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아스날전>
“다음엔 나도 좀 차자.”
“그레이! 너 많이 컸다.”
“키는 원래 너보다 내가 더 컸어.”
“진짜 다음에 네가 찰래?”
“아니. 나도 농담이야. 대한이 있는데 감히 내가 프리킥을 차려고 하겠어?”
“크크.”
오늘은 그레이도 같이 출전해서 농담 한마디를 보탰다.
그동안 대한이 출전할 때마다 선수교체로 나와야 해서 심기가 불편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 이후로 왓포드에 대한은 없다.
그러니 이제 선수 교체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진 그레이였다.
물론 앞으로 교체를 하고 싶어서 환장하게 될 최악의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다.
삑!
주심이 빨리 차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대한은 즉시 볼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프리킥 장소는 아스날의 레노 골키퍼가 봤을 때 중앙에서 살짝 우측이었다.
위치도 좋고 거리도 적당했다.
비록 아스날 선수들이 인의 장벽을 철저히 치고 있었지만.
그건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다.
도도도도!
뻥!
대한은 빠르지 않게 달려가 오른발로 볼을 감아 찼다.
그가 찬 볼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오른쪽 골대 상단을 향해 급격히 휘어져 들어갔다.
철썩!
축구공은 살포시 골대 그물에 감싸여 팽그르르 돌았다.
와아아아!
순간 비커리지 로드 경기장이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관중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손을 하늘 높이 들고 흔들었다.
서로를 얼싸안고 끌어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찌할 줄을 몰라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는 대한의 선취골에 모두 광분해버렸다.
“골!”
“골입니다.”
“이대한 선수가 선취골을 터트렸습니다.”
장수원 아나운서와 남희진 해설위원도 참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둘은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면서 흥분했다.
정말 이런 맛에 축구장에 나와 직관하고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온몸이 짜릿해지는 이 기쁨은 현장에 와서 느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장수원과 남희진은 본분을 생각해 흥분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중계방송을 이어나갔다.
“우리 이대한 선수! 깔끔하게 골을 넣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프리킥 하나는 절대 놓치지 않는군요.”
“대단합니다.”
“오늘도 연속골을 이어나갑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스날이 대량 실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군요. 이제 한 골 들어갔습니다. 아마 곧 대량 실점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 남희진 해설위원이 좀 곤란해질 겁니다.”
“그렇죠. 저를 위해서라도 이대한 선수는 오늘 꼭 많은 골을 넣고 말 겁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자신의 소원을 빙자한 소리까지 방송에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이 볼을 넣은 순간부터 시청자들은 매우 관대해졌다.
둘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대한이 골을 넣은 것만으로 이미 쌓였던 스트레스가 쫙 풀려나가고 있었다.
대한TV 채널도 이런 분위기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화이트칼라: 오우야! 골 넣으니까 너무 좋다.]
[대구주방장: 아싸! 골이다. 속이 다 후련해짐.]
[맞다하리: 난 스트레스가 쫘아아악 풀리는 거 같아. 개좋다!]
[롤황제: 헐! 개지린다. 우리 대한이는 진짜 축구의 신이다.]
[볼은둥글다: 이게 실화냐! 어떻게 프리킥을 한반도 안 놓치고 다 쳐넣어.]
[실연남: 으음, 딱 한 번 놓쳤다.]
[핵오염재팬: 지렸다. 오른쪽 모서리 상단을 노리고 정확하게 찼어.]
[천조국거지: 이러다가 정말 아스날 대량 실점하는 거 아냐?]
[조던: 에이 저것도 못 넣으면 축구선수 때려치워야지.]
[사필귀정: 어라? 여기 웬 벌레가 떠들어대고 있다!]
[대한만세: 저놈 아스날 충인가보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 사람이면 우리 대한이를 응원해야지.]
[우리의소원은통일: 난 골보다 오늘이 왓포드와 찢어지는 날이라서 더 좋다.]
[금수강산: 그것도 맞네. 이제 우리 대한이 돈 좀 벌겠다.]
[PELE: ㅋㅋ 지금도 대한이 돈 많다. 앞으로도 많이 벌 거고.]
[흥민이형: 주급 40만 파운드! 흐엑! 대애애애애애박!]
[축구좋아하는중: 맨시티에서 어떻게 뛸지 정말 궁금해진다.]
[민족의자존심: 뭘 어떻게 뛰어? 그냥 훨훨 날아다니겠지.]
[설명충: 왓포드 같은 거지 같은 팀에서도 이렇게 골을 넣었는데 맨시티 같은 리그 선두 팀에 들어가면 더욱 빛을 발할 거야.]
[제니: 설명충 제발 좀 꺼져!]
그사이, 골은 넣은 대한은 관중을 바라보면서 뛰었다.
일명 산책 세레모니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왓포드 팬들을 위해 오늘 볼 맛 좀 제대로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삐익!
주심이 경기를 재개했다.
아스날은 오베메양을 필두로 파상적인 공세로 나섰다.
하지만 대한을 비롯한 데울로페우와 그레이가 강력한 전진 압박을 펼치며 그 맥을 툭툭 끊어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순식간에 분위기가 왓포드로 넘어왔다.
“대한에게!”
“오케이!”
두쿠레에게 볼을 받은 그레이가 대한을 향해 빠르게 볼을 패스했다.
그런데 이게 패스인지 슛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빨랐다.
거기에다 볼이 너무 높았다.
대한은 급히 날아오는 볼에다 엉덩이를 가져갔다.
툭!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완충작용을 했다.
축구공에 실린 운동에너지가 몽땅 살로 흡수된 것이다.
그러자 볼은 그의 바로 앞에 살포시 툭 떨어져 내렸다.
물론 충격으로 인해 엉덩이가 좀 쩌릿하긴 했다.
하지만 경기중이라서 일단 그냥 무시했다.
대한은 앞으로 볼을 툭 차 놓고 빠르게 전진했다.
와아아아!
항상 경기에서 기대하게 하는 선수가 있다.
그런 선수를 대중은 스포츠 스타라고 부른다.
대한이 바로 그러했다.
그가 볼을 잡기만 하면 왓포드 팬들은 자동으로 큰 함성을 질렀다.
왠지 어떻게 하든 반드시 골을 집어넣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막아!”
아스날의 미드필더 샤카가 소리를 지르면 달려갔다.
그의 옆으로 구엔두지가 다급하게 합류해 대한을 막아섰다.
하지만 대한은 팬텀 드리블로 가볍게 둘 사이를 제치고 스쳐 지나갔다.
그 동작이 워낙 빠르게 교묘해서 샤카와 구엔두지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흘려보냈다.
급히 고개를 뒤로 돌리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아스날의 풀백 소크라티스가 달려왔다.
대한은 이번에도 정면으로 달려갔다.
마치 강하게 부딪치기라도 하겠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최종수비수인 루이즈와 소크라티스는 결코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한은 볼을 몰면서 슬쩍 앞을 바라봤다.
마치 단단한 두 벽이 앞을 턱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툭!
순간 그는 가볍게 볼의 밑동을 쳐올렸다.
그러자 축구공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루이즈와 소크라티스는 자신들도 모르게 시선이 축구공으로 갔다.
그 사이, 대한은 루이즈의 옆을 스치며 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뒤늦게 루이즈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한은 거칠게 팔을 뿌리치며 달려갔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그들도 이제 뭔가 만들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루이즈와 소크라티스를 제치자 이제 남은 것은 골키퍼뿐이었다.
레노 골키퍼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집중했다.
그 모습에 대한은 떨어지는 볼을 가볍게 잡아 옆으로 툭 밀쳤다.
슛하기 위한 예비단계였다.
레노는 그 모습에 번개처럼 달려와 그를 덮쳤다.
나름 각도를 죽이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대한은 침착했다.
강하게 차는 척하다가 오히려 골키퍼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방향을 향해 가볍게 볼을 툭 밀었다.
퉁! 데굴데굴!
레노 골키퍼는 앞으로 달려 나오다가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역동작에 걸려 주저앉았다.
결국, 레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골대를 향해 굴러가는 축구공!
그저 허망한 표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골!”
“골입니다.”
“멀티골이 터졌습니다.”
“이대한 선수가 다시 골을 넣었습니다.”
“우리 이대한 선수가 선취점에 이어 연속골을 차례로 성공시켰습니다.”
장수원 아나운서와 남희진 해설위원은 마치 자신이 골을 넣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했다.
아니 비커리지 로드 경기장에 있는 모든 왓포드 팬들이 두 사람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대한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아!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벽이 절대 조용하지 않겠어요.”
“잠을 미루고 새벽까지 시청하시는 시청자분들! 아마 오늘 계 타신 기분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멋진 경기를 직관할 수 있어서 더욱 뿌듯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전반 15분이네요.”
“초반에 이렇게 골 잔치를 해주면 뛰는 선수들도 몸이 가벼워집니다.”
“얼마나 더 골을 넣을지 모르지만 1:0으로 이기는 거와 2:0으로 이기는 거는 차원이 다르죠.”
“맞습니다. 왓포드 선수들은 이대한 선수 덕분에 마음에 부담을 크게 덜게 됐어요.”
두 사람의 중계방송 스타일은 ‘기승전대한’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시청자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세상에 누가 이렇게 매번 경기 때마다 시원하게 골을 터트려주겠는가!
축알못이라도 골이 많이 터지는 경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번 골이 리그 31호 골이네요.”
“프리미어리그 12경기 만에 무려 31골을 집어넣었어요.”
“FA컵을 포함하면 13경기에 33골을 넣은 거네요.”
“정말 무시무시한 골 결정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평균 한 경기당 3골 가까이 넣은 셈이네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게 골을 많이 넣은 겁니다.”
“그렇겠죠. 앞으로도 이런 대기록이 이대한 선수를 통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그건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남희진 해설위원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대한에 관한 믿음이 거의 신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덩달아 대한TV 채널도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허각: 허각! 또 골 들어갔다.]
[알랑드롱: 우와! 신난다. 골 잔치 제대로네.]
[스마트폰팔이: 대한이 작심했나 보다. 오늘 몇 골이나 넣을까?]
[마분지: 이게 실화냐? 어떻게 매번 이렇게 골을 잘 넣지? 넌 인간의 레벨이 아니다. 그냥 신계에 등극해라.]
[따스한조명: 펠레가 안 부럽다. 마라도나가 누구냐? 날강두와 메시는 물러가라! 우리 대한이 납신다. ㅋㅋㅋ]
[나빌레라: 이 정도면 그냥 골 넣는 기계라고 봐야겠다. 아스날 선수들 힘들어하는 거 봐라! 아주 불쌍하누!]
[무리한남편: 우리 대한이가 왓포드 팬들을 위해 마지막 서비스 거창하게 해주네. 왓포드 팬들은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은혜는제발돌에새겨: 고맙기는 개뿔! 나중에 경기에서 지면 맨날 대한이 생각에 피눈물을 흘릴 텐데.]
[잘못된만남: 개잘한다. 오늘 난 이대한 선수의 빠가 되기로 했다.]
[박치기: 난 대한의 빠가 된지 오래다.]
[산수갑산2호점: 어디서 까불어! 나야말로 대한TV 초창기 멤버야.]
[정직한사회: 구라치고 있네. 재생목록에 초창기 회원들 명단 다 나온다. 뻥 치지 마라.]
[논스톱개혁: 아이유! 조아라! 새벽잠이 아깝지 않다.]
[땅부자: 대한아! 해트트릭 가즈아!]
[내꿈건물주: 오늘 아스날이 날을 잘못 잡았어. 괜히 이런 날 경기를 치러가자고 개박살나네.]
[자주국방: 어구! 우리 대한이 파이팅! ㅋㅋ]
벌써부터 맨시티에서 뛸 대한을 고대하는 팬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마음엔 이미 왓포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 시즌은 모르지만.
대한이 없는 다음 시즌에 과연 왓포드 FC가 치열한 프리미어리그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강등권에서 벗어나 잔류라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삐익!
주심의 휘슬로 다시 경기가 시작됐다.
왓포드는 차분하게 경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아스날은 부지런히 공세를 계속했다.
그렇다고 마음먹은 대로 골을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괜히 축구공이 둥글다고 하겠는가!
특히 대한이라는 거대한 크랙이 떡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더욱 경기가 답답해지고 있었다.
아스날 선수들은 오늘 승리를 맛보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뭔가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데 왓포드의 수비진이 너무 완강했다.
무엇보다 대한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전진 압박을 해대는 통에…….
경기의 리듬이 자꾸 딱딱 끊겨버렸다.
그렇게 선수들은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전반전이 다 끝나갔다.
삐익!
그때, 주심의 날카로운 휘슬이 울렸다.
전반전이 끝났다며 부는 소리가 아니었다.
우와아아!
비커리지 경기장이 크게 술렁였다.
관중석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아스날의 골대 앞으로 집중됐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
그곳엔 한 선수가 쓰러져 있었다.
대한이 아스날 수비수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