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가벼운 몸풀기>
“전 세계 주요 지수들 잘 확인해!”
“네.”
에바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지를 위로 척 들어 올렸다.
미국 달러화를 기준으로 하는 S&P 500®, Nasdaq 100, DJIA, 영국 기반 지수인 FTSE Russell 100, 일본 기반 지수인 Nikkei 225, 중국 기반 지수인 FTSE China 50 등.
전 세계의 각종 상품을 그녀는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에바는 대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목표로 정해놓은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으음.”
그는 여기서 잠시 망설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도 몇 배 먹을 것이 몇십 배, 아니 몇백 배가 될 수도 있었다.
대한은 치솟아 오르는 과도한 욕심을 간신히 잘라냈다.
이보다 더 크게 터트릴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에바!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자.”
“네, 마스터. 잘 생각하셨어요.”
의외로 그녀는 대한의 결정을 반겼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조이고 조여서 엄청난 이익을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털어버리고 나가는 게 장기적으로 유리하고 안전했다.
여전히 관련 주가는 폭등하고 있었다.
선물과 옵션도 아직 물량을 받아낼 여력이 남아있는 듯 했다.
덕분에 거액의 투자금은 어렵지 않게 많은 이익을 실현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한 시간 쯤 지나자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
“마스터! 이번 투자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수고했어. 에바!”
대한의 칭찬에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칭찬은 언제 들어도 에바에게 기분 좋은 청량제였다.
“천만에요.”
짐짓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대한은 그런 에바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퍼부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돈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에바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것 같은 이런 투자는 할 수 없었을 거야.”
그의 말은 사실이다.
정말 그녀는 대한의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을 했다.
만약 이 모든 일을 인력에만 의존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수백 명의 펀드매니저들이 동원해도 이렇게 빠르고 매끄럽게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코레투자의 펀드매니저와 역외펀드를 담당하는 펀드매니저들이 전혀 동원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이렇게 무리 없이 깔끔하게 투자하고 조용히 이익을 실현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에바의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이이잉!
그때 대한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터치해보니 리나였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대한! 나 리나야!
“리나, 잘 지냈어?”
―물론이지. 방금 에바와 통화하면서 들었어.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던데!
“대박?”
리나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에바를 쳐다봤다.
에바는 대한을 향해 두 손을 옆으로 펼치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이번에 상하이와 홍콩에 투자했다는 거 말이야.
“아! 그거. 우리 코레투자가 좀 벌긴 했지.”
―무슨 소리야? 두 배도 넘게 터졌다던데.
“두 배?”
―응, 나 에바에게 투자제의 듣고 과감하게 300만 달러 넣었거든.
“뭐? 300만 달러씩이나?”
리나가 요새 아주 잘 나가고 있다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금으로 300만 달러나 투자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혹시 에바에게 내 얘기 못 들은 거야?
“응, 사실 이번 투자는 전적으로 에바가 맡아서 하는 거였거든.”
―그렇구나. 어쨌든 나 이번에 350만 달러도 넘게 들어왔어. 그것도 홍콩 달러가 아니라 미국 달러로 말이야. 은행에서 보낸 입금문자보고 놀라서 스마트폰까지 떨어뜨렸다고.
하긴 놀랄 만도 했다.
300만 달러를 투자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5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니.
이 얘기를 듣고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잘됐네. 이번에 그걸로 즐겁게 쇼핑 좀 하면 되겠다.”
―쇼핑은 무슨!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에서 협찬을 하도 많이 해줘서 막상 백화점에 가도 별로 살 게 없다고.
“아니 우리 리나가 그 정도야?”
―이거 왜 이래?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리나야! 크흐흐!
자신감이 이미 하늘을 찌르는 리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대한의 입꼬리도 저절로 귀에 걸렸다.
정말 언제 들어도 활력이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리나 그런데 영국에는 언제 와?”
―아! 미안해.
그의 질문에 리나의 톤이 갑자기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우리 얼굴 못 본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니야?”
―맞아. 그런데 당장 스케줄이 꽉 차서 갈 수가 없어.
“그렇구나.”
―하지만 내가 다음 달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볼게.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적당히 챙기면서 해!”
―그렇게.
대한은 정신없이 바쁜 리나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생색을 낼 수가 없다.
남녀 사이는 밀당과 타이밍 싸움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일정과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는 대한을 리나가 이길 방법은 없었다.
30분쯤 수다를 떨어대는 리나와 통화를 했다.
끊기 싫은 통화를 간신히 끊어야 하는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지이이잉!
그런데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또다시 그의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구지?”
탁자에 내려놓으려던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자 화면에 류연의 이름이 보였다.
“여보세요!”
―대한!
“유연!”
―잘 지내고 있지?
“응,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유연은 어때?”
―나도 대한 덕분에 지금 기분 최고야!
“그래! 무슨 일인데?”
대한은 짐작이 갔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류연이 신나게 얘기를 시작했다.
―혹시 이번에 투자한 거 대성공했다는 얘기 못 들었어?
“아! 그것 때문에 전화했구나.”
―아니야. 꼭 투자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야.
그가 슬쩍 시무룩한 척하자 류연은 당황해서 서둘러 아니라고 도리질을 했다.
―지금 어디야? 집이야?
“응, 집에서 쉬고 있어.”
―그렇구나. 사실 투자 얘기는 핑계고 대한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류연의 말에 대한의 광대가 승천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다른 법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참 말도 예쁘게 했다.
“나도 마침 류연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하려고 했던 참이야.”
―정말?
“그럼 정말이지.”
대한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잘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립서비스라면 립서비스이지만…….
배려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싶었다.
―나 다음 주에 한 이틀 시간 나는데……. 갈까?
“응, 보고 싶다. 꼭 와라!”
―알았어.
투자 얘기는 쏙 들어가고 둘은 금세 달달해졌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나자 그제야 대한은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투자를 얼마나 했는데?”
―50만 달러 넣었어.
“와! 많이 넣었네.”
―헤헤! 내가 좀 통이 크지.
류연은 자신이 과감하게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리나가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를 벌어갔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안색이 굳어질 것이다.
하지만 대한은 전혀 류연에게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벌었어?”
―에바한테 내 얘기 안 들었어?
“그런 건 고객의 비밀이라서 나한테 일일이 얘기해주지 않아.”
―그런 거구나. 나 75만 달러 들어왔어.
“우와! 엄청 벌었다.”
대한은 약간 과장되게 얘기했다.
그러자 류연은 그의 반응에 좋아죽겠다는 듯 목소리마저 상기됐다.
―크훗!
“좋겠다.”
―내가 영국에 가면 이번에 번 돈으로 예쁜 차 한 대 뽑아줄게.
“차를?”
―응, 대한이 타고 다니는 차들은 너무 투박해.
“투박하다고?”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뼈를 시려왔다.
나름 합리적이면서도 품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류연의 눈에는 전혀 그게 아니었었나 보다.
‘하긴 방탄 차량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녀의 팩트 폭행으로 인해 대한은 갑자기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바를 불러 하소연했다.
―에바! 들었어?
―네.
―내가 타고 다니는 차들이 하나같이 투박하단다.
―즉시 조처를 하겠습니다.
―무슨 조처?
―예쁜 방탄 차량으로 특별히 주문 제작하겠습니다.
―그, 그래.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샘플이 없으니 에바에게 뭐라고 하기도 좀 곤란했다.
―……그래서 이번에 가면 예쁜 차 한 대 뽑자고. 알았지?
“응. 알았어. 고마워.”
대한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한껏 기분이 업(up)된 류연은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다음 중에 보자.
“그래. 조심히 와!”
―알았어. Bye! 쪽!
“안녕! 쪼옥!”
류연은 ‘쪽’ 소리가 잘 들리게끔 소리를 내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대한도 어쩔 수 없이 같이 키스 소리를 내야 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자 왠지 기운이 쫙 빠져버렸다.
그는 몸으로 힘쓰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지쳐버린 것만 같았다.
“오렌지주스 좀 드세요!”
“고마워!”
마침 에바가 예쁜 쟁반에 오렌지주스를 담아왔다.
대한은 유리잔을 잡고 입에서 쏟아붓듯 벌컥벌컥 주스를 마셨다.
“한잔 더 드릴까요?”
“그래.”
그는 사양하지 않고 주스를 거듭 들이켰다.
그제야 지친 몸에 조금이나마 활력이 도는 기분이었다.
“마스터!”
“응?”
“이제 슬슬 전면에 나서야 할 시기가 다가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에바의 뜬금없는 소리에 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코레 그룹의 지주회사인 ‘코레’에 투자를 하셔서 일정한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을 겁니다.”
“흐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다가오자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그래도 코레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계신 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마 난리가 났을 겁니다.”
“더 이상 사람의 시선을 두렵지 않아. 좀 귀찮을 따름이지.”
그동안 대한은 대한TV 채널을 통해 방송하면서 내공을 키워왔다.
그래서 이젠 사람들의 시선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악플에도 일일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선을 넘으면 그냥 조용히 로펌에 넘겨버렸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코레 그룹과 계약한 막강한 로펌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대한 대신 악플러들을 소리 없이 응징해줬다.
“천억 달러 이상 한꺼번에 투자금을 움직이면 눈에 안 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그 이상은 될 수 있는 한 동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점점 불어만 가는 투자금을 어쩌려고?”
그의 질문에 에바는 홀로그램을 띄우는 것을 대답했다.
“투자를 아예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을 중심으로 주식 현물시장과 주식 관련 파생상품시장은 계속 공격적으로 투자를 해나갈 겁니다.”
“……?”
“대신 한 곳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른 국가와 다른 금융시장으로 분산시킬 생각입니다.”
“다른 국가와 다른 금융시장?”
대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도 일단 에바가 하는 말을 차분하게 들었다.
“뉴욕증권거래소와 상업거래소(NYMEX), 나스닥,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와 상업거래소(CME), 옵션거래소(CBOE) 등은 앞으로 코레투자의 주 투자대상이 될 거예요.”
“아무래도 규모와 거래액에서 다른 시장과 차이가 크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국 외 EU(런던, 프랑크프루트 등), 상하이, 홍콩, 도쿄, 싱가포르, 중동 등 국제시장의 규모도 만만치 않아요. 그래서 이들도 코레투자에서 공격적인 투자대상으로 정했어요.”
“지금도 조금씩 투자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물론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국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자동으로 끄덕여졌다.
“일리 있는 말이네.”
“거기에 한 발 더 나가서 이제는 주식 현물시장과 주식 관련 파생상품시장뿐만 아니라 채권, 금리, 외환, 에너지, 귀금속, 보석, 원자재, 곡물, 부동산 등 다양한 종목에도 투자할 생각이에요.”
“시장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지?”
“방금 언급한 다양한 금융시장은 이미 주식시장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장해 있어요. 그것도 현물은 물론이고 선물과 옵션을 비롯한 다양한 파생상품이 즐비하죠.”
에바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군침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대한은 자신의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고 거친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