네오플릭스 회원들이 가장 많이 시청한 작품의 조회 수가 얼마나 되지?”
“네오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기이한 이야기’가 7천만 회에 근접하고 있어요.”
“아아!”
대한은 착 가라앉는 감탄사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했다.
엄청난 조회 수, 아니 넘사벽인 조회 수였다.
생각해보니 괜히 오버를 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엘라의 생각은 좀 달랐다.
“오빠! 저건 시리즈에요. 우리 영화는 단편이잖아요. 그러니 굳이 비교할 게 못 돼요. 그리고 아직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벌써 레전드 오브 포르낙스의 조회 수가 33만을 돌파했어요. 이 상태로 가면 백만도 충분히 가능하다고요.”
“엘라의 말이 맞아. 30만을 넘긴 것도 난 대단하다고 생각해.”
대한과 엘라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위로와 감사의 체온으로 인해 두 사람의 몸은 물론 마음마저 따뜻해졌다.
“마스터! 게임도 한번 확인하시죠.”
“어! 그래.”
에바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대한을 쳐다봤다.
그는 엘라를 끌어안은 채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허공에 평평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마치 컴퓨터의 화면을 보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스크린이었다.
게임 홈페이지가 열리고 현재의 접속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단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홈페이지가 세련되고 아주 깔끔했다.
“어머!”
그런데 이번에도 엘라가 먼저 깜짝 놀랐다.
홈페이지 중앙에 노출된 숫자가 어느덧 백만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거 조회 수, 아니 접속자 수야?”
“아닙니다. 다운로드 숫자입니다.”
“오픈 한 지 얼마나 됐지?”
“두 시간입니다.”
두 시간 만에 무려 백만 다운로드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말은 앞으로 백만 명 이상의 접속자 수가 생긴다는 말과 같았다.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확실히 흥행에 성공한 분위기였다.
“다행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집계한다고 가정했을 때, 앞으로 몇백만 명이 더 접속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군. 이 상태로 가면 최소한 접속자 수백만 명은 확보할 수 있겠다.”
에바의 장담에도 대한은 짐짓 최소한으로 숫자를 잡았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실망하지 않고 좋을 것 같아서다.
“일단 좀 두고 봐요. 지금 뭐라고 단정 짓기에는 영화나 게임이나 상승하는 숫자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요.”
“맞는 말이야.”
“그러지 말고 직접 게임이라도 한번 해보세요.”
“그럴까?”
볼트 행성의 영화나 게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 소유인 코레게임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게임이다.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한번은 꼭해보는 게 좋았다.
스르륵!
대한과 엘라의 앞에 소리 없이 테이블이 올라왔다.
거기에는 대형 LED 모니터와 최신형 컴퓨터가 놓여있었다.
디자인도 깔끔하고 색깔도 네온으로 아주 잘 빠졌다.
하지만 디자인을 보아하니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브랜드는 아니었다.
“내가 엘라와 게임을 다해보네.”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게임을 하는 것은 처음이에요.”
마우스를 잡은 엘라의 말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굳이 이렇게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이렉트로 게임에 접속하던가 차라리 홀로그램을 통해 게임을 하는 게 더 편하다.
하지만 대한과 엘라는 굳이 컴퓨터를 통해 접속하기로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뭐로 시작하지?”
“스타터는 역시 레인저가 좋지 않을까요?”
게임 ‘포르낙스’는 스킬 트리와 젬을 어떻게 조합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종족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무난한 휴먼 전사로 종족을 정했다.
그러자 엘라는 기다렸다는 듯 엘프 궁수를 선택했다.
둘은 간단히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즈했다.
그런 후 스타팅 포인트를 똑같이 맞추고 곧바로 게임으로 들어갔다.
따라란 따라란 따단단!
경쾌한 음악과 함께 한 편의 영화 같은 오프닝 동영상이 펼쳐졌다.
채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영상!
하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게임을 해야 할 충분한 동기부여가 됐다.
아마도 사람들은 오프닝 동영상을 보면서 게임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지 않을까 싶었다.
“오프닝이 괜찮네.”
“나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아요.”
엘라가 3인칭 어법을 사용하자 대한은 그냥 피식 웃었다.
에바가 만들었으니 결국 엘라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전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뉘앙스로 얘기하고 있다.
아무래도 유체이탈 화법이 이런 식으로 파생된 게 아닐까 싶었다.
촤아악 촤아악!
끼룩 끼룩!
시작은 이름 모를 바닷가 해변.
많은 게임에서 출발점으로 애용하는 전형적인 클리셰였다.
캐릭터가 난파된 배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설정이다.
“저기 무기가 떨어져 있다.”
“시작부터 싸우라는 소리네요.”
“게임이 다 그렇지 뭐.”
말을 그렇게 했지만 둘은 서둘러 무기를 골랐다.
대한은 녹이 잔뜩 슬어있는 다 부러져가는 ‘녹슨 검’을 집었다.
엘라는 당장이라도 시위가 끊어질 듯 위태위태한 ‘쪼개진 활’을 선택했다.
화살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은 그냥 대충 깎아서 만든 대나무 화살 몇 개가 전부였다.
과연 이걸로 전투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크하아 크하아!
둘이 무기를 들자마자 섬 안쪽에서 좀비 떼가 달려왔다.
“죽기 싫으면 저쪽으로 가라는 얘기겠지?”
“이걸 들고 좀비 떼와 싸우는 것은 죽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죠.”
대한과 엘라는 냅다 해변을 향해 뛰어갔다.
뒤에서 수십 마리의 좀비 떼가 죽자고 쫓아왔다.
100m쯤 달려가자 모래사장 위에 커다란 바위들이 보였다.
그들은 얼른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사다리 역할을 하는 틈이 있어서 그런지 바위를 타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좀비들은 그 쉬운 걸 못하고 계속 올라오다 아래로 미끄러졌다.
“오오! 여기서 일단 레벨업을 하라는 말이군.”
“맞아요.”
대한의 말에 그녀는 바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리곤 바로 아래에 보이는 좀비의 머리통에 활을 쐈다.
콰직!
다행히 쪼개진 활은 간신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녹슨 검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찔러댔다.
퍽 퍽 빠각!
그때마다 좀비들의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리며 피와 뇌수가 터져 나왔다.
뇌가 뭉개진 좀비들은 바로 쓰러졌다.
그런데 그게 반복되자 좀비들의 시체가 탑처럼 쌓였다.
그러자 동료의 시체를 타고 넘어오려는 좀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둘은 이 사태에 위기감을 느꼈다.
“적당히 하고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야.”
“알겠어요. 어차피 이제 더 쏠 화살도 없어요.”
“이런.”
그러고 보니 엘라는 몇 개 있지도 않은 대나무 화살을 이미 다 써버렸다.
대한의 녹슨 검도 당장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때 대한과 엘라의 캐릭터가 동시에 환한 빛에 휩싸였다.
―레벨업! 축하합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근력이 올랐습니다.
―체력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올랐습니다.
―레벨업으로 스킬 포인트 1개를 얻으셨습니다.
―스킬 트리를 열어 스킬 빌드를 시작하세요.
게임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인 레벨업 타이밍이었다.
“올! 스킬 빌드를 하라는군.”
“그것도 일단 안전한 곳을 찾은 다음에 해야죠.”
대한과 엘라는 서로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더 위로 올라갔다.
바위에서 바위를 타고 뛰어넘자.
멀리 목책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을이에요.”
“봤어. 일단 저리 가자.”
“네.”
둘은 빠르게 의견의 일치를 보고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바위를 타고 넘어 쫓아오는 좀비는 없었다.
무사히 목책에 도착하자 자경대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쪽문을 열어줬다.
대한과 엘라는 서둘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부랑자여! 피셔맨의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가죽 갑옷에 날카로운 창을 쥔 자경대 대장이 그들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워낙 험하게 생긴 얼굴이라서 이게 환영인지 위협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부랑자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호리호리한 사내가 그들을 불렀다.
“저희 말인가요?”
“두 분 부랑자 맞죠?”
“아! 네.”
게임 안에서 NPC들이 플레이어를 부르는 호칭이 ‘부랑자’인 모양이다.
“돈 없으시죠?”
“네, 없는데요.”
“무기나 장비도 없죠?”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얻으려면 저 조셉을 따라오셔야 합니다.”
“아! 네.”
그를 따라가면 돈과 무기 및 장비를 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남자분은 여기서 장작을 패세요.”
“여자분은 저쪽에서 감자를 씻으세요.”
조셉이 가리킨 장소를 바라봤다.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물론 씻어야 할 감자부대도 엄청나게 늘어서 있었다.
대한과 엘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둘은 어쩔 수 없이 장작을 패고 감자를 씻었다.
다행히 장작을 패자 체력이 소모되며 근력이 올랐다.
감자를 씻는 엘라는 손재주가 올랐다.
다행히 두 사람 앞에는 게이지가 떠 있었다.
열심히 장작을 패고 감자를 씻자 빠르게 게이지가 차올랐다.
띠링! 띠링!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게이지가 가득 찼다.
그러자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던 조셉이 바람과 같이 등장했다.
“수고하셨어요. 여기 동화 하나와 투박한 목검이에요.”
“저는요?”
“아까 보니 쪼개진 활을 들고 있던데, 저기 대나무 활과 화살을 가져가세요.”
생각보다 보상이 무지하게 짰다.
하지만 어느 게임이나 의례 시작은 이렇게 초라했다.
둘은 실망하지 않고 목검과 대나무 활을 받아 들고 나왔다.
“저기 용병 길드가 있어요.”
“시작할 때 용병으로 등록하라고 했지?”
“네, 맞아요. 최하급 용병이에요.”
대한과 엘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용병 길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사방에서 벌떼처럼 부랑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들이었다.
“용병 길드 건물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우리만 게임을 시작하는 게 아니잖아요. 전 세계 동시 오픈이라고요.”
“그래. 맞다.”
좀 붐비긴 했지만 그렇다고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용병 길드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전부 각자 별도의 방으로 배정되어 순간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한과 엘라는 따로 떨어지지 않았다.
용병 길드 앞에 쓰여 있는 파티 문구 때문에 들어오기 직전에 파티를 맺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