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그들이 원하는 것>
“어디죠? 록히드마틴, 보잉, 노스럽 그루먼 아니면 레이시온인가요?”
“으음.”
존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렇게 대놓고 적나라하게 물어오니 아무리 얼굴 가죽이 두꺼운 천하의 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바는 그의 심박 수와 생체반응을 보고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마스터, 아무래도 반응이 이상합니다.
‘왜?’
―미국의 군산복합체들이 모두 대동단결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반응이 그렇게 나와?’
―예.
존이 어떻게 이 사태를 풀어갈까 고민하는 사이!
대한과 에바도 열심히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대한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멍 때리고 있었다.
대신 에바는 존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대응하는 모양새였다.
누가 봐도 협상의 대상은 에바이고 대한은 이번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습니다만. 미국 정부와 기업은 이대한 선수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참 교묘한 말투였다.
어떻게든 미국 정부를 끌어들이고, 군산복합체를 미국 기업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 애절한 노력에 에바도 일단은 그냥 넘어갔다.
“그렇군요. 이대한 선수도 당연히 미국 정부와 기업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스포츠업체와 계약을 하고 이곳 괌에 와서 광고 촬영도 하는 겁니다.”
“제 말뜻은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긴밀한 관계를 원한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에바는 존을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자 존도 더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의 상대는 코레 그룹입니다.”
그녀는 존 러시 차관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본론을 꺼내는 것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코레 그룹과의 관계는 코레 그룹과 하셔야지요.”
“이대한 선수와 코레 그룹이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왔습니다.”
“긴밀한 관계가 맞습니다.”
“아!”
에바가 대놓고 인정하자 존이 오히려 놀라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우리 이대한 선수가 코레 그룹에 투자했으니 당연히 긴밀한 관계가 아니고 뭐겠어요?”
“그 정도가 아닐 텐데요.”
존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바는 그게 블러핑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모든 진실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면 지금 에바를 상대로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오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번지수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봤자 에바에게는 아예 통하지 않았다.
“뭐 그쪽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희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코레 그룹의 회장과 미팅을 주선해주세요.”
“그걸 왜 여기 와서 요구하는 거죠? 코레 그룹의 회장과 만나고 싶으시면 직접 코레 그룹 회장 비서실에 연락하세요. 저희한테 이러지 마시고요.”
그녀는 대놓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냉정하게 거절을 당하자 존은 불쌍한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이미 몇 번이나 연락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전부 거절당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코레 그룹도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인데 어떻게 만남을 거절하겠어요. 분명히 뭔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아니면 오늘처럼 목적이 불분명한 쓸데없는 미팅을 요청해서 그렇다던가.”
“아!”
존 러시는 에바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들의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코레 그룹 회장과 미팅을 요청한 것은 전부 정부 쪽 라인이었다.
차라리 무기나 부품의 수입 또는 합작 생산 같은 안건이었다면.
아마 코레 그룹도 미팅을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코레 그룹의 의도가 분명해졌다.
돈이 되지 않는 미팅이나 부담스러운 미팅은 애초에 하지 않겠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코레 그룹에 한마디만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연락을 할 테니 서로 만나서 의논 좀 하자고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저희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참고로 괜히 코레 그룹에 압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마세요. 저희가 알기로 그쪽 회장님이 꽤 강단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럼 에바도 코레 그룹의 회장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는 겁니까?”
“저 같은 비서가 무슨 힘이 있어서 코레 그룹의 회장을 만나겠어요?”
“아! 그럼 이대한 선수는?”
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한이 입을 열었다.
“저도 아직 못 만나봤습니다. 그런데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부담스러운 사람을 만나서 뭐하겠습니까?”
대한의 대답에 존 러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대한과 만난 것은 전혀 소득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코레 그룹과 접촉할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부가적으로 이대한을 통해 코레 그룹에 자신들의 의사를 전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이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소통을 할 통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루자 존의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혹시 미국에 방문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안 그래도 한번 가보려고요. 할리우드와 뉴욕을 구경하고 그랜드 캐니언이나 나이아가라폭포에도 가볼 생각입니다.”
“그럼 들어오시기 전에 저에게 연락해주십시오. 제가 최고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한은 존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정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연락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거절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코레 그룹에만 투자하지 마시고 우리 미국에도 좀 투자해주세요. 알면 알수록 미국이야말로 정말 투자할 곳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도 넉넉한 주급을 받게 되었으니 살림이 좀 피게 생겼거든요.”
“그게 무슨 약한 소리입니까? 대한TV로 떼돈을 벌고 있다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게 그렇게 되나요? 하하하!”
전혀 웃음을 타이밍이 아닌데도 존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한은 그가 하는 짓이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무안할까 봐 억지로 같이 웃어줬다.
에바만 옆에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존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은 이대한 선수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시면 언제든 미국시민권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제게 미국시민권을 준다고요?”
“네, 미국시민권을 받으면 앞으로 사업을 하거나 운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아! 네에.”
대한은 갑작스러운 존의 제안에 그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 대한민국도 국력이 신장해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환영을 받는다.
오히려 미국을 싫어하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같은 나라까지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
거기에다 세계 최고의 의료시스템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국민건강보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 국적이야말로 미국시민권보다 오히려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쨌든 굳이 눈앞에서 거절해서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대한도 이제 원투데이 사는 게 아니었다.
얼마든지 이쯤은 두리뭉실 잘 넘어갈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에바는 인제 날카롭게 굴지 않았다.
목적한 것을 어느 정도 이룬 존도 나름 만족한 표정이었다.
대한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국무부 차관과 굳이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아쉽네요. 조금만 시간이 더 흘렀다면 10만 파운드 다시 받아낼 수 있었는데.”
“하하하! 예쁜 입술로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왜요? 제가 못할 말 했나요?”
“아닙니다. 정말 그랬다면 저도 페널티를 지불했을 겁니다.”
존은 에바의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 받아넘겼다.
날이 서 있지 않는 말이었다.
농담으로 치부하면 전혀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대한과 에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도 눈치를 보면서 덩달아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자주 뵀으며 좋겠네요.”
“저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대한은 존 러시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급 10만 파운드 알바는 자신도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그런 뜻으로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존도 대한의 말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늘 주신 조언은 잊지 않겠습니다.”
“천만에요. 아까 약속한 대로 코레 그룹에 메시지를 전하겠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저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설사 일이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원망은 말아주세요.”
“원망이라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도와주신다는 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존은 가만히 두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할 사람이었다.
대한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했지 도와준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존은 아주 교묘하게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말과 행동이 아주 몸에 붙어 있었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에바였지만.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존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 네. 곧 다시 만나요.”
“잘 가세요.”
에바는 냉정하게 인사를 하며 내보냈다.
덜컹!
마침 기다렸다는 듯 최강철이 문을 열었다.
존은 떠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미팅룸에서 물러났다.
그는 가면서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고 손을 흔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한과 에바는 굳이 그런 존을 배웅하지 않았다.
쿵!
문이 닫히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의도를 숨기려고 무지 애를 쓰네요.”
“그래도 좋아하는 것 같지?”
“네, 코레 그룹과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맺어서 꿀을 빨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대한과 에바는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냈을까?”
“제 생각에는 미국 군산복합체들이 모두 힘을 합한 것 같아요.”
“일단 코레 그룹과 안면을 튼 후에 각자 따로 로비하려는 거군.”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세계에서 가장 무기를 많이 사고 쓰는 나라는 천조국(미국)이었다.
“적당히 받아주면서 이득을 얻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하면 기술이 넘어갈 우려가 있습니다.”
“기술을 넘기지 않고 적당하게 이득을 취하면 되잖아.”
“말이 쉽지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에바가 잘 상대해야지.”
“치잇!”
대한의 말에 에바가 살짝 볼을 부풀렸다.
나름 불만을 표시한다고 하는 짓인데.
그에게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우리도 그만 돌아가자.”
“네, 마스터.”
대한이 움직이자 에바가 즉각 옆으로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팅 룸을 나섰다.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만 하자.”
“네, 어차피 더는 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럼 새롬이와 같이 수영이나 하러 가야겠다.”
“좋은 생각이에요.”
운동은 언제나 옳다.
놀아도 운동을 하면서 노는 것이 좋다.
사람은 움직여야지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난다.
그런 사실에 따라 에바는 대한이 몸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설사 미녀들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대한!”
“새롬!”
스위트룸에 돌아오자 새롬이 토끼처럼 깡충 뛰어왔다.
대한이 두 팔을 펼치자 그녀는 냉큼 품에 안겨들었다.
물컹! 폭신! 아늑! 안도!
여러 가지 복합된 촉감과 감정이 휘몰아쳤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뱅글뱅글 제자리를 돌았다.
“호호호호!”
새롬은 그게 재미있었는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어지럽다며 내려달라고 했다.
둘은 손을 잡고 베란다로 갔다.
거기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온갖 열대과일과 음료수가 가득했다.
잠시 대한은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열대과일을 나눠 먹었다.
시원한 레모네이드도 나눠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회가 동하면 손을 잡고 침실로 갔다.
뜨겁게 사랑을 불태우다가 장난을 치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우리 수영하러 갈까?”
“좋아.”
샤워를 마친 두 사람은 수영을 가기로 했다.
대한은 검은색 사각 수영복을 입었다.
그러자 새롬은 살짝 투명한 하얀 비키니로 무장(?)했다.
“어우야!”
“헤헤! 너무 야한가?”
새롬이 혀를 날름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