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내가 제일 잘 나가>
삐익!
경기가 재개됐다.
사우샘프턴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승리를 예감한 왓포드 선수들은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압박해왔다.
그러자 결국 사우샘프턴 공격수는 볼을 뒤로 빼다 빼앗기면서 넘어졌다.
그는 주심을 보며 반칙이 아니냐는 뜻으로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주심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왓포드의 수비수 도슨이 캐스카트에게 패스를 했다.
캐스카트는 미드필더인 두쿠레에게 볼을 밀었다.
두쿠레는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대한에게 패스했다.
그때 데울로페우가 빠르게 골대를 향해 돌진했다.
사우샘프턴 수비수 셋은 일제히 대한을 감싸며 압박했다.
대한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볼을 위로 툭 쳐올렸다.
툭!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볼!
놀랍게도 골키퍼와 데울로페우 사이에 정확히 떨어져 내렸다.
여기서 데울로페우가 볼을 잡았다면 아마 슛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울로페우는 정확히 자신의 앞쪽으로 날아오는 볼을 굳이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가볍게 발 안쪽으로 툭 쳐서 방향만 바꿔놓는 것으로 충분했다.
퉁!
군 골키퍼는 그만 역동작에 걸리고 말았다.
몸의 균형을 잃으면서도 눈은 볼을 끝까지 쳐다봤다.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축구공.
군 골키퍼는 그저 허무하게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와아아아!”
“골!”
또다시 골이 터졌다.
이제 왓포드의 골 가뭄은 완전히 해소됐다.
데울로페우는 미친 듯이 그라운드를 달려갔다.
그러다가 누가 이런 멋진 킬패스를 해줬는지 깨닫고 돌아왔다.
대한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웃는 데울로페우!
둘은 마치 헤어진 연인이 재회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홈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들의 주위로 동료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다들 서로의 몸을 얼싸안고 기쁨을 함께 나눴다.
땀 냄새 풀풀 나는 남자의 몸을 안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때만큼은 다들 흥분해서인지 쉰내를 맡지 못했다.
한편 사우샘프턴 선수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15분이 지나있었다.
카카 감독은 대한을 바로 빼버렸다.
전격적인 선발 기용에 맞먹는 전격적인 선수교체였다.
이미 4골이나 들어갔는데 굳이 그의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짝짝짝짝!
대한이 선수 교체되어 나오자 비커리지 경기장의 모든 사람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그 장면은 정말 감동이었다.
장수원 아나운서와 남희진 해설위원도 그 모습을 보고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한TV의 시청자들과 스포츠티비의 시청자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대한은 하늘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관중들과 같이 손뼉을 치면서 그라운드를 빠져나왔다.
카카 감독이 그를 꼭 껴안고는 정말 수고했다며 등을 두드려줬다.
대한 대신 들어가는 선수로 그레이가 당첨됐다.
그는 필드 안으로 들어가며 파이팅을 외쳤다.
그런데 대한이 교체되어 나가고 난 뒤!
경기는 마냥 지루하게 흘러갔다.
왓포드 선수들이 어떻게든 골을 하나 넣어보려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볼은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사우샘프턴은 공격은 고사하고 그냥 수비에 전력을 다했다.
어떻게든 더는 골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아니면 빨리 경기가 끝나기만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에 들어갔을 때!
두쿠레의 기습적인 중거리 슛이 터졌다.
그게 이날의 마지막 골이었다.
삐이익!
주심의 긴 휘슬로 마침내 경기는 끝났다.
최종 스코어는 5:0.
왓포드의 대승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만장일치로 ‘맨 오브 더 매치’에 대한이 뽑혔다.
그는 두 경기 연속 ‘맨 오브 더 매치’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누구도 이 결과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한은 충분히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영국의 언론들은 대한의 이 미친 활약을 대서특필했다.
방송국은 특집을 만들어 그의 과거와 현재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더불어 대한의 개인방송인 대한TV와 그와 합방했던 미녀들을 한 명씩 자세히 소개했다.
프리미어리그에 데뷔하자마자 두 경기에 6골을 몰아넣은 어린 한국 선수!
뚱보였다가 살을 빼고 몸짱이 된 사연!
그와 합방한 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미녀들!
왓포드에게 주급으로 겨우 1만 파운드를 받고 있지만, 대한TV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는 소식까지.
도무지 뭐 하나 이슈되지 않을만한 게 없었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대한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사람들은 또 하나의 화끈한 시합을 보러 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 * *
런던, The O2 Arena.
템스(Thames)강이 굽이치는 모퉁이(곶)에 세워진 아레나.
중앙에 세워진 옥타곤을 제외하고,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공식적으론 17,000석이라고 했다.
그런데 얼핏 봐도 플러스알파가 있는 게 확실하다.
‘UFC MMA 런던’의 좌석은 이미 매진된 상태.
홈페이지에서 판매를 시작한 지 단 12분 만에 모든 표는 동이나 버렸다.
그만큼 이번 종합격투기 시합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선수 대기실 A.
커다란 전면 거울을 보며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대한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올리버 올리베이라가 서 있었다.
대기실 입구의 의자에는 페드루 코치가 세컨드에게 뭔가를 열심히 지시하고 있었다.
“왜 왔어?”
대한이 거울을 통해 올리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불렀잖아.”
“내가 언제?”
“하이스가 그러던데.”
“아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올리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하면 나 치겠다.”
“크흠.”
대한의 말에 올리버는 슬그머니 주먹을 풀었다.
쪽은 쪽대로 팔리고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여기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더 이상할 것 같은 분위기다.
올리버는 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너 나한테 미안하지?”
“그래. 미안하다. 내가 여행이 좀 길었어.”
“앞으로 나한테 잘할 거지?”
“그래. 잘할게. 방황이 길었던 점 정식으로 사과할게.”
대한은 올리버에게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올리버는 그의 손을 잡았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포옹하며 등을 두드렸다.
“풋!”
“크크!”
그들은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다.
물론 대한이 좀 잘못을 하긴 했다.
하지만 나름, 방황하고 있다는데 그걸 이해 못 해서 좀생이처럼 굴었던 올리버도 전혀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올리버는 대한과 화해를 하고 나자 속이 다 후련해졌다.
“그동안 3번 시합을 했다면서?”
“응, 전부 1라운드에 KO 시켜버렸지.”
“올! 그럼 전승이잖아.”
“그렇지 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올리버의 입꼬리가 승천 중이라는 것은 누구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전적이 어떻게 되냐?”
“현재 5전 5승 5KO야!”
“우와! 너 좀 하는구나.”
“크크크, 내가 좀 하지.”
“그래서 타이틀매치는 언제 하는데?”
“그, 그게 아직 좀.”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아직 타이틀매치를 잡기는 요원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전승 가도를 달리는 있다니 올리버가 달리 보였다.
“인기 좀 있겠는데.”
“그래도 너만 하겠냐?”
인기에 대해 언급하자 올리버가 꼬랑지를 확 내렸다.
사실 몇 번 싸우지도 않았는데 대한의 인기는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현재 UFC와 벨라코어 FC를 통틀어 종합격투기 선수로 그의 인기를 따라갈 자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엄청난 구독자와 팔로워수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최근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축구선수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똑똑똑!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페드루 코치가 대한을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어주자 건장한 경호원들이 먼저 보였다.
그들 사이로 스태프 복장을 한 청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대한 선수, 5분 뒤에 나와주세요. 곧 매치가 시작됩니다.”
“알겠습니다.”
대한이 한 손을 들고 대답했다.
그러자 청년은 밝은 미소를 짓고는 쌩하고 사라졌다.
“나도 가봐야겠다.”
“그래. VIP석에서 내가 하는 것 잘 보고 배워!”
“크으.”
그의 말에 올리버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뭐 그래 봤자 사소한 반항일 뿐이다.
하이스가 뭐라고 올리버를 꾀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올리버도 내심 대한과 다시 화해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싼 돈 들여가며 영국까지 올 놈이 절대 아니다.
올리버가 선수대기실을 나가자 대한은 스트레칭으로 마무리했다.
“대한! 가시죠.”
“네, 페드루 코치.”
페드루 코치는 대한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싱긋 미소를 짓는 페드루 코치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호의가 가득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써도 된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영국까지 불러줬다.
고마움에 절로 충성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대한! 꼭 이겨야 해요. 내 전 재산 다 걸었어요.’
페드루 코치는 마음속으로 대한이 이기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의 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나름 거액을 투자했다.
그러면서도 대한에게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을 건 것은 비단 페드루 코치만이 아니었다.
올리버를 비롯해 하이스, 고리나, 류연, 나나, 한새롬까지.
그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대한의 승리에 돈을 걸고 내기를 했다.
페드루 코치가 앞장을 서고 대한이 그 뒤를 따라갔다.
코치가 데려온 세컨드들이 대한의 좌우에서 그를 보호했다.
빵빠라빵!
대한이 경기장 출입구에 서자 팡파르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중앙에 옥타곤이 보였다.
그 위로 둥그런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에 있었고, 그 바깥을 꽉 채운 화면에는 대한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아레나는 빈 좌석은커녕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신호를 받자 그들이 옥타곤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와아아아!”
아레나를 찾은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대한은 그 소리에 말초신경이 자극받아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축구 경기장에서 겪은 것과는 좀 다른 기분이었다.
옥타곤 안으로 들어가자 반대편에 오늘의 시합 상대가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UFC 전(前) 미들급 챔피언 ‘존 위태커’였다.
어제 계체량을 가볍게 통과하며 처음으로 얼굴을 봤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호주의 MMA 선수 존!
복싱, 합기도, 가라테, 주짓수 등 다양한 종목을 수련했다.
웰터급에서 죽을 쓰다가 감량문제로 미들급으로 전향해 초신성이 되어버린 케이스다.
미들급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강력한 타격과 완벽한 테이크다운 디펜스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한은 글러브와 마우스피스를 끼고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상대 선수의 움직임을 살펴봤다.
마찬가지로 존 위태커도 고개를 좌우로 꺾으면서 몸을 풀었다.
그런데 뭐라고 자꾸 혼자 중얼거리며 대한을 노려봤다.
나름대로 시합 전에 무슨 중대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말고.
그때 아나운서가 들어와 멘트를 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UFC 런던 MMA 메인 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
관중은 그 말에 벌써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쥔 손을 흔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아나운서의 음량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블루 코너, 프리미어리그의 초신성이자 대한민국에서 날아온 학살자(Slayer)! 이대한!”
“와아아아!”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중들의 열렬한 함성이 아레나를 울렸다.
대한은 옥타곤의 중앙으로 나가 한 손을 높이 들고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곧바로 아나운서가 상대 선수를 소개했다.
“레드 코너! 25전 20승 5패! 호주에서 온 ‘The Reaper’ 존 위태커!”
“와아아아!”
이번에도 관중의 열렬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굳이 비교하자면 대한이 존보다는 조금 위였다.
아무래도 런던 북서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왓포드 FC의 축구선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대한은 살짝 긴장했다.
그동안 싸웠던 자들과는 달리!
존 위태커는 UFC 미들급 챔피언까지 올랐던 선수다.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종합격투기 정상급 선수와 맞붙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가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이기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아마 그건 옥타곤 아래에서 대한을 찍고 있는 대한TV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판이 대한과 존을 중앙으로 불러서 주의사항을 얘기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며 심판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가 주먹을 한번 부딪치고 각자 자신의 코너로 돌아갔다.
대한은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자세를 낮췄다.
언제든지 달려들겠다는 의지가 풀풀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