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그 감동 그대로>
그가 보여줬던, 한 수로 수백 명을 도륙하는 무시무시함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토네이도 같은 은빛의 돌개바람에 적들은 공포에 질려갔다.
적들은 기병이나 전사, 병사를 막론하고 그저 짚단처럼 우수수 무너졌다.
그 기세에 적의 전열이 무너지고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지!
아군의 기사들은 힘차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용사와 레이디가 적을 무찔렀다.”
“돌진! 도망치는 적을 추살하라!”
“적의 전열이 무너졌다. 쓸어버려라!”
의도적인 기사들의 고함에 전사들과 일반 병사들이 함성으로 대답했다.
와아아아!
아군은 적군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거센 노도와 같은 기세가 적들을 뒤덮자 한순간에 전장의 추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이제는 누가 봐도 이 전투의 승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용사 대한! 레이디 모니카! 우리가 이겼습니다.”
“두 분 덕택에 우리가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황실에서 크게 치하하실 겁니다.”
“돌아가면 두 분께 충분한 사례를 하실 겁니다.”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이미 전투에서 이긴 양!
미리부터 이렇게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대한과 모니카는 허공을 향해 롱소드를 세차게 한번 휘둘렀다.
촤악!
후두두두!
롱소드를 붉게 물들였던 핏줄기가 땅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모니카! 수고했어.”
“대한도 정말 멋졌어.”
모니카는 대한을 보자 얼굴을 환하게 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뭐?”
“회오리바람처럼 뱅글뱅글 도는 거 말이야.”
“아! 사이클론 소드!”
모니카는 별거 아니라는 듯 허공을 꾹꾹 눌렀다.
그러자 그의 앞에 투명한 버튼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거기에는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급 기술들이 있었다.
버튼 하나하나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직관적인 입체영상이 들어있었다.
꿈틀대는 영상은 마치 작은 인형이 버튼 안에 들어가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이게 아까 내가 쓴 기술 이름이야.”
“휠 윈드가 사이클론 소드가 됐군.”
“뭐라고?”
“아! 아니야.”
잘 못 들었는지, 모니카가 재차 물었다.
하지만 대한은 딱히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냥 대충 뭉개고 넘어갔다.
대신 그녀가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시야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자신의 시야 한쪽에도 모니카처럼 투명한 버튼들이 보였다.
그걸 손으로 잡아서 당겨왔다.
그러자 그녀가 사용했던 사이클로 소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마스터급 기술들이 대한에게도 나타났다.
“야아! 이거 정말 대단하다.”
“너무 실제 같아서 순간순간마다 깜짝깜짝 놀라!”
모니카의 말에 대한은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전장에서 커다란 승리의 함성이 들려왔다.
둘은 그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어 허공에 예의 그 투명한 글자들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크라켄 계곡 전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시겠습니까?]
대한과 모니카는 재빨리 서로를 쳐다봤다.
눈으로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한 것이다.
그들은 동시에 ‘예’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주변의 모습이 서서히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대신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황궁 연회장이 빠르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오빌라 황궁 무도회장에 오신 두 분을 환영합니다.]
촤라라라! 철컥 철컥!
대한과 모니카는 정신없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풀 플레이트 아머가 벗겨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장이 해제되자 대신 독특하고 화려한 정장과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가 입혀졌다.
딴 따라란 따라란 딴딴딴…….
전장의 참혹함이 먼지처럼 스러지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맛있는 요리 냄새와 신나는 무도회 음악이었다.
눈과 귀 그리고 코가 모두 즐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대한과 모니카는 문뜩 황궁 무도회장 플로어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그는 센스 있게 그녀를 향해 먼저 몸을 숙이며 춤을 청했다.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실까요?”
“좋아요.”
모니카는 환하게 피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대한을 마주 보며 몸을 정중히 숙였다.
그러면서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그 바람에 모니카의 탐스럽고 뽀얀 살덩이 두 개가 적나라하게 눈에 드러났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드레스를 만들 때 무척 천을 아낀 티가 났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모든 것을 잊고 파티에 빠져들었다.
황궁의 전승기념 무도회에 참석한 수많은 귀족과 젊은 남녀 자제들!
다정하게 춤을 추는 대한과 모니카의 모습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오빌라 황궁 무도회장 중앙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
소녀들의 방심처럼 눈 부시게 빛을 산란시키며 흔들리고 있었다.
* * *
“하아!”
“흐음!”
두 개의 각기 다른 감탄사가 나왔다.
물론 그 안에 포함된 감정은 비슷했다.
대한과 모니카는 눈을 뜨고도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영화의 탈을 뒤집어쓴 가상현실 체험!
그들은 그 절절히 이어지는 감동과 감격을 쉬이 떨쳐내지 못했다.
또각 또각 또각!
보다 못한 에바가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눈으로 대한의 상태를 살폈다.
피코셀로 인해 그의 건강상태는 실시간으로 그녀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택했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응, 정말 끝내줬어.”
에바의 말이 무슨 마법이라도 된 양.
대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캡슐에서 천천히 일어나자 에바가 옆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행동에 불과했다.
그는 아주 쌩쌩했다.
오히려 얼굴에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했다.
대한은 슬쩍 모니카를 쳐다보며 에바에게 물었다.
“왜 영화가 이런 거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이걸 말로 설명한다고 쉽게 이해가 되겠어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듣고 보니 에바의 말이 옳았다.
이건 절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고.
백날 귀로 듣는 것보다 그냥 한번 체험하는 게 빠르다.
“모니카! 괜찮아?”
“아흥! 정말 대단했어.”
대한의 물음에 모니카는 야릇한 한숨을 쉬며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모니카는 몸을 살짝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모두 해소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바는 굳이 모니카를 부축해주지 않았다.
대한이 모니카를 향해 다가가려 하자 에바가 불쑥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너무 실제 같아서 자꾸 몸이 떨려.”
“그럼 들어가서 좀 쉬어.”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그의 제안에 모니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니카는 에바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맙다고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게스트룸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여전히 비틀거리고 기우뚱거렸다.
그는 모니카에게 다가가 부축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에바가 슬쩍 그의 행동을 말렸다.
“마스터! 괜찮아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그럼 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지?”
“그거야 마스터의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이죠.”
“내가 정신력이 강하다고?”
“당연하죠. 마스터의 정신력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동안 꾸준히 매일 배틀푸르나(SSS)를 연공 하셨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영혼의 격이 올라가고 정신력이 강해지는 효과가 있어요.”
“아!”
그제야 그는 모니카와는 달리, 자신이 멀쩡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바의 말이 이어졌다.
“거기에 더해 탄탈러스(SSS)와 크루세이더(SSS)까지 꾸준히 연마하셨으니 더욱 심신이 단단해졌을 거예요.”
“혹시 마력도 영향이 있는 거야?”
“마나와 오러, 마력 모두 영혼과 정신력에 일정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뒀던 생각을 꺼냈다.
“에바!”
“네, 마스터.”
“내가 본 영화 말이야.”
“말씀하세요.”
“여기서도 볼 수 있을까?”
개떡 같은 질문을 에바는 참 찰떡처럼 잘 알아들었다.
“마스터께서 느끼신 감동 그대로, 가상현실 같은 체험이 가능하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 이거 정말 괜찮은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네.”
부정적인 그녀의 답변이 대한은 무척 아쉬웠다.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하냐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구에서도 누구나 체험할 수 있게 4D 영화로 만들면 됩니다.”
“아! 그게 있었구나.”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은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뭘 어떻게 해?”
“마스터께서 보신 영화, ‘레전드 오브 포르낙스’를 4D 영화로 바꿀까요?”
“그런데 4D로 바꾸면 4D 전용 상영관이 아니면 체험할 수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대한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4D로 만드는 게 가장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이 편하게 많이 보려면 3D 아니 그냥 일반 영화로 만드는 게 제일 낫다.
“그냥 3D고 4D고 다 만들어. 일반 영화로도 만들고.”
“알겠습니다. 그럼 주인공은 누구로 할까요?”
“주인공을 누구로 하다니?”
에바의 물음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 못 느끼셨습니까? 볼트 행성의 영화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영화를 관람, 아니 체험하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아!”
막상 영화로 만들려고 하자 이런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하지만 에바의 이어지는 말에 문제는 단숨에 해결됐다.
“주인공이 없으면 주인공을 만들면 됩니다. 마침 마스터와 모니카가 영화를 체험하면서 만들어놓은 영상이 있으니 그걸 편집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헐! 뭐야? 그게 가능한 거였어?”
“안될 게 뭐가 있어요? 완전한 체험 데이터가 존재하니 거기에서 소스를 뽑아서 편집해 영상을 만들면 되지요. 3D와 4D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어요.”
꿀꺽!
에바의 거침없는 말에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당장
“주인공은 내가 된다고 치고, 그럼 여주인공은 모니카가 되는 거야?”
“물론이죠. 하지만 굳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얼굴로 바꿔서 내보낼게요.”
“에이 그건 아니지. 그래도 영화를 같이 봤으니까, 이걸 봤다고 하니까 좀 웃기네. 아무튼, 같이 경험했으니까 같이 나가는 게 좋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모니카가 들어간 게스트룸을 쳐다봤다.
“그런데 모니카가 이걸 허락할지 모르겠네.”
“아마 허락할 겁니다. 그녀도 영원히 마피아 보스의 아내라는 오명을 가진 채 살고 싶진 않을 거예요.”
“흐음. 그런 문제도 있었군.”
에바의 말을 듣고 나자 자신이 참 무심한 남자라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텐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는 모니카도 참 대단한 여자였다.
“모니카에게 그런 고민이 있었군.”
“오해하지 마세요. 마스터의 무심함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가끔 이렇게 소름 끼칠 때가 있다.
에바는 마치 대한의 마음속에 들어가 본 것처럼 말을 했다.
“오히려 모니카를 자연스럽게 대해주시는 게 그녀에게는 위로가 됐을 거예요. 이건 제가 모니카에게 직접 들은 말이니 100% 확실합니다.”
대한은 그녀의 말에도 알쏭달쏭했다.
확실히 여심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복잡한 건축물을 착착 잘도 만들어내는 사내들!
그런데 집에만 들어가면 고개 숙인 남자가 된다.
여자의 내심은 건축물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것보다 몇 배, 아니 몇백 배 더 복잡하고 오묘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바의 생각에는 모니카가 여주로 등장하는 것을 찬성할 거라는 말이지?”
“물론이죠. 아니면 말고요.”
대한이 모니카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과는 달리.
에바는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꽤 냉정하게 대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일은 에바에게 맡기는 게 좋았다.
“그러다 만약 에바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대신 제 얼굴이라도 내보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와! 정말?”
그가 매우 놀란 척하자 에바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왜? 그게 잘 구별이 안 돼?”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겠네요. 제가 방금 모니터에게 물어봐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에바가 모니카에게 피코셀을 심었다는 것을 깜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