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왕실의 초대>
그건 프로축구선수의 자존심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대한은 에바에게 슬쩍 액수를 물었다.
“계약금은 얼마나 준대? 그리고 브랜드는 어디로 했어?”
“당연히 나이키죠. 아디다스와도 협상했지만, 도저히 액수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설마 7년짜리 같은 장기계약은 아니겠지?”
“마스터께서 장기계약 싫어하는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1년마다 갱신하는 계약입니다.”
“그래서 얼마라는 거야?”
“계약금만 2,340만 유로입니다. 성적에 따라서 최대 100만 유로까지 받을 수 있는 옵션도 있습니다.”
“2340만 유로면 한화로 약?”
“오늘 환율로 300억 원입니다.”
“와우! 나쁘지 않네.”
대한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메시가 아디다스와 스폰서십으로 버는 수입이 약 300억 원에 달한다는 기사가 있었으니 프로축구의 짧은 경력치고는 굉장히 파격적인 계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스포츠 브랜드 계약과 광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 좀 한번 봐주세요. 되도록 계약을 맺고 광고를 찍었으면 하는 것들만 따로 골라봤어요.”
에바가 홀로그램을 띄워서 차분하게 하나씩 보여줬다.
대한의 밥을 먹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무려 열 개나 되네?”
“열 개를 전부 계약하고 재빨리 광고를 찍으면 그다음은 마음껏 놀러 다니실 수 있어요. 사실 놀면 뭐해요. 이렇게 막간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죠. 그냥 한 열흘 바짝 뛰시고 남는 시간 기분 좋게 노세요.”
“그, 그럴까?”
그녀의 말에 귀가 얇아진 대한은 금세 동조하고 말았다.
3달이면 90일이다.
그중에서 딱 열흘만 투자하면 그만이다.
그는 그냥 쉽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적으로 광고를 찍다가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그만두고 나오면 된다.
이제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인기와 실력 및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한국 들어가시면 부모님과 오붓하게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세요.”
“국내는 나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차라리 해외가 더 편할 텐데.”
“그럼 해외여행을 준비해볼게요.”
“아니야. 임신도 하셨는데 그냥 제주도나 다녀올게. 아니면 조용한 시골도 괜찮고.”
“그것도 함께 준비해보겠어요. 여자 친구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여자 친구들? 그리고 뭘 어떻게 해?”
에바가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자 대한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당연한 듯 물었다.
“제 말은 누구 먼저 만나러 가시겠냐고요?”
“아무래도 한국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만나야겠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어요. 하이스는 인제 그만 보내줘야 할 것 같네요.”
“하이스? 혹시 하이스에게 남자친구라도 생겼어?”
“네, 생겼어요.”
“아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대한은 속이 무척 쓰렸다.
바빠서 자주 못 만난 게 이런 슬픔으로 다가오다니.
원래 가지고 있는 것보다 놓친 것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는 자신이 여럿을 동시에 만나고 있다는 걸 생각지 못했다.
그보다는 당장 하이스를 놓쳐버렸다는 마음에 상심이 컸다.
하지만 에바가 대한에게 즉효약을 뿌렸다.
홀로그램을 열고 최근 그녀의 행적을 낱낱이 보여줬다.
클럽 죽돌이처럼 매끈하게 생긴 모델과 좋다고 웃고 떠들며 키스하는 모습들!
대한은 손에 잡힐 듯한 선명한 영상을 보자 그만 정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생생한 3D 영상인지…….
당장 그녀가 눈앞에서 바람이라도 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그는 금세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굴러들어온 호박은 발로 차지 않고 날아가는 새는 붙잡지 않는다고 하더니…….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네.”
“잘 생각하셨어요. 떠난 여자와 기차는 붙잡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있죠. 이제 더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에바는 대한의 속을 뻔히 보고 있었다.
그래도 정성껏 컵에 물을 따라줬다.
그는 잠시 가슴을 부여잡더니 이내 컵을 집어 들었다.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나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하나를 보냈다.
하지만 대한에겐 아직 넷이나 더 남아있었다.
아니 한새롬까지 하면 다섯인가?
사실 한새롬이 자신의 여자인지 아닌지 좀 헷갈렸다.
썸을 타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선을 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거나 데이트를 즐기지도 않았다.
말만 그런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은 대한만 바라보고 있는 해바라기였다.
전혀 한새롬의 성격과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해바라기 과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에겐 아직 다섯이 남아있었다.
“일정을 살펴보니 류연의 시간이 제일 먼저 비네요.”
“아참! 영국에 놀러 오기로 했었는데…….”
“영국에서 보는 것보다 한국에서 보는 게 류연에게 더 편할 겁니다.”
“알았어. 그럼 류연부터 만나보자.”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니에요. 그래도 한국에 사는 한새롬을 제외하면 류연, 고리나, 나나 순으로 시간이 비네요.”
“모니카의 일정은 아예 물어보지 않았어?”
대한의 질문에 에바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일정 확인할 게 뭐 있어요? 시도 때도 없이 마스터가 보고 싶다고 찾아오는데. 그리고 잡아놓은 물고기에겐 모이를 주지 않는다는 말도 모르세요?”
“헐! 그게 여자 입에서 나올 소리야?”
“어쨌거나 모니카는 어떤 상황이라도 마스터를 버리지 않을, 아니 버리지 못할 겁니다.”
“으음.”
그건 확실히 에바의 말에 맞다.
모니카는 결코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또한, 그녀는 그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여자였다.
물론 모니카가 어디 가서 그걸 얘기하진 않을 것이다.
설사 그런다고 해도 누구 하나 쉽게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서 그는 모니카를 애틋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보고 싶다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것도 좋았고 말이다.
대한은 그녀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싱긋 미소를 돌았다.
그게 꼴 보기 싫었는지.
에바가 급히 일정에 관해 질문을 퍼부었다.
얼떨결에 집중하게 된 그는 에바와 90일간의 일정표를 열심히 만들었다.
그렇게 대한과 에바는 여행 겸 출장(?)계획을 단단히 세웠다.
* * *
런던 웨스트민스터.
하얀 리무진이 ‘더 몰(The Mall)’ 길로 접어들었다.
도로 양쪽으로 길게 상록수들이 늘어서 있어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전면에 보이는 것은 빅토리아 기념비(Victoria Memorial).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날개 달린 천사의 모습이 유독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롤스로이스 방탄 리무진은 ‘더 몰’에서 나와 ‘컨스티튜션 힐(Constitution Hill)’ 로드를 타고 빅토리아 기념비를 우측으로 타고 돌았다.
창밖으로 그 유명한 버킹엄 궁전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여기가 바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머무는 곳이다.
“오! 멋진데!”
대한은 버킹엄 궁전을 보곤 작게 감탄사를 발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에바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버킹엄 궁전이 마음에 드세요?”
“응, 뭔가 근사하잖아.”
“모양이 좀 밋밋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그래?”
에바는 대놓고 버킹엄 궁전의 모양을 저격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요새 이렇게 권위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궁전을 어디 찾아보기 쉬운 줄 알아?”
“차라리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화려하기로는 베르사유 궁전이 한 수 위인 것만 사실이니까!
“원하시면 하나 지어드릴까요?”
“버킹엄 궁전 같은 것을 짓자고?”
“네.”
“아니. 됐어.”
에바의 제안에 대한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저렇게 커다란 궁전을 지어서 혼자 뭘 하고 산단 말인가!
안 그래도 잠시 성(Castle)에 꽂혀서 유럽 곳곳에 개인성을 사놓은 그였다.
호텔이나 모텔로 개조해서 활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큰 돈이 되는 비즈니스는 아니었다.
대한은 그보다 오늘의 일정이 더 궁금했다.
“여기 들어가면 여왕은 만나볼 수 있는 거야?”
“버킹엄 궁전의 꼭대기에 걸린 깃발을 보니 외출한 것 같진 않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가 다시 물었다.
에바는 대한을 쳐다보며 친절하게 그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버킹엄 궁전의 꼭대기에 게양되는 깃발에 따라 엘리자베스 여왕이 궁에 머물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어요. ‘로열 스탠다드’가 게양되면 여왕이 궁에 있는 거고, ‘유니언 잭’이 게양되면 여왕이 궁에 없다는 뜻이에요.”
“아아!”
영국 왕실에 이런 전통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대한은 완전히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사이, 리무진은 버킹엄 궁전의 담장을 타고 돌다가 후문으로 진입했다.
미리 연락해놓아서 출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경비병들이 잠시 차를 정차시키고 트렁크와 바닥을 살펴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는 거야?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비공식적인 초청을 받았다고요.”
“오늘 우리 전용기 타고 한국 가는 거 아니었어?”
“맞아요. 그리고 비행기 탈 시간은 아직 충분해요.”
영국 왕실의 초청이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긴 했다.
대한은 상황을 설명해줘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다.
하지만 에바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했다.
겉으로는 이대한 선수를 좋아하는 영국 왕실 인사들의 비공식적인 초청이다.
하지만 그건 아마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진짜 원하는 목적은 분명히 따로 있었다.
스르르륵!
리무진은 버킹엄 궁전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공원도 아니고, 땅값도 비싼 런던 한가운데에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니!
역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웠던 영국 왕실다웠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운전을 맡은 B1 최강철의 말에 대한은 바로 차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어느새 조수석에서 나온 B2 강성한이 차 뒷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는 둘에게 눈인사하고 차 밖으로 나왔다.
뒤이어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에바가 뒤따라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은 그녀의 굴곡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버킹엄 궁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침 버킹엄 궁전의 집사 레이놀드가 나와 있었다.
그는 집사라기보다는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로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의와 절도가 배여 흘러넘치는 듯한 모습.
그런데 또 이게 그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안내를 맡은 집사 레이놀드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대한 선수! 개인적으로 팬입니다.”
팬이라는 말에 굳었던 대한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일단 잠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아요.”
레이놀드의 제안에 대한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바를 한번 쳐다보고 눈으로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쓸데없는 행동이었다.
에바는 당연히 대한의 결정에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제야 레이놀드는 안심하고 그들을 인도했다.
대한과 에바 그리고 두 명의 경호원인 최강철과 강성한!
그들 넷은 레이놀드의 안내를 따라 버킹엄 궁전의 영접실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차를 내오겠습니다.”
“네.”
대답하긴 했지만, 대한은 주변을 구경하느라 이미 정신이 없었다.
천장과 바닥, 가구와 벽에 붙어있는 그림 하나하나가 전부 오래된 진품이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보게 된 그는 여간 신기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상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축구선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레이놀드의 관점에서 볼 때!
쉽게 말해서 그의 뇌피셜이라는 말이다.
대한의 입장은 또 달랐다.
그는 일부러 버킹엄 궁전을 구경하러 여기에 온 게 아니다.
한국 간다고 바쁜 사람을 부른 것은 영국 왕실이었다.
다시 말해 대한은 영국 왕실에서 비공식적으로 초청한 손님이다.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말과 같았다.
“에바 양이라고 했죠?”
“네, 맞습니다.”
“잠시 따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레이놀드가 에바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대한을 향했다.
그러자 레이놀드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대한 선수는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레이놀드 집사는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대한 선수에게 버킹엄 궁전을 구경시켜 드리고 있겠습니다.”
“좋아요. 15분 드리죠.”
“감사합니다.”
짧게 협상을 끝낸 에바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