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에바와 엘라>
그래도 술자리는 허락할 수 없었다.
이건 엘라의 ‘오빠’로서가 아니라면 그녀의 ‘마스터’로서 막을 것이다.
다행히 대한의 강한 의지를 느낀 엘라는 금세 포기했다.
그녀도 굳이 그의 눈 밖에 나면서까지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애플파이 좀 들어보세요.”
“응.”
엘라는 포크로 애플파이 조각을 집어 그의 입으로 가져왔다.
손으로 포크를 잡으려고 하자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아잉!”
피식 웃음을 흘린 대한은 가만히 입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애플파이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오물오물!
그런데 먹고 보니 애플파이가 정말 맛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대한의 이런 모습에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환하게 피어나는 그녀의 웃음!
일순 제과점 안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모습에 부러움과 질투로 애간장이 타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라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대한의 입가에 묻은 애플파이 조각을 손가락으로 닦아 자신의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엄지를 쪽쪽 빠는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걸 왜 먹어? 저기도 많은데.”
“그래도 이게 더 맛있어요.”
“그럼 내가 맛있다는 뜻이잖아?”
“크크크, 네.”
색드립이 아닌데 뭔가 색드립처럼 느껴졌다.
대한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자 엘라가 냉큼 다가와 그의 품에 꼭 안겼다.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냥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요.”
“보지 마.”
“왜요?”
“닳아.”
“치이.”
“진짜야. 정 보려면 돈 내고 봐.”
“얼마 낼까요?”
“난 좀 비싸.”
“그래서 얼마나 내면 되는데요?”
“1억!”
“에게 겨우!”
대한의 말에 엘라는 잔뜩 비웃음을 지었다.
“난 또 한 1억 달러는 내라고 하는 줄 알았네요.”
“그럼 더 좋고.”
“됐어요. 나도 그냥 퉁 칠게요.”
“뭐로?”
“오빠도 나 보니까 그걸로 쌤쌤해요.”
“하아! 이거 내가 손해인데.”
“제가 더 손해에요.”
“아냐. 내가 손해야.”
둘은 서로가 손해라고 우겨댔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던 사람들은 배가 아파 속으로 이를 갈았다.
부럽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질투가 솟구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도 저런 멋진 미남, 혹은 미녀와 같이 꽁냥꽁냥 예쁜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대한과 엘라는 이렇게 제과점 안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올킬한 후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제과점 안의 모든 테이블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제과점은 다음 날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원래 자리가 좋아 잘되는 집이었지만 이제는 미어터질 정도가 됐다.
하지만 단 한 번만이라도 그들을 더 보고 싶어 하던 이들의 소망은 결단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여기저기서 살찌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대한과 엘라의 첫 번째 나들이가 끝났다.
* * *
대한타워 펜트하우스.
“어때요?”
“좋은데.”
엘라가 직접 내려준 커피는 맛있었다.
사실 커피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손수 내린 커피라서 더 맛있는 것이다.
“이리 앉아.”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엘라는 에바였을 때처럼 서서 브리핑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그녀는 좋다고 달려와 그가 앉은 소파 옆자리를 차지했다.
“앞으로는 같이 앉아서 하자.”
“네.”
대한의 말에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엘라의 얼굴은 환한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좋아?”
“네.”
“그렇게 좋아?”
“네.”
좋냐고 묻는데 싫다고 대답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좋아했다.
둘 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브리핑은 누가 해요?”
“굳이 브리핑이 필요할까?”
“음, 아무래도 피드백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럼 아무나 세워!”
“네.”
그의 대답에 엘라는 바로 반응했다.
또각또각!
대한은 발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에바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급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에바가 움직이고 있는데도 엘라는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에바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어요.”
“에바가 움직여도 괜찮아? 엘라에게 무리가 오는 거 아니야?”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요.”
어떤 시스템으로 엘라가 에바를 움직이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냥 봐도 다중작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불안 불안했다.
“혹시 이것 때문에 매일 캡슐에 들어가는 거야?”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제 몸이 캡슐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 100% 안정화 작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 안정화 작업이라는 게 언제 끝나?”
“곧 끝나요.”
에바라면 절대 이런 애매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에바와 엘라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다.
“마스터! 제가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에바가 허락을 구하자 대한은 잠시 한발 물러선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소파에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팔짱을 끼고 에바를 쳐다보자 엘라가 바짝 다가와 몸을 기댔다.
뭉클!
그녀의 부드럽고 따스한 여체의 온기가 바짝 날이 서려는 그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이기 시작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에바 그대로입니다. 기능의 90% 이상을 전과 같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으음.”
대한은 에바의 말에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솔직히 에바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엘라를 걱정하는 거다.
아무리 전과 동일한 에바의 모습이지만 본질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에바가 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에바는 그대로이고. 엘라만 에바를 초월해 새로 태어났다고 봐야 하나. 이거 참 상황이 난처하군.’
에바가 엘라가 됐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 편했다.
그런데 이미 정리한 입장을 다시 바꾸려니 약간의 혼란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감정처리의 영역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에바를 제 아바타의 하나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편하잖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겠다.”
엘라가 에바에 대한 정의를 대신 내려줬다.
대한은 그녀의 말에 전격 동의하며 빠르게 마음속 교통정리를 끝냈다.
이제부터 에바는 엘라의 분신이자 아바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난 하나만 하기도 어려운데, 엘라는 에바까지 통제하는 게 가능한가 봐!”
“뭐라고 딱히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에요.”
“혹시 엘라의 머리에 피코셀이라도 심어놓았어?”
“당연히 오빠처럼 제 몸에도 피코셀이 있어요. 그리고 에바와도 실시간 소통할 수 있는 장치도 부착되어 있고요.”
“서로 멀리 떨어지면 통신 안되는 거 아니겠지?”
“최소한 지구 안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어요.”
엘라는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대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에바를 쳐다봤다.
똘망똘망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 익숙했다.
“에바! 시작하자.”
“예, 마스터.”
그의 명령에 에바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엘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마치 에바가 둘로 나뉘어져 분화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에바의 본질이 안드로이드, 엘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자 복잡한 심사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갔다.
“홀로그램을 보면서 보고 드릴게요.”
에바는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우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홀로그램은 현재 북한의 상황을 한눈에 나타내고 있었다.
“이건 뭐 거의 패닉 상태로군.”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코레실드의 최정예 요원들과 대한민국 특수부대원들의 합작으로 비밀리에 북한 핵기지로 침투해 핵탄두와 생화학무기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에바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북한의 핵 개발 연구소와 핵무기 생산시설, 생화학무기 연구소 및 화학 공장까지 완벽하게 초토화된 것을 목격했다.
대한이 알고 싶은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 북한의 실체적인 상황이었다.
의문의 눈빛을 맞이한 에바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평양에서는 사고가 난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핵기지로 병력을 급파했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핵탄두는 사라지고 없고 핵기지는 붕괴하여 지하로 매몰되어 버렸죠. 연구소와 생산시설 및 공장들까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박살이 나자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정도는 우리도 이미 충분히 예상한 범위였잖아.”
“네. 하지만 북한에 대한 공작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따라 홀로그램 몇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대한은 홀로그램을 빠르게 훑어보면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현재 다방면으로 북한 정권이 붕괴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회유와 포섭은 기본이고 그들이 가진 야망을 부추겨 쿠데타를 부추기고 있어요. 특히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친중 공산당 고위간부와 군사령관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숙청시키고 있습니다.”
“주석궁에서 고심이 깊어지겠군.”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에바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수십 년간 공을 들여왔던 핵무기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그 충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정신을 차리고 대안을 모색할 거예요.”
“설마 그 대안이 중국이라는 소리야?”
“그렇습니다. 지정학적 위치를 떠나 당장 중국이 지원을 끊으면 북한은 정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잠시는 모르지만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무너지고 말 거예요.”
“중국은 북한이 그렇게까지 되는 걸 바라진 않을 거야. 물론 남북한이 통일하는 그림도 원치 않을 테고.”
“그러기에 중국의 반발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북한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절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어떻게? 참수 작전이라도 하라고?”
“물론 그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스스로 무너지게 유도하는 것이 더 좋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습니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다. 그러다가 내전으로 치닫는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저희가 알아서 잘 조절해야죠.”
“중국과는 멀어지고 대한민국에 의존하게 만들어야겠군.”
“그게 정답입니다.”
일본과 러시아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발전한 역량을 고려하면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동맹국인 미국이 나서서 초를 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미국에선 아무 소식 없어?”
“당연히 의심하고 있죠. 하지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입니다.”
“혹시 미국의 정찰위성을 해킹이라도 한 거야?”
“그것을 포함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현재 미국의 정보망을 교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안에 북한에서 큰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챌 겁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북한이나 중국이 어떻게 나올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미국이 딴지를 걸지 않을까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핵연료 재처리시설 반대, 미사일 사거리 제한, 주한미군 주둔비 5배 이상 인상, 불공정한 소파협정, 무역 규제, 첨단기술 이전 금지 등
언제부턴가 우리가 목을 매는 동맹국 미국은 이렇게 대한민국의 앞길을 가로막는 짓들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다.
한국전쟁(6.25 전쟁) 이후로 미국은 철저히 자국의 국익을 위해 주한미군을 주둔시켰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음으로 양으로 대한민국을 이용해왔다.
심지어는 IMF 사태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IMF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 사실은 미국의 자본가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남한이 공산화가 되지 않도록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지난 70년 동안 미국은 그들이 우리를 도와준 그 이상으로 충분히 이익을 취해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라를 지켜준 고마운 나라로 미국을 계속 빨아줘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우리나라는 자존심도 팽개치고 미국의 졸개처럼 취급받아야만 하는가?
대한민국은 미국에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혈맹이라면, 동맹국이라면!
친구처럼 서로 대등한 관계로 잘 지내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미국은 못 참아 했다.
마치 조선이 사대했던 중국의 명과 청처럼.
그래서 대한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주기로 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너희들이 알고 있던 그 예전의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그는 에바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그건 마스터께서 결정하셔야죠.”
에바의 대답에 대한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러자 옆에서 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