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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재능(Feat. 대한 TV)-252화 (251/331)

252화 <업어치기 한판>

하지만 그녀가 일어나도 이강철과 강성한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건장한 두 경호원이 누구를 지키려고 여기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스터! 저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게요.

‘누구?’

―영국 왕실을 앞에 내세워 목적을 달성하려는 배후의 어떤 세력이겠죠.

‘뭐가 그렇게 거창해. 빨리 갔다 와!’

―15분 정도 걸릴 거예요.

대한과 에바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대화를 나눴다.

레이놀드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바가 방을 나가자 곧 깔끔한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우아한 태도로 격식을 차리며 그녀는 그에게 차를 한잔 타줬다.

“으음.”

대한은 한 모금 마시더니 그냥 내려놓았다.

이게 어떤 차라고 장황하게 설명까지 했는데 막상 마셔보니 그에 비해 맛은 형편없었다.

아니 전혀 대한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역시 차는 우리나라의 보성녹차나 둥굴레차가 최고야.’

대한은 기대에 전혀 못 미치는 영국 왕실의 차를 속으로 혹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더 안 마시는 겁니까?”

“네, 잘 마셨어요. 어서 버킹엄 궁전이나 구경시켜주세요.”

“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레이놀드는 대한의 말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앞에 놓인 차는 아직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레이놀드는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버킹엄 궁전에 대해 역사강의(?)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대한도 호기심 가득 찬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지쳐갔다.

영국 왕실의 비사나 재미있는 스캔들을 얘기해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버킹엄 궁전에 관해 뭐가 그렇게도 할 말이 많은지 정말 레이놀드의 수다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대한.

그는 끝내 입을 열고야 말았다.

“우리 거기까지만 듣죠.”

“네에?”

대한의 말에 레이놀드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이렇게 중간에서 무 자르듯 자른 예가 없었다.

하지만 대한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저 오늘 출국해야 하거든요.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까 빨리 저 보자고 한 사람 좀 만나게 해주세요.”

“아! 네.”

단도직입적인 대한의 말에 레이놀드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다가 뭔가 열이 받았는지.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지금의 상황을 수치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대한은 조금도 그를 동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를 만나자고 초청한 것은 영국 왕실이지 레이놀드 집사가 아니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린다는 말이다.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떨친다는 뜻이 담겨있다.

가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레이놀드는 지금 영국 왕실의 위엄이 마치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버킹엄 궁전의 집사인 레이놀드는 영국 왕실이 고용한 일개 고용인일 뿐이다.

그가 결코 영국 왕실이 되거나 대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레이놀드가 자신의 직분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나 보다.

대한을 데리고 후원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았어요.”

레이놀드는 대한의 대답에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어휴! 이제 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대한은 레이놀드가 나가면서 닫은 방문을 쳐다보며 지루한 목소리로 독백했다.

한편, 영접실을 나간 에바는 버킹엄 궁전의 또 다른 집사를 만났다.

“버킹엄 궁전의 집사 모리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안내를 부탁드릴게요.”

“네, 이쪽으로 오시죠.”

모리스의 정중한 인사에도 에바는 무표정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집사를 따라 구석진 방으로 안내됐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지금부터 정확히 15분이에요.”

“네?”

“14분 57초 남았어요.”

“아! 알겠습니다.”

모리스는 그제야 에바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서둘러 방문을 닫고 나가더니 어디론가 부지런히 뛰어갔다.

에바는 방안 정 가운데에 놓여있는 소파를 쳐다봤다.

그녀는 소파 중앙에 살포시 앉았다.

정면으로 방문이 보이는 곳이라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 와중에도 당연히 에바의 칼 같은 시계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6분 후!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금발에 푸른 눈빛을 한 사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까지 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그런데 얼굴이 아주 많이 잘생긴 남자였다.

“허억, 허억!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니에요. 아직 8분 45초나 남아있어요.”

사내의 말에 에바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전 제임스라고 합니다.”

“에바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피차 바쁜데 어서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에바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기 싫었다.

그래서 용건부터 물어봤다.

그러자 제임스는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하하! 이거 상당히 까칠하시네요.”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네?”

“지금도 아까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어요. 이제 8분 남았습니다.”

“아!”

에바의 냉정한 말에 그는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금발에 푸른 눈의 미녀!

피부는 하얗고 눈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길고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확실히 들어간 몸은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제임스는 이런 에바의 매력에 잠시 본분을 잊어버릴 뻔했다.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후리는 끼가 발산되려고 한 것이다.

다행히 그는 본능적으로 에바가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제임스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그녀를 만나려는 목적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나이가 아주 많습니다.”

“…….”

제임스는 에바에게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바로선 아직도 본론이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왕의 건강을 위해 동티모르의 병원을 이용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용하시면 되잖아요.”

그녀의 대꾸에 제임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원했던 대답이 나와서가 아니다.

처음으로 에바가 진지하게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줬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제임스!

그래도 좋다고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축하합니다. 동티모르의 보보나로에 투자하셔서 대박을 터트렸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내가 제임스에게 그런 축하 인사나 들으려고 여기 온 건가요? 영국 왕실의 비공식 초청을 받은 게 아니었나 보죠?”

“아! 아니 그게.”

“그것보다 어디서 나왔어요? 아무리 봐도 영국 왕실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고. 역시 서커스인가요?”

“헉!”

에바의 돌직구에 이번에는 제임스가 한 방 먹었다.

그녀가 언급한 ‘서커스’라는 말은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Secret Intelligence Service)를 통칭하는 말이다.

국내 보안을 담당하는 ‘MI5’와 함께 세상에는 영국의 대외 정보기관인‘MI6’로 잘 알려져 있었다.

에바는 제임스가 대답을 못 하자 다시 시계를 쳐다봤다.

“5분 30초 남았네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하는 행동을 보면 MI6 요원이라는 것쯤은 금세 알 수 있겠네요.”

“우와아! 이거 정말 아프게 찌르시네요. 에바 양이 이런 사람이라는 거 이대한 선수도 알고 있나요?”

“저는 그의 수행비서예요. 굳이 이런 일을 말하지 않아도 바쁜 분이라는 거 아직 모르셨어요?”

제임스가 이대한을 언급하자 에바의 표정이 아주 싸늘해졌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른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워워! 진정하세요. 저는 싸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을 막 해도 되는 건가요?”

“혹시 불쾌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생각하시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제임스는 일단 정식으로 사과부터 했다.

그것도 영화에서나 나오는 예의와 절도가 담긴 영국 왕실의 정통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에바에게는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는, 가당치 않은 짓일 뿐이었다.

“오늘 이대한 선수를 초청한 장본인이 바로 당신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초청은 진짜 영국 왕실에서 이대한 선수를 보고 싶어서 초청한 게 맞아요.”

“당신과 당신을 보낸 조직은 그 틈에 필요한 정보라도 캐려고 한 거고요.”

“뭐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이제 3분 남았네요.”

에바가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제임스는 이제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어지간한 미녀들은 자신의 잘생긴 얼굴만 봐도 넘어갔다.

영국 왕실에서나 쓰는 악센트에 격식 있는 매너를 보면 대부분 다 뒤집혔다.

자신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사랑한다고 했던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제임스는 오늘 아주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에바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함까지 보여줬다.

제임스에게 이런 강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에바를 요리해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요?”

다행히 그녀가 그의 숨통을 틔워줬다.

“아닙니다. 동티모르 해변에 세운 코레 병원에서 최첨단 나노 시술을 받고 싶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죠? 가서 받으면 되잖아요.”

제임스는 에바가 알고 얘기하는 건지 모르고 얘기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앞으로 1년 동안 코레 병원의 예약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럼 1년 뒤로 예약을 하시면 되겠네요.”

“예약하는 데만 무려 1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예약을 취소하면 그 돈은 돌려주지도 않아요.”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도와주세요. 올해 안에 여왕이 나노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면 저희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반드시 보답할게요.”

“아! 이제 시간이 다 됐네요. 다음에는 미리 전화하고 약속 잡고 오세요.”

에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제임스는 방을 나가려는 그녀를 보자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에바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쿵!

순간 세상이 팽 돌더니 까맣게 변해버렸다.

또각 또각 또각!

에바는 가볍게 손을 털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한참 있다가 모리스가 들어와 바닥에 쓰러져있는 제임스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그렇다.

제임스는 에바의 어깨를 잡아보기도 전에 거꾸로 그녀에게 잡혀 엎어치기를 당한 것이다.

굳이 배려해줄 이유가 전혀 없는 에바의 한 수!

단번에 그를 기절시켜버리고 말았다.

모리스 집사는 급히 제임스를 둘러업고 버킹엄 궁전에 있는 양호실로 뛰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큰 상처를 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등뼈는 무사했지만, 뇌진탕에 엉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렇게 에바와 제임스의 첫 만남은 화기 애매한 분위기로 끝나고 말았다.

* * *

“아이참!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죄송해요.”

에바가 정확히 대한이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15분 안에 끝난다며?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하지만 대한은 그녀에게 온갖 짜증을 다 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혼자 계세요?”

“왜 내가 혼자야? 여기 최강철과 강성한이 있잖아.”

“제 말은 레이놀드 집사는 어디 가고 혼자 계시냐는 뜻이에요.”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곤 함흥차사야.”

에바가 최강철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혼자 계셨지?”

“정확히 28분 38초입니다.”

“음.”

그녀는 살짝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말대로 거의 30분이나 혼자 있었던 것이다.

대한이 그런 에바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가자. 아무래도 여긴 우리가 있을 데가 아닌 것 같아.”

“그래요. 가고 싶으면 그냥 가면 돼죠.”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대한은 곧바로 방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그가 타고온 리무진이 그대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최강철은 운전석으로 걸어가고 강성한은 뒷문을 열었다.

대한이 타자 곧바로 에바도 들어왔다.

텅!

육중한 뒷문의 무게가 묵직한 소리를 일으켰다.

시동은 건 최강철은 곧바로 버킹엄 궁전 정원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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