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유종의 미>
그런데 그의 동공이 갑자기 급격히 커졌다.
“어! 저게 뭐야?”
대한이 보고 있던 대형 LED 벽걸이 TV.
그곳에서 지금 아주 이상한 장면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는 미국의 저명한 방송이었다.
그런데 미 해군 5함대의 항공모함 한 척에서 검은 연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저거 에바가 한 거야?”
“네.”
“항공모함에서 불이 나잖아!”
“사실 별거 아니에요. 연기만 좀 많이 났지, 원자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고에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진짜 별거 아닌 것은 아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
한 개의 항공모함 함대면 어지간한 중소국가의 군사력과 맞먹는다고 한다.
미국이 이렇게 대놓고 자랑질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초대형 항공모함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대외무력투사 수단의 정점에 있는 항공모함에서 불이 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분명 외부의 시각은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것 틀림없었다.
“헐! 이거 완전 대박인데.”
“아직 전 시작도 안 한걸요.”
에바가 살며시 웃으며 새롭게 홀로그램 몇 개를 더 띄웠다.
그중 하나에서 새로운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선명한 화질이었다.
“세상에! 저걸 어떻게 구했어?”
대한은 놀라서 들고 있던 팝콘을 떨어뜨렸다.
뉴스에선 이란의 지대공미사일이 대한민국의 민항기 옆을 살짝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방송됐다.
민항기에 타고 있던 승객이 찍은 동영상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동영상의 주인공은 자신이 찍은 동영상에 이런 장면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어진 보도는 이스라엘 정찰기에 달린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었다.
이란군의 대공미사일이 빠르게 날아와 정찰기를 격추하는 장면!
뉴스에선 슬로비디오로 아주 천천히 반복적으로 틀어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란의 미사일이 이스라엘 정찰기를 때리는 모습이 꽤 자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나왔다.
“우와! 에바도 이런 머리를 쓸 줄 아네.”
“저 원래 머리 좋았어요.”
에바 스스로가 머리 좋다는 말에 대한은 움찔했다.
생각해보니 그녀만큼 머리가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쿨하게 그냥 인정하고 말았다.
포기하면 쉽다고, 아니 인정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스터! 다시 유가가 오르고 있어요.”
“잘됐네. 호오! 원유 관련 주가도 오르고 있어.”
대한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가가 오르면 오를수록 그는 돈을 벌게 된다.
그냥 버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번다.
원유 관련 주식이 오르면 오를수록 대한은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에바가 원유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했던 알리파의 선물과 옵션을 모조리 사들여 인수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 알리파는 땅을 치고 있을 것이다.
급하게 던져 버렸던 자신들과는 달리!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미친 듯이 받아먹었던 정체불명의 존재!
그들이 지금 신나게 꿀을 빨고 있는 것을 보지 않고도 잘 알 테니까 말이다.
―막아!
―가지고 있는 주식 다 던져!
―더 이상 던질 주식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유가 상승을 막아야 해!
―원유 관련 주가도 방어해야 합니다.
―당장 상부에 연락해서 긴급사태가 일어났다고 전해.
―대책을 세워달라고 말하겠습니다.
―다시 백악관을 움직여달라고 해줘!
―뉴스 좀 어떻게 해봐! 이제 이걸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잖아.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젠장! 또 떨어졌다. 10분 만에 수십억 달러가 날아갔어.
비밀 투자상황실은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다들 급격한 유가 상승과 관련 주식들의 폭등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홀로그램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대한과 에바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스터! 저들이 상부라고 지칭하는 곳에서 백악관으로 직통 전화를 했습니다.
생방송 뉴스도 급하게 내리려고 하네요.”
“그럼 안 되지.”
“물론이죠.”
에바는 저들이 상부라고 부르는 곳을 주목했다.
장막파의 배후가 분명하니 계속 추적을 해나갔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백악관과 연결하려는 저들의 시도를 방해했다.
전화가 끊기고 스마트폰의 전원이 나가고 대화에 엉뚱한 소음과 잡음이 껴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사사건건 방해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대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언론사에 편집해놓은 동영상을 대대적으로 뿌렸다.
거기엔 항공모함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는 장면이 들어있었다.
물론 이스라엘 정찰기가 이란 미사일에 격추되는 장면도 아주 잘 묘사해놓았다.
더불어 인터넷을 통해 당장 호르무즈해협의 봉쇄가 풀릴 것 같지 않다는 부정적인 뉴스를 퍼뜨리고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에바가 다각적으로 힘을 쓰자 끝내 유가와 원유 관련 주가는 폭등해버렸다.
이제는 투자의 신이 나타나도 대세를 거스릴 수 없게 됐다.
“이겼다.”
“야호!”
대한과 에바는 그 대목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금융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알리파와 장막파가 벌인 뉴욕 대첩!
장막파가 완승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이제 진짜 뉴욕 대첩의 승자가 가려졌다.
시간이 흐르자 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떨어졌다.
그러면서 홀로그램에 떠오른 엄청난 숫자를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돈을 모조리 쓸어온 것 같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젠 이걸 비자금으로 굴리는 데 한계가 왔네요.”
“예전에 언급했던 대로 다양하게 투자하면 되잖아.”
“이제 그러려고요. 주식 현물시장과 주식 관련 파생상품시장뿐만 아니라 채권, 금리, 외환, 에너지, 귀금속, 보석, 원자재, 곡물, 부동산 등 다양한 종목에 투자할게요.”
어느새 주식시장과 파생상품시장이 작게 느껴졌다.
아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사실이 대한에겐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마스터! 뒤통수 작전은 성공입니다.”
“하하하! 그래. 작전명 뒤통수는 아주 대성공이야.”
대한과 에바는 손을 높이 들고 허공에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두 사람이 행복해하던 시각!
장막파의 비밀 투자상황실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반쯤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한순간에 수백억 달러가 날아갔어.
―수백억 달러가 아니라 수천억 달러야. 거기에다 신용으로 끌어다 쓴 자금과 공매도를 친 것까지 합치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하겠다.
―나 이제 회사 그만둬야겠어.
―그만두기 전에 아마 해고를 당할 거야.
―그냥 해고만 당하면 다행이게.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모르겠어.
―하긴 천문학적인 거액을 날려 먹었으니 상부에서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자신만만했던 그들의 표정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장례식에 온 사람들처럼
그들은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신변에 관한 걱정이 눈 앞을 가렸다.
이러다가 며칠 뒤 브루클린 다리 아래에서 시체로 동동 떠내려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이들은 세상을 다 잃어버렸다.
* * *
비커리지 로드 경기장.
삐이익!
와아아아!
휘슬과 함께 거대한 함성이 경기장을 흔들었다.
관중들은 일제히 볼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선수들을 향해 환호했다.
특히 오늘 왓포드 FC를 위해 마지막으로 경기를 뛰는 한 명에 주목했다.
“대한, 대한, 대한, 대한…….”
왓포드 팬들은 그의 이름을 열광적으로 불러댔다.
그 모습에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특히 최근 편파방송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장수원 아나운서와 남희진 해설위원이 거침없이 설레발을 떨었다.
“오늘도 역시 이대한 선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월드클래스를 넘어 신계에 등극한 대한민국의 우리 이대한 선수! 왓포드 축구 팬들이 환호를 넘어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정체불명의 헛소리를 저렇게 둘이 진지하게 해대니 듣는 시청자들까지 헷갈리다 못해 세뇌될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이 골을 너무 잘 넣는다는 데 있었다.
“이제 왓포드를 위한 무료봉사는 끝이군요.”
“그렇습니다. 오늘이 이대한 선수가 왓포드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마지막 날입니다.”
“이대한 선수가 맨시티에 임대로 가게 돼서 참 다행입니다.”
“앞으로 우리 이대한 선수가 주급 40만 파운드를 따박따박 벌게 될 걸 생각하니 제가 더 기분이 좋습니다.”
“맞아요. 저도 괜히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느낌입니다.”
둘은 신나게 대한을 빨아주다가 슬슬 경기에 집중했다.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왓포드가 아주 강팀을 만났습니다.”
“아스날은 현재 리그 10위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스날은 저력이 있는 팀입니다. 쉽게 봤다간 큰코다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죠.”
장수원 아나운서의 말에 남희진 해설위원은 물 한잔을 마시고 본격적으로 썰을 풀었다.
“오늘 아스날의 미켈 감독은 4―2―1―2―1 포메이션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오바메양을 최선방에 두고 사카와 페페 그리고 라카제테를 삼각편대로 뒤를 떠받치며 공격을 담당하게 하고 있죠. 최근 오바메양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폼이 살아있어요.”
“그렇군요. 최근 경기를 보면 오바메양이 3경기 연속 득점포를 가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는 카카 감독은 이대한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니 포메이션 카드 얘기가 아니었던가요?”
“왓포드도 아스날과 마찬가지로 4―2―1―2―1 포메이션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이대한 선수가 없는 포메이션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건 정말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제 둘의 대화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처음에는 좀 말리던 방송국도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워낙 이대한 선수가 잘 뛰어주고 있어서 뭐라고 해도 다 맞아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중계방송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
그러자 아예 이게 장수원과 남희진의 콘셉트라고 인정해버리는 분위기였다.
“카카 감독이 정말 큰 결단을 했어요. 오늘 이대한 선수가 선발로 나온 것으로 아스날은 무슨 짓을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이거 예언인가요?”
“제가 미친 척 예언 한번 해보겠습니다.”
“네, 무슨 예언입니까?”
남희진 해설위원의 똘끼 가득한 짓에 장수원이 오히려 불을 지폈다.
“오늘 아스날은 대량실점을 하게 될 겁니다.”
“단순히 왓포드가 이긴다는 말씀이 아니네요.”
“이대한 선수가 나왔으니 왓포드의 승리는 당연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이대한 선수가 왓포드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이 오늘 마지막이라는 것이죠.”
“아! 그러니까 이대한 선수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전력을 다해 뛸 것이라는 얘기군요.”
“바로 그겁니다.”
삐익!
남희진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심이 날카롭게 휘슬을 불었다.
아스날의 수비수 소크라티스가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서 반칙을 범한 것이다.
“보셨죠? 이제 시작입니다.”
“남희진 해설위원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전반 5분 만에 왓포드에게 좋은 프리킥 찬스가 났습니다. 이대한 선수가 차겠지요?”
“당연합니다. 만약 이대한 선수에게 프리킥을 차게 하지 않는다면 그 감독은 분명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군요. 이대한 선수의 프리킥 성공률이 무려 99%입니다. 어휴! 아주 무시무시하네요.”
“그냥 차면 다 들어간다고 봐야 합니다.”
장수원 아나운서와 남희진 해설위원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프리킥을 준비하는 필드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특히 대한을 비롯한 공격진은 담소를 넘어 농담까지 하고 있었다.
“대한! 내가 찰까?”
“크크크, 그거 장난이지?”
“물론이지. 진짜 내가 차서 안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아마 다들 날 잡아 죽이려고 들 거야.”
데울로페우가 대한의 어깨를 치면서 농담을 했다.
자기 딴에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사실 그건 전혀 필요 없는 짓이었다.
이상하게도 대한은 필드에만 나오면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볼을 찰 수 있는 기대감과 함께 가슴이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