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만재능(Feat. 대한 TV)-264화 (263/331)

264화 <아름다운 바다>

“일정이 빡빡해서 오랜 시간을 내드릴 순 없어요. 찾아온 이유도 불분명하시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시간을 넉넉히 내주신다면 근사한 파티라도 열 생각이 있습니다.”

“그건 이쪽에서 사양하고 싶군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가 묵는 힐튼 호텔에서 보죠. 30분 드릴게요.”

“한 시간으로 하죠.”

“우리 이대한 선수에게 시간은 곧 돈입니다. 혹시 대가를 지불하실 생각인가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 러시 차관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잠시 생각하는 척하던 에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한 시간 내드리죠. 올 때 10만 파운드 현찰로 가지고 오세요.”

“네? 정말 돈을 가지고 오란 말입니까?”

“그럼 제가 지금 미국 국무부 차관에게 농담이나 하겠어요?”

에바는 화라도 난 것처럼 아미를 찡그렸다.

존 러시는 이에 놀라 다급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일정 확인하고 만날 시간은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또각 또각 또각!

에바는 그 말을 끝으로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듯한, 아주 싸늘하고 매정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풍요로운 엉덩이가 좌우로 씰룩거리자 다들 그걸 구경하면서 입맛을 다셔야 했다.

특히 존 러시 차관은 넋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시작부터 한 방 먹었네. 그래도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은 것은 역시 미인이라서 그렇겠지!”

존 러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 굳이 이렇게 공항에 나와 얼굴도장을 찍은 목적은 이미 달성하고도 남았다.

원래 인간관계는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자주 보고 마주치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 러시는 대한과의 만남을… 아니, 에바와의 대면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괌 공항 입국장은 인파로 붐볐다.

어디서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입국장에는 대한의 팬들이 왕창 몰려와 있었다.

“어휴! 밖을 나가기가 무서워진다.”

“별소리를 다 하네. 경호원들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살짝 긴장한 새롬의 어깨를 대한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설마 대한의 팬들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하겠어.”

“올! 패기 지린다.”

그는 새롬을 향해 엄지 척을 선물하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러자 그녀도 급히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꺼내썼다.

와아아아!

입국장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괌 공항경비대도 이미 총출동한 상태.

그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반대로 대한을 보러 나온 팬들은 아주 신이 나서 제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대한 오빠!”

“꺄악! 너무 좋아.”

“여기 좀 봐줘요.”

“어머나! 대한이다.”

“나 어떻게 해! 정말 대한이야!”

“이대한 선수!”

“대한 오빠! 사랑해요.”

“I love you, 대한!”

대한과 새롬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최강철, 강성한, 김철수, 이영수가 경호원답게 사방으로 각 잡고 포진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입국장 좌우로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청년들이 수십 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모두 코레 실드의 대원들이었다.

파파파파팟!

눈부신 카메라 플래시가 끝없이 터졌다.

군중은 선글라스를 낀 대한과 새롬을 주목하며 열광했다.

어느새 국내외 기자들까지 나타나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한과 새롬은 연신 팬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웃음으로 그들의 이런 환영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둘은 꾸준히 움직여 공항 바깥으로 향했다.

코레 실드와 괌 공항경비대의 덕분인지.

그들은 무사히 공항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대한은 괌에서 기자회견 따위는 열지 않았다.

공식적인 방문도 아니고 광고를 찍으려는 사적인 목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도로에는 이미 에바가 대기 시켜놓은 방탄차 3대나 얌전히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과 새롬은 팬들을 향해 손을 크게 한번 흔들어주고 차에 올랐다.

부릉 부릉 부우우웅!

방탄차는 무정하게도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숙소인 힐튼 호텔을 향해 질주했다.

괌은 면적이 549km², 인구는 17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워낙 섬이 작아서 얼마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버렸다.

“어서 오세요!”

“벌써 오셨네요.”

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젊은 남녀가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미리 와있던 광고회사의 직원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대한과 새롬을 반갑게 맞으며 일정표를 건네줬다.

슬쩍 살펴보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촬영이 있었다.

“그럼 내일 아침 6시에 뵙죠.”

“네, 늦으면 촬영에 지장이 있으니까 꼭 시간에 맞춰서 나와주세요.”

“알겠어요.”

그들은 이번 광고에 사활을 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방은 준비됐나요?”

“네에?”

새롬이 방을 물어보자 갑자기 남녀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대한은 그 모습에 보더니 웃으면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 메인타워의 스위트룸을 얻어준다고 해서 그냥 돈으로 달라고 했어. 대신 내가 프리미어타워 옆에 있는 더 타시에다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 2개를 빌려놓았어.”

“아! 그래.”

새롬은 그의 말을 듣더니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과연 대한이 어떤 곳을 준비했는지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광고회사 직원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대한은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대한과 새롬의 짐은 굳이 벨보이를 시키지 않았다.

건강하고 돈 들지 않는 힘 센 경호원들이 끌고 왔다.

남자인 그는 여행용 가방 하나.

여자인 새롬은 여행용 가방이 무려 3개나 됐다.

그것도 풀사이즈의 초대형 여행용 가방이었다.

어쨌든 대한과 새롬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메인타워를 나왔다.

프리머어타워를 가로질러 바닷가 바로 앞에 세워진 더 타시에 도착했다.

그때 새롬이 돌연 양팔을 좌우로 활짝 벌렸다.

“우아아! 시원한 바닷바람!”

그도 괜히 새롬을 한번 따라 해봤다.

“정말 무더우면서도 시원하네.”

양팔을 벌리고 눈을 지그시 감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둘은 잠시 그렇게 바람과 소통했다.

그러다 객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에 단 2개만 존재하는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

대한이 예약할 때 그냥 둘 다 해버렸다.

그래도 경호원들이 머물 자리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3층을 통째로 빌려 머물기로 했다.

넓이가 97㎡에 달하는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

그것도 베란다 바깥으로 바로 바다가 펼쳐진 오션뷰였다.

깔끔하게 일직선으로 그어진 수평선의 모습이 뭔가 근사했다.

그냥 바다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려버릴 것만 같았다.

“아! 좋다.”

“다행이네. 방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둘이 지내기는 너무 큰 거 아냐?”

“넓어도 어떡하겠어? 같이 지내더라도 일단 방은 따로 잡아야지.”

“아차!”

새롬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 대 툭 쳤다.

이렇게 넓고 고급스러운 스위트룸을 빌리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대한과 에바는 이런 세심한 부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스캔들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데 그래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어야지. 괜히 어설프게 약점을 보이면 개나 소나 다 물어뜯으려고 들 거야.”

“나 때문에 대한이 고생하네.”

새롬은 좀 미안했는지 대한에게 폭 안겨 왔다.

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차라리 새롬이 낫지. 다른 여배우나 모델이었다면 내가 얼마나 불편했겠어.”

물론 이건 뻥, 아니 립서비스다.

아마 그건 그 나름대로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그래도 대한은 새롬에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걸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무한긍정의 표상이 되어갔다.

“그건 그래.”

좋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새롬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아차! 일정표 뒤에 있는 촬영 콘셉트 봤어?”

“아니 아직.”

“그거 봐봐.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다고.”

“오잉?”

대한은 유난을 떠는 새롬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대충 구겨 주머니에 처박아둔 일정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뭐야? 키스신이 있네?”

“그 아래쪽 좀 봐봐. 거의 베드신 분위기야.”

“장소가 바닷가 모래사장이네!”

이걸 확인한 대한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호텔 방도 아니고 바닷가 모래사장처럼 베드신을 찍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니 이것들이 정말! 무슨 포르노를 찍냐? 대체 왜 이러는데…….”

“정말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지?”

새롬은 눈을 초롱초롱 뜨고 대한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정색했다.

“무슨 소리야? 정말 이대로 찍을 거야?”

“오버하지마! 베드신 같은 분위기를 낸다고 했지. 정말 베드신을 찍는다고 하진 않았어.”

“그래서? 그게 다른 거야?”

다행히 촬영 경험이 많은 그녀가 대한의 오해를 빠르게 불식시켰다.

그제야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얘기지. 그래도 내일 태클을 좀 많이 걸어야 할 거야. 광고와 상관없이 자신의 촬영 욕심을 위해 무리한 자세를 요구하는 감독도 꽤 있거든.”

“그렇구나.”

대한은 새롬과 함께 베란다로 나갔다.

비치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봤다.

탁 트인 뷰와 시원한 바람이 멋진 콜라보레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키스는 여러 번 하게 될 거야.”

“키스 정도야 이미 각오하고 왔어.”

“아오! 이거 손 떨리네.”

“왜? 나와 키스한다는 게 떨려?”

“진짜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거야?”

새롬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대한을 노려봤다.

아래쪽에서 그녀의 하얀 손이 튼튼한 그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보면.

진짜 화가 난 건 아니라는 소리다.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 줘!”

“키스신만 해도 광고가 나가면 난리가 날 텐데……. 베드신 분위기까지 나면 대한의 여성 팬들이 아마 나를 죽이려고 들 거야.”

“아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그제야 대한은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한이 시작한 것은 개인방송이었다.

그동안의 성과와 경험을 봤을 때!

너무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기는 거품과도 같은 것이다.

당장은 하늘을 붕 뜰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돌아서면 신기루처럼 꺼지고 마는.

“앞으로 계속 방송할 생각이면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지 않으면 누구처럼 공황장애나 조울증 같은 게 생겨서 고생해. 그리고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짓도 저지르게 된다고.”

“대한!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

짝!

새롬은 깜짝 놀라 그의 허벅지를 소리 나게 쳤다.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난 새롬이 너무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래 보여?”

“응, 조금. 누구는 무슨 연예인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겠어? 다들 사람들이 왕자나 공주처럼 막 떠받들어주다가 인기가 식으면 냉정하게 나 몰라라 하고 싹 돌아서니까 충격을 받아서 그렇지.”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세상이야. 그러니까 인기에 너무 함몰되지마. 차라리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좀 줄이고 놀러 다녀. 여행도 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해보고. 정 아니면 나한테 투자 상담이라도 받아보던가!”

대한은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자살 얘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새롬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의 충고에 어느새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사색으로 빠져드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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