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재벌 한번 되어볼까!>
대한타워 펜트하우스.
톡톡톡!
대한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가끔 고민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는 버릇이었다.
“…그래서 마스터께서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에바의 긴 설명이 끝나자 그도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다.
“그러니까 국내의 재벌들을 비롯해 세계의 다국적기업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말이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스터를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난히 ‘과소평가’라는 말을 강조했다.
의전이나 대우, 관계 등
어떤 점이 에바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모른다.
그저 자신의 마스터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게 싫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대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조용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은 그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는다.
대한은 이미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 스타이자 유명인사였다.
거목은 그저 서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바람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 수밖에 없는 이치다.
“이왕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야겠네.”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이번 기회에 마스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세요.”
에바의 목소리 톤은 일정했다.
그런데 왠지 날카로운 칼을 갈고 있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을 받게 했다.
“에바, 우리와 가장 부딪치는 기업이 어디야?”
“여러 가지로 피곤하고 짜증 나게 구는 데가 두 곳 있습니다.”
대한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바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미 어떤 모종의 계획이 서 있는 것이다.
“어딘데?”
“마스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일단 국내에서 두 곳을 선정했습니다.”
“재벌이야?”
“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분류한 그룹입니다.”
“흐음, 아무래도 재벌순위가 좀 높은 모양이군.”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확실히 덩치가 큰 그룹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에바의 말에 대한은 눈을 빛냈다.
“제가 선정한 곳은 자산총액 기준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 5위의 로터리 그룹과 13위 한양그룹입니다.”
쿵!
그는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 듯했다.
설마 10위권 안팎의 재벌들이 에바의 레이더에 잡힐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일본계 자금으로 세워진 재계 순위 5위의 로터리 그룹이라니…….
그렇다고 13위의 한양그룹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국적기인 한양항공이 바로 한양그룹의 자회사다.
그것만 봐도 한양그룹이 얼마나 큰 기업집단인지 알 수 있었다.
“로터리 그룹은 자산총액이 120조가 넘고, 한양그룹은 자산총액이 32조나 되네.”
“우리에게 있어 자산총액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거액의 자금을 동원해 정면 대결을 펼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수가 있습니다.”
에바의 말이 옳다.
대한은 절로 자신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막대한 자금이 있다.
그러나 굳이 거액을 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두 그룹을 흔들어 놓을 방법이 존재했다.
“아시다시피 로터리 그룹과 한양그룹은 다들 인정하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답지 않게 잣은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행사가 더럽고 치졸하다는 것이죠.”
“우리와도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물론입니다. 한양항공 같은 경우, 우리가 기술 지원해서 국방과학연구소와 같이 개발한 다목적 드론이 실전 배치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로비를 벌였습니다.”
“이유가 뭐지?”
“한양항공에서도 드론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든 드론의 성능은 좀 어때?”
확실히 드론의 성능이 중요했다.
그건 미군이 자랑하는 글로벌호크나 프로데터를 보면 금세 알 수 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에는 비교하기 힘들고, 아직까진 중국이 개발한 스텔스 드론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그럼 우리와는 아예 상대도 되지 않겠군.”
대한의 말에 에바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죠. 그런데 그걸 뒤에서 중상모략과 로비로 뒤집어엎으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온갖 더러운 방법까지 동원해서 말이죠.”
“국방과학연구소와 방사청도 이에 동조했어?”
만약 그랬다면, 그도 중대한 결심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의 대답이 국방과학연구소와 방사청을 살렸다.
“그렇진 않아요. 사실 이번에 실전 배치된 저희 드론은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지해줬습니다. 그들로썬 비교조차 민망한 수준인 한양항공의 드론이 우리의 드론 대신 채택되는 사태를 눈 뜨고 멍하니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거죠.”
“그럼 방사청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이제 대한의 식견도 무척 날카로워졌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내다본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어딜 가나 고춧가루 하나씩은 있는 법이잖아요?”
“그렇지. 그래도 그 고춧가루는 제거해야겠지.”
“각종 비리와 부정으로 이미 감사원과 검찰에서 조사가 들어갔습니다.”
대한에게 보고할 정도면 에바가 이미 어느 정도 선(先) 조치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들을 살폈다.
“그런데 로터리 그룹은 뭐가 문제야? 주력 사업이 식품과 유통 아니야? 아! 호텔과 멀티 플렉스 영화관도 있구나.”
“로터리 그룹은 쇼핑, 음료, 푸드, 제과, 유통 등이 메인이지만 건설과 정밀화학 같은 자회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엔터테인먼트와 화학은 저희 코레 그룹과 자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로터리 그룹의 지주회사인 로터리지주는 위로 3단계에 걸쳐 올라가면 일본의 광윤사가 지배하고 있죠.”
에바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대한은 홀로그램 하나를 잡아 확대했다.
그러자 로터리 그룹의 지분구조와 지배세력이 어딘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의 광윤사가 일본로터리홀딩스의 지분을 30% 가지고 있고, 일본로터리홀딩스는 로터리 호텔의 지분을 20% 가지고 있군.”
“로터리 호텔은 로터리지주의 지분을 7% 가지고 있죠. 또한, 로터리 알미늄이란 회사를 통해 로터리지주의 지분을 6.5% 더 가지고 있어요.”
“식품과 유통은 확실히 로터리지주 아래에 있어. 그런데 건설과 물산, 정밀화학과 손해보험 등 자회사는 로터리호텔에서 20%에서 최대 45%까지 지분을 가지고 있네.”
“그것만 봐도 지금 로터리 그룹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 당장 눈에 잡히지 않는 일본의 사모펀드나 투자회사 및 역외펀드들까지 합치면…….”
“호오! 난공불락이로군.”
그는 불연히 로터리 그룹의 인수합병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자금이 들어와서 그런지.
지주회사를 비롯한 각 자회사의 지분율이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이런 회사를 흔들려면 과연 얼마나 자금을 투자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에바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아무리 로터리 그룹이 철옹성이라고 해도 틈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지분구조가 탄탄할수록 무너질 때는 걷잡을 수가 없는 법이죠.”
“방안이 있다면 얘기해봐!”
대한은 말을 하고 나자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벽이 통째로 탁 트인 것 같은 창문을 통해…….
강남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올리자 서울의 푸른 하늘이 시리게 망막을 자극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들었다.
광고를 찍으러 괌에 다녀왔던 생각이 문득 난 것이다.
‘새롬은 잘 지내고 있겠지.’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수확은 광고수익이 아니다.
바로 한새롬의 재발견이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둘째치고, 겉보기와는 달리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그녀!
참 맛있…… 크흠! 멋있는 여자였다.
왜 진작 새롬과 더 친해지지 못했는지 좀 억울하기까지 했다.
꿀꺽꿀꺽!
에바는 대한이 잠시 사색에 빠지자.
그가 컵을 들어 물을 마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대한이 고개를 돌려 이내 자신을 쳐다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정식으로 인수합병 공고를 내는 겁니다.”
“정면돌파를 하겠다?”
“네, 그렇습니다. 자금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너무 출혈이 크지 않겠어?”
정면돌파라는 단어는 좋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무리하게 자금을 운영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 에바는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두 번째는 로터리 그룹과 한양그룹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사안을 노려볼까 합니다.”
“아! 형제의 난이군.”
“맞습니다. 양쪽에서 공통으로 겪고 있는 것이 잦은 구설과 형제자매의 난이죠.”
어디를 가나 경영권분쟁은 있게 마련이다.
재계 순위 1위, 2위를 다투는 대기업들도 이건 피해갈 수 없는 숙명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의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치열한 것은 둘째치고 아주 지저분했다.
덕분에 에바가 이렇게 자신 있게 그 틈을 파고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말의 뉘앙스 상, 세 번째 방안도 있는 모양이네.”
“그렇습니다. 바로 광윤사 같은 뒤에 숨어 있는 대주주를 공략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이 지주회사의 지분을 쉽게 내어줄까?”
“그거야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특히 로터리 그룹은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사서 지분율을 올리려고 하면 끝도 없습니다.”
“으음.”
대한은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첫 번째 안은 기각!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안은 동시에 시도해보자.”
“예스, 마스터.”
“우리가 강도도 아니고 무조건 빼앗는 건 옳지 못해. 제값은 꼭 치르도록 해!”
“물론이죠. 그렇다고 마냥 호구 짓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낄 수 있는 돈은 아끼고 절약할 건 절약해야죠.”
“하긴 그냥 달라고 하면 절대 내놓은 놈들이 아니야.”
“무조건 내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 거예요.”
에바는 대답하면서 곧바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한과 상의를 하기 전.
이미 시나리오는 완성되어있었다.
남은 것은 대한의 의지와 명령뿐이었다.
한국과 일본 양쪽으로, 로터리 그룹에 관한 부정과 비리가 일제히 매스컴에 폭로되었다.
특히 로터리 그룹의 회장직을 놓고 다투는 신일주와 신이빈 형제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어서 로터리 그룹이 그동안 행한 온갖 악행과 비리가 연일 터져 나왔다.
이렇게 되자 로터리 그룹 안에서도 내부고발자와 익명의 증거자료들이 쏟아지며 일반에 공개됐다.
그러자 당장 로터리 그룹의 모든 자회사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이건 한양그룹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한양그룹은 치열한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창업주의 손자와 손녀가 한양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 누이와 어머니까지 합세했다.
이합집산에 이어 이제는 이전투구의 양상까지 나타난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와중에 한양그룹의 지주회사인 한양칼의 지분 30%를 가지고 있는…….
이들 네 명의 부정과 비리 그리고 각종 갑질 동영상이 차례로 터져 나왔다.
수준이 바닥인 것은 물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탈감을 자아내게 하는 막장 동영상들이었다.
한양그룹의 지주회사, 한양칼은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이게 처음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
벌써 몇 차례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 쪽이란 쪽은 다 팔린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대응이 신속하지가 않았다.
더구나 이번 사태는 예전과 달리 아주 정확하고 구체적이었다.
덕분에 한양그룹의 전 계열사 주가는 연일 동시 폭락을 거듭했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그동안 조한태 회장 등
일부 특수관계인들에 의해 한양그룹의 경영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 둔 대주주와 소액주주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매일 주가가 하한가를 치면서 곤두박질치는데 그걸 좋아할 주주는 세상에 없다.
한동안 대한민국은 로터리 그룹과 한양그룹으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당연히 에바는 이 사태를 교묘히 주도하며 양쪽 그룹의 핵심 기업의 지분을 은밀히 긁어모았다.
주가가 오르지 않게 조금씩 긁어모으느라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그러나 워낙 자금이 풍부해서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로터리 그룹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광윤사와 일본로터리홀딩스였다.
그래도 에바의 공작으로 인해.
광윤사와 일본로터리홀딩스 내부에서도 모르게 균열이 일어났다.
아주 은밀하게, 이들의 지분이 역외펀드와 사모펀드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일본인에다 얼굴만 봐도 잘 아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혹할만한 제안을 하자 의외로 쉽게 넘어갔다.
물론 광윤사와 일본로터리홀딩스의 모든 대주주가 지분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분을 넘기는 걸 거부한 이들은 예외 없이 심한 자금압박과 유동성 위기를 맞이했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이게 모두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소행으로만 알았다.
꾹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최후의 순간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다행히 지분에 관한 대가는 확실하게 받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양쪽에서 지분을 확보하는 수법으로.
로터리 그룹과 한양그룹의 지배구조가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게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은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