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자폭>
“꼼짝 마!”
권총을 손에 쥐자 마르첼로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너희는 이제 끝장난 거야.”
그는 서둘러 테이블 위의 버튼을 마구 눌렀다.
그게 비상벨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대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바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마르첼로를 가리켰다.
아니 마르첼로가 들고 있는 권총을 가리켰다.
“카모라 성은 이미 저희가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마르첼로는 지금 총을 쏠 수 없습니다.”
“뭔 개소리야?”
에바의 말도 끝나기 전에 마르첼로는 대한을 향해 권총을 쐈다.
철컥철컥 철컥철컥!
하지만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권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마르첼로는 꿀꺽 침을 삼켰다.
동시에 대한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어렸다.
대한은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긴 마르첼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도도도도!
순간, 대한의 신형이 마르첼로를 향해 일직선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당혹한 표정을 짓던 마르첼로는 그를 향해 급히 권총을 내던졌다.
하지만 대한은 고개를 옆으로 슬쩍 트는 것만으로 그걸 간단히 피해냈다.
퍽! 파박 팍팍!
그의 주먹이 마르첼로의 얼굴로 날아갔다.
마르첼로도 물러서지 않고 같이 주먹을 휘둘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주먹과 발을 휘두르며 빠르게 치고받았다.
생각보다 마르첼로의 격투 실력이 뛰어났다.
어지간한 UFC 선수보다도 훨씬 강한 것 같았다.
더구나 마르첼로는 UFC가 사용을 금지한 규정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첼로가 아무리 반칙을 쓰고 날고 기어도 대한의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아니 이미 처음부터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그는 단 한 대도 정타를 맞지 않고 마르첼로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
퍼벅 퍼벅 빡! 퍼버벅!
어느샌가 마르첼로는 두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들어오는 연타에 전신이 난타당했다.
금세 눈이 밤탱이가 되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얼굴은 찐빵같이 부풀어 올라 만신창이로 변해갔다.
멀쩡한 인간의 얼굴이 골룸으로 변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르첼로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어떻게든 대한에게 한 방 먹이려고 발악을 했다.
화풀이하려고, 대한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마르첼로는 이미 방바닥에 개구리처럼 쫙 뻗어있을 것이다.
빠각! 우드득!
“크아악!”
결국, 마르첼로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두 팔은 도저히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있었다.
한쪽 무릎은 박살이 났다.
반대편 발목은 돌아가서 완전히 아작났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통증!
마르첼로는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으악! 으아악!”
그때, 모니카가 일어섰다.
그녀는 에바를 쳐다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리곤 처연한 눈빛으로 대한을 바라봤다.
“대한!”
“모니카!”
사람이 눈으로 말을 할 수 있을까?
전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모니카는 그에게 모든 얘기를 눈으로 하고 있었다.
대한을 향해 쏟아지는 그녀의 눈빛!
온갖 감정의 편린이 전부 담겨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왔지?”
“아니야.”
그의 말에도 그녀는 가만히 고개만 흔들었다.
에바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대한에게 속삭였다.
―해독제를 주사해서 마약의 기운을 중화시켰습니다.
‘수고했어.’
그는 에바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대한의 시선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니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마르첼로를 향해 다가갔다.
불빛에 비친 하얀 나신이 너무도 애달파 보였다.
모니카는 작게 대한을 향해 속삭였다.
“잠깐 둘이 할 얘기가 있어. 뒤로 좀 물러서 줄래?”
“어! 알았어.”
그녀의 부탁에 그는 할 수 없이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에바도 마찬가지로 눈치껏 뒤로 물러섰다.
모니카는 대한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런 후!
마르첼로에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마르첼로가 미친 듯이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안 돼! 모니카!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러지 마.”
대한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에바가 갑자기 눈에 띄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모니카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벽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곤 다시 마르첼로에게 돌아왔다.
마르첼로는 자꾸만 모니카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허탈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모니카의 시선이 대한을 향했다.
“대한!”
“응?”
“나 너 많이 좋아했어.”
“나도 모니카 좋아해.”
둘은 서로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전혀 밝은 미소가 아니었다.
대한의 표정은 마치 우는 듯했다.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애달파 지독한 슬픔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모니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담담히 고백했다.
“솔직히 나 널 사랑했던 것 같아.”
“아! 모니카.”
대한에게 그녀의 말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모니카에 의해 즉시 제지당했다.
그녀는 단호히 한 손을 치켜들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에 대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모니카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난 이미 너무 더럽혀졌어. 몸도 마음도 그리고 내 피도.”
“아니야. 모니카! 넌 더럽지 않아! 내가 널 깨끗하게 씻겨줄게.”
“대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대한의 말에 모니카는 방긋 웃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말 세상이 환해질 정도로 밝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대한은 뭔가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갑자기 미칠 듯한 불안감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뭔지 살펴봤다.
작은 공이었다.
쇠로 만든 공!
“안녕! 나를 잊지 말아줘!”
“안 돼!”
“모니카!”
모니카는 대한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봤던 그녀의 미소 중에 단연 최고로 멋진 미소였다.
그런데 모니카의 눈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마르첼로는 뼈를 쑤셔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비명처럼 크게 소리를 질렀다.
대한도 아찔하게 다가오는 불길한 예감에 그녀의 이름을 다급히 외쳤다.
팅!
쇠공에 붙은 클립 같은 게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모니카는 무너지듯 마르첼로의 몸 위로 엎어졌다.
그제야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대한이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에바에 의해 원천 봉쇄당했다.
에바는 대한의 몸을 꽉 붙잡고 힘껏 한쪽으로 밀었다.
둘의 몸이 하나가 되어 미끄러지더니 데굴데굴 굴렀다.
그 순간!
쾅!
방을 뒤흔드는 강한 폭음이 일었다.
충격파가 일어나 창문의 유리창을 모조리 터트렸다.
후두둑 후두두둑!
사방으로 붉은 비가 쏟아졌다.
그에 더해 산산이 조각난 그을린 살점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대한은 급히 에바의 몸을 밀어냈다.
그리곤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모니카를 쳐다봤다.
“안 돼!”
대한은 두 주먹을 꼭 쥐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파칭!
극도의 절망감이 담긴 절규!
자신도 모르게 마력이 분출하며 주변에 강력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방으로 터지듯 밀려났다.
그건 에바의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력의 파동에 맞은 에바의 몸이 벽으로 쭉 밀리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쿵!
벽에 강하게 부딪힌 에바!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바로 몸을 일으켰다.
에바는 대한이 걱정됐다.
그래서 얼른 달려가 그의 몸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마스터! 정신 차리세요.”
“에바! 모니카가 죽었어.”
대한은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덜덜 떨리는 그의 목소리!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인 모니카가 눈앞에서 죽었으니 그것도 자폭해서 몸이 산산이 터져 나갔다.
사실 대한이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모니카가 자폭했어. 왜? 왜 그랬을까?”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횡설수설했다.
그때 에바가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마스터! 정신 차리세요. 모니카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뭐야? 그게 정말이야?”
대한의 눈에 기광이 흘렀다.
“뇌가 살아있으면 아직 죽은 게 아니에요. 몸은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어요.”
“그럼 살려! 당장 모니카를 살려내라고.”
“네, 마스터.”
그의 비명 같은 명령에 에바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녀는 즉시 우주셔틀을 불러들였다.
카모라 성 상공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우주셔틀!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와 모니카의 방 발코니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우주셔틀의 모습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바를 비롯한 안드로이드와 로봇은 우주셔틀의 실체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치이익!
L1 리사가 다가와 모니카의 머리에 뭔가 하얀 액체를 뿌렸다.
그러자 모니카의 머리가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렸다.
L2 틸란도 마르첼로의 머리에 하얀 액체를 뿌려서 급속냉동을 시켜버렸다.
리사와 틸란은 투명한 용기를 가져왔다.
그리곤 모니카와 마르첼로의 머리를 차례로 넣었다.
대한은 피와 살점 그리고 그을음으로 가득한 방안에 서서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다.
“마스터! 같이 올라가시죠.”
에바의 말에 그는 뭔가에 홀린 듯 리사와 틸란의 뒤를 따라갔다.
방문이 열리고 B1 최강철과 B2 강성한이 나타났다.
문밖으로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마르첼로의 심복들이 눈에 들어왔다.
―B1 최강철! B2 강성한! 1분대를 이끌고 카모라 성을 봉쇄해! 포로들은 지하 감옥에 가둬놔!
―M1 김철수! M2 이영수! 마스터를 따라가서 보호해!
―H1 제니와 H2 야엘은 이곳을 말끔하게 정리해라!
에바는 로봇과 안드로이드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런 후 발코니를 향해 뛰어갔다.
허공을 향해 훌쩍 띄우자 순간 그녀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우주셔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웅!
작은 공명음이 한번 들렸다.
그러자 우주셔틀이 빠르게 하늘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하고 무지막지한 속력으로 대기권을 갈랐다.
우주셔틀은 지구 정지궤도를 돌고 있는 우주탐사선 히릭스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닭이 알을 품듯 히릭스가 우주셔틀을 부드럽게 품었다.
우주탐사선의 아래로 거대한 초록색 별!
지구가 거대한 동체를 천천히 회전시키고 있었다.
* * *
―여기는 어디지?
―아! 난 죽었구나.
―천국에 올라왔나?
―아니지 자폭을 했으니 천국에서 날 받아주지는 않을 거야.
―그럼 여긴 지옥인가?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
―답답해.
모니카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 그녀의 마음속으로 누군가의 의사가 강하게 파고들었다.
―모니카!
―누구세요?
―난 에바에요.
―천사인가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
그곳에서 모니카는 처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모니카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네에?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당신의 몸을 사라졌지만, 아직 뇌는 살아있어요.
―아!
모니카는 에바의 말에 깜짝 놀랐다.
뇌만 살아있다니…….
이건 살았지만 정말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죠?
―몸을 재생하려고 해요.
―그게 가능한가요?
―난 가능해요.
―아! 천사니까 가능하겠군요.
에바의 말을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모니카.
하지만 굳이 에바는 그녀의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았다.
―모니카의 몸을 지금부터 재생할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나와 약속을 해줘요.
―무슨 약속이요?
―앞으로 이대한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해줘요.
―아! 대한.
모니카는 갑자기 여기서 왜 대한의 이름이 나오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죽기 직전에 깨달았다.
자신은 대한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절대 마르첼로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거면 되나요?
―하나 더 있어요. 여기서 나눈 대화는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돼요.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모니카는 아주 쉽게 약속을 했다.
죽은 사람을 살려준다는데 이 정도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생각했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꼭 대한과 함께, 대한을 위해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에바의 말에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모니카의 약속을 믿을게요. 지금부터 몸을 재생합니다. 부디 약속을 어겨서 몸이 녹아버리는 고통을 당하지 않길 바래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모니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마치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투였다.
―과거의 몸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지금 모니카의 몸은 어린 아기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몸이에요.
―혹시 처녀막까지 그대로란 말인가요?
―당연하죠. 모니카는 이제 순결한 처녀가 되는 거예요.
―아!
에바의 말은 은혜이자 구원이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는 기쁨에 큰 희열을 느꼈다.
이건 정말 예수님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모니카는 자신에게 이런 은총을 내려주신 하나님과 천사 에바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에바는 모니카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오해를 풀어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모니카는 천사 에바(?)의 도움으로 새롭게 순결한 처녀로 태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