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국무부 차관>
“나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응, 그렇게 해!”
쪽!
새롬은 대한의 입술에 가볍게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의 앞을 지나가자 아주 좋은 향기가 났다.
명품향수인지 아니면 그냥 체향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 계속 이 향기를 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롬이 침실로 들어가자 대한은 몸을 뒤로 젖히고 편하게 누웠다.
스르륵 눈을 감자 곧 에바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에바!’
―마스터!
‘나 불렀어?’
―네, 보고 드릴 게 있어서요.
‘뭔데?’
어지간한 것은 에바 선에서 다 처리할 수 있다.
대한은 진즉에 그녀에게 그 정도 권한은 넘겨줬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하겠다는 것은 그녀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던가 아니면 그러기에는 너무 덩치가 큰 사안이다.
―괌 공항에 미국 국무부 차관과 NSA 요원들이 나와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마스터와 접촉을 시도하려는 것 같습니다.
‘나를 체포하거나 납치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럴 동기나 이유도 없고, 아마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겁니다.
대답이 약간 묘했다.
그래서 물어보려는 찰나!
에바가 먼저 그 이유를 말해줬다.
―지금 괌 공항엔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어요.
‘혹시 내 팬이야?’
―네, 맞습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어요.
아무래도 정보가 샌 것 같았다.
우리 쪽은 아니니, 당연히 광고주나 촬영팀에서 말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전용기를 태워주지 않는다고 누가 앙심이라도 품었나!’
대한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세워보았다.
하지만 그의 세계적인 명성과 인지도, 폭발적인 인기를 생각할 때!
오히려 이게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설마 공항에서 머리채 다 쥐어뜯기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거 저 웃기려고 농담하신 거죠?
‘농담 아닌데.’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괌 공항에 코레 실드에서 파견한 경호원들이 쫙 깔려있으니까요.
에바가 공항에서 한번 데고 나더니 그다음부터는 이렇게 경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말은 코레 실드에서 파견한 경호원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경호원 중 상당수는 아마 전투로봇과 안드로이드일 것이다.
‘바닷가에서 수영하면서 노는 거 한편 찍는데 상당히 번잡하군.’
―마스터는 아직 본인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나 봐요.
‘내가 그걸 왜 몰라?’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든 그것에 10배, 아니 100배를 곱하시는 게 현실에 맞을 거예요.
‘내 인기가 그 정도였어?’
확실히 에바의 말을 들으니 좀 놀라웠다.
대한도 자신이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같은 EPL에서 뛰고 있는 쏘니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마스터는 이미 그 정도를 넘어섰잖아요. 이젠 거의 메시 급이라고요.
그녀의 직설인 비유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 팍팍 꽂혔다.
‘어쨌든 잘 알았어. 일단 미국에서 국무부 차관을 보냈다면 시간을 좀 내서 만나보면 되겠지. 그런데 약속은 잡고 오는 거야?’
―일단 공항에 마중 나오겠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하지만 구체적인 일정은 정하지 않았어요. 그건 만나서 서로 조율하기로 했어요.
‘설마 나도 그 미팅에 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마스터는 그저 얼굴만 잠깐 내비치고 호텔로 가시면 돼요.
‘알았어. 그렇게 하지.’
그런데 대답을 하고 보니 좀 이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왜 나를 괌까지 찾아온 거지?’
갑자기 이유가 좀 궁금해졌다.
자신이 코레 그룹에 투자한 사실이 밝혀지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엄연히 투자자의 위치일 뿐이다.
백번 양보해도 현직 프로축구선수라는 직업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가 그에게 굳이 외무부 차관이라는 거물을 보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코레 그룹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보고 다리라도 놔달라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또 하나는 태평양에 떨어진 C-17 글로브마스터 III 전략·전술 수송기 사고조사 때문이에요.
‘아! 그게 있었지.’
그 일은 에바에게 간단히 보고를 받았다.
미군의 대형 군용수송기가 추락해서 태평양 바닷속으로 깊이 잘 들어갔다고 말이다.
매국노, 아니 미국의 간첩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해치는 일이라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래서 굳이 에바와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걸로 생각을 덮어버렸다.
그런데 외무부 차관이란 놈이 나타나 다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올려야 했다.
‘그걸 왜 여기서 조사해? 사고 현장은 하와이 쪽 아니었어?’
―하와이보다는 괌이 더 가까워서 이쪽으로 생존자들을 데려왔어요.
‘그래서 조사결과는?’
―그게 나올 리가 있나요? 이미 심해 깊숙이 빠져버렸는데요. 그냥 군용수송기가 고장 나서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비상 탈출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연관성을 찾을 수는 없겠지?’
―물론이죠. 설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절대 증거는 찾을 수 없어요. 만약 의심하려면 차라리 대한민국 정부를 의심하겠죠. 그건 마스터도 잘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대한은 괜히 물어봤다가 에바의 대답을 빙자한 질책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누군가 그 입술에 부드러운 것을 가져다 댔다.
숨을 들이켜니 아주 좋은 향기를 났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아도 이것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새롬은 잠시 대한과 키스를 나눴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뜨지 않자 얌전히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는 대한의 한쪽 팔을 당겨 자신의 가슴골에 넣고 꼭 껴안았다.
그는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이 촉감이 소름 끼치도록 좋았다.
대한은 새롬이 옆에 앉아 가만히 있자 에바와 끊어진 대화를 다시 이었다.
‘조종사와 승무원들의 조사는 다 끝났어?’
―네, 아무리 조사를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한가 봐요.
‘그렇기도 하겠다.’
―미국 정보부 일각에선 UFO나 외계인이 벌인 짓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보부서에 그런 과대망상적 유언비어를 양산하는 놈들이 다 있네.’
―답답하니 그냥 가정을 한번 세워본 거겠죠. 결론적으로 미국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2억 1800만 달러에 달하는 더럽게 비싼 군용수송기 한 대를 날린 셈이에요.
사고가 일어났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책임질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번 사고는 그게 없었다.
조종사 둘의 일관된 증언과 당시 승무원들까지 일맥상통하는 말을 했다.
그들을 자세히 조사해봐도 누구 하나 이런 일을 벌일 이유와 동기가 전혀 없었다.
기체라도 건진다면 모르지만.
이미 너무 깊은 해구로 빠져들어 애초에 인양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대한과 에바는 미국에게 영구미제사건 하나를 떠넘겼다.
‘한국은 어때?’
―미국의 대형 군용수송기가 추락해 태평양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그쪽 말고.’
―청와대는 소식을 접하고 천벌을 받았다며 아주 좋아했어요. 특히 국정원에선 그날 거하게 파티를 벌였다고 합니다.
‘때려죽이고 싶은 놈들이 도망가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는데, 느닷없이 전부 객사, 아니 수장을 당했으니 그들로서는 속이 다 시원하겠군.’
이건 자신이 국정원 직원이라고 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쾌거이자 낭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셈이니 나머지는 에바가 알아서 그들이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줘!’
―네, 마스터. 지금도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요.
‘상황은 좀 어때? 일망타진되는 분위기야?’
―지금까지는 제 도움으로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에 집을 영원히 깨끗하게 만들 수는 없다.
자주 청소하고 부지런히 쓰레기를 버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집이 아주 완벽히 깨끗한 상태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대한은 절대 분리수거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궁 스르르륵!
미약한 충돌음에 이어 바퀴가 부드럽게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에바의 보고를 받는 사이.
전용기는 드디어 괌(Guam)의 Antonio B. Won Pat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대한은 전용기를 타고 온 VIP답게 간단히 입국 절차를 끝내고 나왔다.
출구로 나가려고 하는데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백인들이 그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김철수와 이영수가 반사적으로 대한의 앞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최강철과 강성한이 옆으로 돌아서 벽을 세웠다.
그들은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면 바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모습이었다.
건장한 백인들은 오히려 호승심을 느끼는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다가갔다.
이걸 본 존 러시 국무부 차관(Under Secretary)은 깜짝 놀라 두 손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워우! 워우! 다들 진정하세요. 저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러자 다가오던 백인들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은 여전히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때, 대한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에바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저는 존 러시입니다. 국무부의 차관입니다.”
“아! 존 차관이시군요. 존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물론이죠. 이런 미녀가 제 이름을 불러준다니 오히려 영광입니다.”
“에바에요. 마중 나오신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듣던 대로 아주 미인이시군요.”
국무부(미 외무부)의 차관답게 존 러시의 혀는 매끄러웠다.
그는 에바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한 척 굴었다.
방금 당장이라도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박감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대한도 굳이 별거 아닌 일로 미국 국무부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를 듣자 최강철, 강성한, 김철수, 이영수가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얼마나 그 행동이 절도가 있는지 존 러시 차관과 같이 온 NSA 요원들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에바!’
―네, 마스터.
‘그런데 왜 국무부의 차관이 정보조사국(INR) 요원이 아닌 NSA 요원들을 대동하고 있는 거지?’
미 국무부의 정보력은 미 국방정보국(DIA) 및 중앙정보국(CIA)과 더불어 타 정보기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국무부 내 핵심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정보조사국(INR)은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해외 공관을 통해 해당국 유력 인사들의 인사 자료를 수집 및 분석하고 비밀리에 관리하는 ‘잠재 지도자 신상명세 보고 프로그램(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Program)’을 가동하고 있었다.
―그건 존 러시 차관이 국무부의 의지로 마스터를 보러 온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어떤 놈이 미국 정부에 로비해서 오게 됐다는 말이군.’
에바의 한 마디에 대한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무부는 미국의 외교정책의 심장부다.
미국 대통령과 함께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이런 정부 기관의 차관을 쉽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배후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에바의 소개로 대한과 존 러시 차관은 서로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대한입니다.”
“존 러시입니다. 그냥 존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대한 선수의 팬이거든요. 우리 아내와 아이들도 모두 팬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존 러시는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악수도 아주 신명 나게 했다.
누가 보면 정말 오랜 친구 사이가 아니냐고 오해를 할 만한 대목이었다.
‘친화력 하나는 갑이네.’
―국무부 차관이라는 자리를 포커 쳐서 딴 건 아닌가 보군요.
대한의 말에도 에바는 시크한 반응을 보였다.
“제가 이대한 선수의 경기는 모두 챙겨서 봤습니다. 이제는 영국으로 가서 직관을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아참! 사인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내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할 겁니다.”
“아! 네.”
존 러시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굴자 에바가 적절한 시점에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피곤하실 테니 그만 먼저 내려가 보세요.”
“알았어. 에바! 그럼 존 러시 차관. 나중에 봐요.”
“네, 들어가세요. 곧 다시 봅시다.”
에바는 한마디로 대한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존 러시 차관을 상대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저희를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그건 여기서 말하기가 좀 곤란하군요.”
존 러시는 냉정한 에바의 말에 금세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