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대놓고 데이트>
대한은 사실 조금 부끄러웠다.
아무리 얼굴에 페이스 인 툴을 끼고 있어도, 그리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매한가지였다.
물론 엘라가 부끄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행동은 좀 사양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런 대한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는 금세 대한의 허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대신 그의 손을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꼭 부여잡았다.
이건 대한도 원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관종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동안 그렇게 카메라 마사지를 받았는데도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니 말이다. 아니면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오빠! 우리 저거 먹으러 가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엘라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뭔가하고 봤더니 푸드트럭에서 파는 ‘와플’이었다.
“와플 먹자고?”
“네.”
그녀는 아이가 아닌데 마치 아이처럼 굴었다.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대한은 흔쾌히 푸드트럭에 다가갔다.
담합이라도 했는지 가격이 어딜 가나 전부 똑같다.
물론 맛도 비슷하다.
대한은 생크림 와플을, 엘라는 블루베리 와플을 선택했다.
5천 원을 내고 와플을 든 채 그들은 강남대로로 접어들었다.
“맛있어요.”
“응, 괜찮네.”
그녀의 입가는 이미 행복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부드러우면서도 아삭한 와플!
달콤한 블루베리 맛에 엘라는 벌써 흠뻑 빠져있었다.
오물거리는 그녀의 붉은 입술 위에 묻은 블루베리.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혀로 살짝 핥아먹었다.
“어우야!”
“뭐야? 왜 그래?”
“봤어.”
“꺄악! 너무해!”
“뭔데?”
“남자가 여자 입에 묻은 거를 핥아먹었어.”
“에이, 난 또.”
“이년아! 그럴 수도 있지. 웬 호들갑이야.”
“저리가 쪽팔리게.”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그걸 또 본 여자들이 있어서 잠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엘라는 그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둘은 인파가 가득한 강남대로를 벗어나 뒤쪽 큰 골목으로 이동했다.
그래 봐야 도긴개긴이었다.
여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나마 이쪽은 자신들처럼 손에 손을 잡은 젊은 연인들이 많았다.
그래도 대한과 엘라는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도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멀리서 봐도 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확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선지 스마트폰을 꺼내 몰래 두 사람의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때아닌 봉변에 큰 곤란을 겪어야 했다.
스텔스 모드로 대한과 엘라의 주위를 물 샐 틈 없이 호위하고 있는 에어볼!
이들이 허락도 받지 않고 도둑 촬영을 하는 자들의 스마트폰을 해킹해 완전히 먹통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일명 공장 초기화다.
이런 비극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강남에선 스마트폰을 먹통으로 만드는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괴담이 돌기도 했다.
물론 그건 괴담이 아니라 반쯤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리 저거 먹어요.”
“핫도그?”
“네.”
이번에는 핫도그 가게를 보고 들어가자고 했다.
아무래도 엘라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은 길거리 음식 탐방이었나보다.
대한은 오늘 식사는 따로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줬다.
그러자 엘라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떡볶이, 어묵, 순대, 짜파구리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거리 음식을 섭력했다.
옆에서 본 그의 결론이 재미있었다.
엘라가 먹방을 하면 진짜 대박 낼 여자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참 맛있게도 잘 먹었다.
“아우! 이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그래서 아까 내가 적당히 먹으라고 했잖아.”
엘라가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통통해진 자신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대한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빨리 영화나 보러 가자. 시간이 다 됐어.”
“네.”
엘라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복합 상영관으로 들어가 영화를 선택하고 커플석을 예매했다.
그렇게 배부르다고 하더니 그녀는 고새를 못 참고 꿀 바른 팝콘과 나초를 주문했다.
큼지막한 콜라까지 들자 이미 한아름이었다.
“그거 다 먹을 수나 있어?”
“그래도 영화 하면 팝콘 아니에요?”
“그럼 나초는?”
“이것도 한번 같이 먹어보려고요.”
“그런데 콜라는 왜 대자로 하나만 샀어.”
“에이, 잘 아시면서.”
엘라는 그를 바라보며 살짝 윙크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녀의 애교!
대한은 순간 무장해제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래. 다 먹어라. 대신 나중에 살쪘다고 울상짓지 말고.”
“헤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극장 안으로 들어가며 엘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피코셀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야?”
“아니요. 저도 이제 슬슬 운동해야죠.”
“무슨 운동? 숨쉬기 운동!”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연히 ‘배틀푸르나’부터 시작해서 ‘나이로비’와 ‘사이러스’를 연마해야죠.”
대한의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배틀푸르나는 당연히 그가 제일 잘 아는 것이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아 엘라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뇌로 다운로드를 해야 한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런데 ‘나이로비’와 ‘사이러스’는 처음 들어봤다.
묻기도 전에 엘라가 그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나이로비와 사이러스는 스파이럴 제국에게 무너진 옛 왕국의 비전 무공과 검법이에요. 여자인 제게 잘 맞고 익히기도 좋아서 선택했어요.”
“운동한다더니 아예 무술가가 되려고 하네.”
“제가 열심히 해야 오빠의 대련 상대가 되죠.”
“뭐야? 정말 나하고 대련하려고 시작하는 거야?”
“네.”
단호한 엘라의 대답에 대한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대련 상대가 없어서 좀 답답하긴 했었다.
그렇다고 전투로봇이나 안드로이드와 드잡이질을 할 수도 없고.
기껏 한다는 것이 히릭스 격납고에서 가상 대련을 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그냥 몸만 쓰면 괜찮은데, 배틀푸르나를 일으키면 즉시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력 없이 주구장창 체술과 검법으로만 대련했다.
하지만 그건 초장 없이 날 회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배틀푸르나는 물론이고, 스파이럴 제국기사단의 비전 무공‘탄탈러스(SS)’와 검법인 ‘크루세이더(SS)’도 마력의 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하나 봐요.”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마침 영화가 시작됐다.
엘라는 좋다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팝콘과 나초를 향했다.
대한은 할 수 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가끔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영화는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던 ‘기생충 같은 년’이었다.
봉 감독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거장으로 만들었고 흥행도 대박이 난 영화였다.
대한은 이미 본 영화지만 엘라를 위해 다시 한번 더 봐야 했다.
그래도 역시 이 영화는 재미있었다.
엘라와 같이 만들 자신의 영화도 이처럼 대박 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아니면 말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냥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면 된다.
인제 와서 대한이 자신의 주력 분야도 아닌 영화의 흥행에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다.
“와아! 결말이 참 의외네요.”
“그래?”
처음 본 영화가 아니라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반지하에 사는 부분은 디테일도 훌륭했다.
대한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예전에 살던 반지하 방이 생각났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퀴퀴한 냄새부터 올라왔다.
정말 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이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거장은 거장이군.’
대한은 마음속으로 봉 감독님을 향해 엄지 척을 선물했다.
“오빠! 우리 영화도 곧 나와요.”
“언제?”
“내일이요.”
“그렇게 빨리?”
“헤헤, 제가 일을 좀 잘하잖아요.”
그녀의 환한 웃음에 그는 허리를 당겨 꼭 껴안아 줬다.
마치 그게 보상이라도 되는 양.
엘라는 더욱 바짝 몸을 붙여 그와의 포옹을 만끽했다.
승강기 앞에서 벌이는 둘의 애정행각!
사방에서 부러운 눈빛들이 폭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이력이 붙은 두 사람은 남의 시선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둘을 근접거리에서 암중으로 경호하고 있는 B1 최강철, B2 강성한, M1 김철수, M2 이영수 등이었다.
이들도 이미 얼굴을 바꿔서 위장한 상태라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덕분에 대한과 엘라는 인파 속에서도 나름 여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어디 갈래?”
“제과점 가요.”
“빵 먹자고?”
“아니요. 케이크요.”
그렇게 말하며 엘라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렸다.
“헐!”
대한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녀가 이끄는 손길에 끌려갔다.
저 날씬한 몸(물론 미드와 힙은 빼고)에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갈까?
전투로봇이나 안드로이드라면 모를까!
엘라는 이제 사람이다.
그러니 분명히 먹는 것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그녀는 무리하게 과식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하루 동안 세상의 온갖 달달한 음식을 다 먹어치우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막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화장실 몇 번 다녀오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둘은 근처에 있는 유명 제과점을 찾았다.
잠시 앉아있자 엘라가 가서 온갖 케이크와 파이를 가져왔다.
커피와 음료수까지 포함된 양은 네 명이 먹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걸 지금 혼자 다 먹겠다고 저러는 것이다.
“아! 맛있다.”
“캐러멜 마키아토에 그렇게 캐러멜을 듬뿍 넣어주는 건 처음 봤네.”
“그래요? 이게 많이 넣어주는 거예요?”
“응. 미국에서는 듬뿍 넣어주는데 한국에서는 쥐똥만큼 넣어준다고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해.”
“그렇구나.”
엘라는 힐끗 계산대를 쳐다봤다.
앳된 얼굴을 한 청년이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에고. 젊은 청춘 하나 또 망가지겠군.’
대한은 선글라스를 벗은 엘라의 눈부신 모습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영화는 그렇다 치고 게임은?”
“게임도 이미 완성해서 클로즈베타에 들어갔어요.”
“클로즈베타는 얼마나 하려고?”
“사흘이요.”
“뭐? 겨우 사흘 가지고 돼?”
“이미 완벽한 게임을 만들어놓았어요. 클로즈베타를 하는 이유는 혹시나 해서 해보는 거예요.”
“으음.”
“사흘간 클로즈베타, 일주일 오픈베타 이후 바로 오픈이에요.”
“그럼 열흘 안에 출시하는 거잖아?”
“맞아요.”
“서류를 준비하는데도 모자라는 시간이겠다.”
“그건 급행료를 내면 돼요. 세상에 안되는 것은 없어요. 물론 되는 것도 없지만.”
엘라의 말은 뭔가 의미심장한 소리였다.
맞다.
이 세상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세상이다.
우린 지금 그런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북한은 좀 어때?”
“조용해요.”
“겉으로만?”
“네, 맞아요.”
엘라의 대답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말을 꺼내고 보니 이런 곳에서 나누기에는 좀 무리한 주제였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안 되겠다.”
“그럼 내일 먹어요. 새털 같은 나날이 남아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그러자. 그럼.”
맞는 소리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엘라는 요새 참 맞는 말만 골라 했다.
바뀐 점이 있다면 하루에 4시간 동안은 반드시 캡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거기서 잠을 자면서 스캔을 하고 몸의 균형을 잡았다.
대한은 그녀와 같이 침대에서 자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둘이 4시간만 자면 되는 건강한 몸이라 다행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인제 뭐 하고 싶어?”
“술을 마시고 싶어요.”
“술?”
갑자기 술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랐다.
“아니 술은 왜?”
“그냥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술자리에 참석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라는 안 돼. 술자리에 갔다가 사고 나기 딱 좋아.”
“그런가요?”
“응. 그래.”
대한이 예언가는 아니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밖으로 돌면 사고가 날 확률이 100%다.
매일 보는 자신도 지금 심장이 떨려 죽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거기에다 술까지 한잔 들어간 사람들이 엘라의 미모를 보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래서 다른 것은 허락해도 술자리는 강하게 마다했다.
“나중에 나하고 마시자.”
“어디서요? 펜트하우스에서요?”
“응. 아니면 모니카 불러서 같이 마시던가.”
“모니카가 좋아할까요?”
“싫다고 하면 둘이 마시면 되지.”
“헤헤, 그것도 좋겠네요.”
하는 짓을 보니, 꼭 술이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술자리에서 웃고 떠는 분위기에 휩쓸려보고 싶은 던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