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그린라이트>
퉁!
그러나 그가 벽을 손으로 한번 치자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
벽이 홍해처럼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파라다이스였다.
특급호텔 레스토랑을 능가하는 격조 높은 실내장식!
창가에 자리해 속이 다 시원해지는 전망 좋은 자리!
커다란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맛있는 냄새를 풍겨대고 있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한 한식 요리들!
“우와!”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면서 별빛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는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딴 고민을 1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갈비, 불고기, 비빔밥, 순두부찌개, 김밥, 잡채, 양념치킨! 다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는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의 윗부분을 잡았다.
그러자 류연은 대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냉큼 의자에 앉았다.
살짝 발로 의자를 밀어준 후!
대한은 테이블을 돌아 건너편에 앉았다.
“많이 드세요.”
“네, 오늘은 진짜 많이 먹을 거예요.”
대답하는 류연의 얼굴엔 벌써 행복감이 가득했다.
“앗 참! 식사하기 전에 사진부터 찍어야죠.”
“내가 찍어드릴게요.”
그녀는 서슴없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테이블 위의 한식 요리와 류연의 얼굴이 잘 나오게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버튼을 누를 때마다!
류연은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예쁘게 나오려고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대한은 자꾸만 한쪽으로 가려는 시선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나중에는 그것도 힘이 들자 그냥 배틀푸르나(SSS)를 운용해버렸다.
시원한 마력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제야 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사진은 아주 잘 나왔다.
“예쁘게 잘 나왔네요.”
“어디에 올릴 거예요?”
“제 페이스노트와 원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같이 한 장 찍을까요?”
“그럴까요!”
대한은 웃으며 몸을 뒤로 돌렸다.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둘의 모습이 잘 나오게 사진을 찍었다.
찰칵!
워낙 인물들이 좋아서 그런지 정말 사진은 잘 나왔다.
그녀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젓가락을 든 류연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모든 적을 먹어치우리라 다짐하는 장군의 기개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모습에 대한은 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잠시 망설이던 류연은 결국 조금씩 골고루 먹어보기로 했다.
“와! 맛있다.”
그녀는 연신 감탄하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대한도 류연을 바라보다 밥을 먹었다.
덩치도 있었고 소화도 잘 시키는 대한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먹으면서도 살이 찌지는 않을까 고민을 해야 했다.
남들 먹을 만큼 충분히 먹었다고 생각하자 류연은 억지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좀 더 드시지 않고요?”
“이 이상 먹으면 다이어트 할 때 힘들어져요.”
“그 몸에서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대한은 말을 하면서도 시선이 그녀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무의식중에 저곳은 좀 빼도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그건 대한이 몰라서 그래요. 드러나지 않는 군살이 제법 있어요.”
“제가 볼 땐 굳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적당히 운동하고 식이요법을 병행하세요.”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류연은 어렸을 적부터 시선에 민감했다.
남자들이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것을 자주 봤다.
때론 시선으로 강간이라도 하려는 듯 음탕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고 치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큰 가슴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의 상징이었다.
누군가 가슴을 쳐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곤 했다.
그로 인해 어깨가 약간 앞으로 구부러지고 허리도 좀 아팠다.
그런데 대한은 달랐다.
신기하게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좋았다.
눈빛이 맑아서 그런 걸까?
가슴을 쳐다봐도 전혀 수치스럽지가 않았다.
물론 조금 부끄럽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 계속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정말 과감한 옷차림을 했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돈을 주면서 입으라고 해도 절대로 입지 않을 옷이었다.
결과는 나름 훌륭했다.
예상대로 대한은 자신의 몸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뭔가 간신히 참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자제력이 아닐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대한은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걸어갔다.
“커피 마실래요?”
“네.”
“아메리카노? 아니면 라떼?”
“아메리카노로 주세요.”
“네, 잠깐만 기다려줘요.”
그는 직접 머그잔에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가득한 머그잔 두 개.
대한은 두 손으로 머그잔을 들고 다가왔다.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좋아요.”
대한은 류연을 쳐다봤다.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두 곳 있었다.
자신이 머무는 게스트룸과 반대편으로 보이는 어두운 미지의 공간!
류연은 과감하게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함께 대한은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기자 이에 맞춰 주변이 조금씩 밝아졌다.
이내 탁 트인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대한은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이곳은 식당과는 달리 아주 밝진 않았다.
벽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새까만 대리석이었다.
천장은 알 수 없는 신비한 광원으로 인해 은은한 간접조명을 선사했다.
창가에 놓인 모던한 디자인의 흰색소파.
류연은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손을 소파를 쓸어보며 그 부드러운 감촉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인상이 선한 그녀가 웃자 참 보기 좋았다.
어느새 대한의 입가에도 미소가 돌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여기 있어요.”
“고마워요.”
대한과 류연은 각자 머그잔을 들고 커피를 마셨다.
향긋한 커피의 향기가 입안을 깨끗이 헹궈주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신듯하면서도 고소한 뒷맛.
뭔가 굉장히 수준 높은 로스팅 솜씨 같았다.
그녀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대한도 커피의 맛이 마음에 들었다.
펜트하우스에 들인 가전제품들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했던 에바의 말이 기억났다.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원두커피 자체도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앞으로 자주 애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때요? 입맛에 맞아요?”
“아주 맛있어요. 커피를 자주 마시는 편인데 이 정도의 커피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이제 커피 때문이라도 여길 자주 찾아와야겠어요.”
“언제든지 오세요. 마음껏 드실 수 있도록 제가 커피를 뽑아 드릴게요.”
대한의 대답에 류연은 심쿵했다.
뭔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것만 같았다.
하긴 그렇게 들이댔는데 모른다면 그건 목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류연은 조심성을 잃지 않았다.
괜히 힘들게 차린 상을 실수로 몽땅 엎어버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한국에는 며칠이나 있다가 갈 거예요?”
“사흘이요.”
“아주 짧네요. 아닌가? 류연 정도의 스타라면 아주 긴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더 있고 싶지만, 영화홍보 일정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그녀는 마치 변명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사흘 동안 계속 여기 계실 거죠?”
“왜요? 혹시 어디 여행가세요?”
“아니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류연이 여기 있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어요?”
대한의 말에 류연은 몸이 짜릿해졌다.
말이 달콤하다는 표현을 쓰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이 순간!
그의 말은 어떤 초콜릿이나 사탕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아까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순간 그녀는 얼음 땡이 되어버렸다.
대한을 바라보는 류연의 눈빛은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류연의 얼굴이 금세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저쪽 화장실을 쓰세요. 서랍 안에 손님용 칫솔과 치약이 있어요.”
“네.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류연은 화장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대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편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새 칫솔을 꺼내 치약을 묻혔다.
그리곤 열심히 양치질했다.
깨끗하게 이빨을 닦고 나자 구강청결제를 입에 넣고 가글링을 했다.
그런 후 손을 깨끗이 씻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 류연이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걸어왔다.
대한은 어쩐지 류연이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소파 앞에 오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게 뭔가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 아니에요.”
“그럼 이쪽으로 와서 같이 앉아요.”
“아! 네.”
대한의 말에 류연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앓던 이가 쑥 뽑히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옆으로 몸을 살짝 옮기자 그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 순간, 대한은 알 수 있었다.
류연이 뭘 원하는지를 말이다.
소파는 절대 좁지 않았다.
같이 앉자고는 했지만 얼마든지 떨어져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그런데 그녀는 서로의 궁둥이가 살짝 닿을 거리까지 바싹 다가와 앉았다.
따뜻한 체온이 바로 느껴지는 거리였다.
대한은 천천히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류연의 이름을 불렀다.
“류연!”
“대한!”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 대한의 이름을 불렀다.
맑은 갈색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운 아미에 선한 눈매가 참 예뻤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코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대비되는 주홍빛 입술!
하지만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얇은 입술을 자꾸만 잘근거리고 있었다.
대한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기다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류연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윽한 눈에는 애정이 가득 차올랐다.
볼은 발갛게 물들어갔다.
치명적인 유혹 덩어리도 덩달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래서 자꾸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대한은 손을 들어 가만히 그녀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는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류연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애정이 담겨있던 눈은 조금씩 변해갔다.
어쩐지 눈빛에 열정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간지러운지 그녀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뒤틀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곤 미약한 힘으로 자신을 향해 잡아당겼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그만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린라이트!
대한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류연의 목을 부드럽게 잡고 가만히 자신을 향해 당겼다.
힘없이 그녀의 몸이 딸려왔다.
키스하려는 순간!
가슴에 그녀의 치명적인 유혹 덩어리가 먼저 닿았다.
이래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노래가 나왔구나 싶었다.
고개를 천천히 숙여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은 얇고 부드러웠다.
살짝 뗐다가 다시 꾹 눌러봤다.
말랑말랑한 게 참 기분이 좋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류연은 수동적이었지만 용감했다.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을 향해 먼저 다가오지 않았는가!
그걸 분명하게 깨달은 대한은 그녀를 아주 소중하게 대했다.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하지만 꾸준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게 한참 공을 들이자 류연의 입술이 열렸다.
단순호치(丹脣皓齒)라는 말처럼 그녀의 입술은 붉었고 이는 하얗고 깨끗했다.
그런데 마치 처음 키스를 하는 소녀처럼 하얀 성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그걸 확인하자 대한은 일단 우회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쪽 손을 뻗어 그녀의 얇고 긴 목을 어루만졌다.
다른 손으로는 류연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입맞춤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