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대안>
―그런 목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반역자들이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돼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맞아. 그렇지.’
―일차적으로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충분하지 않을 때는 이차적인 응징을 가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대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바는 그의 의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중남미에 나타났던 염산마가 대한민국에 강제소환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대한은 에바가 어떻게 2차 응징을 하겠다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말을 못 하게 만드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에바에게 옵션이 아닌 기본이었다.
어쨌든 그의 허락을 받은 에바는 방산 비리 응징에 관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다른 방법도 하나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 또 있었어?’
―여당과 야당의 실세를 만나서 협조를 요청하는 겁니다.
‘에이, 그건 아마 힘들 거야.’
대한은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에바가 즉시 태세전환을 시도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나라 정치인은 믿을 수가 없어.’
―원래 정치인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실 저도 정치인들과 협상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에바도 큰 기대를 하고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오히려 미련이 생기는 대한이었다.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임상시험 기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도록 현행법을 좀 개정해주는 게 좋은데.’
―비슷한 법이 발의됐는데 벌써 몇 년이나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시행령을 개정하는 건 어때?’
―어느 쪽이든 일단 여당의 협조는 필요합니다.
‘차라리 여론전을 펼쳐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한이 최종 결정을 내려버리자 에바는 바로 수긍했다.
마치 자신은 조언자이지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듯 말이다.
입체화면 3개가 작게 변하더니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번에는 마스터께서 시작하신 ‘소원을 말해봐!’ 공모 결과입니다.
‘오! 그거 아주 궁금하군.’
벽 전체에 순위대로 각종 사연과 아이디어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는 찬찬히 살펴보다가 결국 1위와 2위에 주목했다.
1위는 백혈병에 걸려 투병 중인 남동생을 위해 고생하는 소녀 가장을 돕자는 취지였다.
2위는 당장 땅 주인에게 쫓겨나갈 위기에 처한 보육원을 도와주자는 사연이었다.
―1위와 2위의 득표 차가 거의 없습니다. 어떤 것을 시작할까요?
‘둘 다 하자.’
대한은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동시에 도와줘도 그에겐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코레재단을 세운 것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럼 대한TV의 직원과 코레재단의 실무자를 보내 이들과 만나보겠습니다.
‘당장 급한 것은 내가 도와주는 것으로 하고, 방송이 시작되면 모금을 통해 도와줄 수 있는 자금을 만들자.’
―네, 마지막은 코레재단에서 장기적인 지원과 관리 및 후속처리를 하라는 거겠죠?
‘응. 여러모로 힘들 테니 마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세심하고 정중하게 일 처리 잘하도록 해!’
―예, 마스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정말 힘든 것은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대한은 도와주고도 욕먹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잘났다고 설치는 것보다는 역시!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고 싶었다.
자원봉사자를 모아 팀을 짜고, 적극적인 홍보로 이벤트를 점차 확대해나갈 생각이었다.
‘다음은 뭐지?’
―프리미어리그 상위 6개 팀과 라리가의 2강 팀, 총 8개 팀과 협상 중인 스포츠에이전트의 보고입니다.
한쪽 벽면에 여덟 개의 보고서가 떠올랐다.
현재 진행 중인 영국과 스페인의 프로구단과 지금까지 협상한 내용이었다.
대한은 신중하게 하나씩 살펴봤다.
지난번에 한마디 한 게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장단점을 미리 표시해놓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 다들 반응이 별로네. 공백기간이 너무 길었나?’
―그것보다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상위 여섯 개 구단이 생각보다 많이 보수적입니다.
‘그건 라리가 2강도 만만치 않은데.’
대한이 보기에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이나 라리가 구단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도 현재까지는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시티가 가장 적극적입니다.
‘대신 가장 보수가 적군.’
―하지만 마스터께서 원하시는 짧은 계약 기간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차피 돈 보고 구단을 선택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프로축구선수의 이적료와 주급은 그 선수의 가치와 자존심을 나타내는 척도야.’
―아하! 이거야말로 계륵이군요.
에바의 뼈를 때리는 말에 어찌나 갈비뼈가 아픈지 그는 괜스레 손으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한을 보지 않고 허공에 보고서 한 장을 살짝 띄워놓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이건 뭐야?’
―대안입니다.
‘대안?’
―네, 현재 프리미어리그 20개 팀 중 18위를 달리고 있는 ‘왓포드’의 제안서입니다.
‘18위면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권이잖아?’
―네, 맞습니다. 바로 전 경기에서 어렵게 승리를 거둬 간신히 꼴찌를 막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즌 역대 최악의 득점력으로 골 가뭄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책을 세우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는 중입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를 선택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찔러보기?’
―마스터에게도 반대로 왓포드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왓포드는 그래도 중위권에서 비비던 팀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강등권까지 곤두박질쳤는지 의문이었다.
하긴 토트넘도 빅6에서 추락해 중위권은 고사하고 하위권까지 떨어졌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나서야 겨우 막판에 중위권으로 반등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니 왓포드의 경우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대한은 강등권에 걸려있는 프리미어리그 팀 ‘왓포드’가 보낸 제안서를 꼼꼼하게 읽어봤다.
그래도 스포츠에이전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의 제안을 아예 무시하지 않았다.
그에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제안서를 다 읽고 나자 대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거 완전히 나를 위한 맞춤형 제안서잖아!’
―계약금이 좀 적긴 하지만, 대신 계약 기간이 1년으로 아주 짧습니다. 주급도 적은 편은 아니고요. 골을 많이 넣을수록 보너스가 올라갑니다.
‘골을 넣을 때마다 주는 보너스도 적지 않아.’
―거기에다 시즌 10경기 선발출전 보장이 있습니다. 사실 이게 핵심입니다.
‘나보고 와서 제발 골이나 많이 넣어달라는 소리 같군.’
―왓포드는 최악의 골 가뭄 사태로 인해 대부분 한 점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건 오히려 맘에 드는군. 내게는 아주 좋은 일이지.’
―저는 마스터께서 이 제안을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에바는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방금까지 눈치를 보던 그녀는 금세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초상권과 프리타임이야. 시합을 제외하곤 무엇을 해도 터치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잖아.’
―그렇습니다. 그 어떤 구단도 이렇게 느슨한 계약을 해주지는 않을 겁니다.
‘개인훈련은 내가 알아서 하고, 팀훈련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겠다는데 왜 다들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네.’
―그거야 팀워크가 깨질까 봐 그렇죠. 어차피 마스터는 그 팀훈련도 대부분 안드로이드를 보낼 생각이시잖아요?
‘맞아. 그건 그렇지.’
사실 어떤 구단과 계약을 해도 연습시간에는 안드로이드를 내보낼 것이다.
개인훈련은 대부분 빠지고, 팀훈련만 적당히 참가할 계획이었다.
사실 잠잘 때, 안드로이드와 링크만 걸어두면!
경험과 기억의 형태로, 안드로이드가 행한 팀훈련의 효과를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었다.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가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만약 내가 지금 당장 맨체스터시티로 가면 주전으로 뛸 수 있을까?’
―그건 아마 힘들 겁니다.
‘그래도 시합에 나갈 수는 있겠지?’
―물론이죠. 최소한 몇 번은 필드에 내보내 실전을 테스트할 겁니다.
‘시합에 나갈 수는 있지만, 주전이 되기는 힘들다는 얘기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구단에서 거액의 이적료와 비싼 주급을 주고 있는 축구 스타를 기용하지 않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할 겁니다. 주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고요.
어떻게 보면 지독한 모순이었다.
아니, 원래 인간의 생각은 합리적인 것 같지만 모순덩어리다.
그래도 이런 딜레마가 있는 축구라서 보는 재미가 더한지도 몰랐다.
‘아무리 프리미어리그의 강자인 맨체스터시티가 나를 영입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이라고 해도 쥐꼬리만 한 주급을 받고 갈 수는 없지.’
―그럼 일단 징검다리를 한번 밟고 가시렵니까?
‘응, 그래야겠어.’
―알겠습니다. 왓포드를 징검다리로 삼아 빅마켓에 입성할 수 있도록 일을 진행해보겠습니다.
대한의 결정에 에바는 즉각 반응했다.
당장 스포츠에이전트에게 연락을 보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계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마 좀 곤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수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대한과 에바는 스포츠에이전트의 입장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스포츠에이전트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프리미어리그와 라리가의 계약서들이 작게 뭉치더니 한쪽 끝으로 밀려났다.
대신 사내 두 명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라 벽면을 가득 채웠다.
‘으음! 이건 누구지?’
―왼쪽이 다음 달, 마스터와 싸우게 될 전(前) UFC 미들급 챔피언 ‘존 위태커’입니다.
‘우와! 거물이네!’
―UFC에서 아예 작정하고 밀어주기로 한 것 같습니다.
‘존 위태커를 이긴다면 다음은 챔피언에 도전하는 건가?’
―그렇게 계약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계약조건은 최상급이겠지?’
―‘코난 맥드리거’와 동급의 계약조건입니다.
‘그 정도면 됐어.’
UFC 최고의 인기스타이자 악동으로 소문난 코난 맥드리거와 동급의 조건이라면 상당히 괜찮은 계약이었다.
이런 계약조건을 내미는 UFC가 대한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UFC 미들급 경기를 치르고, 한 달 뒤에 벨라코어 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도전을 하게 됩니다.
‘챔피언 도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아니, 이게 웬 떡이냐?’
―그만큼 벨라코어 FC가 마스터의 인기와 상업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한은 오른쪽 사진을 쳐다봤다.
현재 벨라코어 FC 헤비급 챔피언이자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라이언 바델’ 선수였다.
‘이거 아예 나한테 챔피언 벨트를 헌납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라이언 바델은 벨라코어 FC에서 헤비급과 라이트헤비급, 두 체급을 석권한 챔피언입니다. 결코, 만만한 선수는 아닙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대한은 진심으로 강자와 싸우길 원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배틀푸르나(SSS)를 연성했다.
덕분에 꾸준히 마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스파이럴 제국기사단의 비전 무공 탄탈러스(SS)와 검법 크루세이더(SS)도 매일 열심히 수련했다.
그런데 혼자 수련하고 훈련하는 건 너무도 지루한 일이었다.
대안으로 전투 로봇과 대련하는 것도 효율이 너무 좋지 않았다.
마력이 담긴 주먹과 무기는 전투 로봇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반대로 마력을 쓰지 않으면 내구성이 떨어져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물론 슈트나 아머를 쓰면 된다.
하지만 보호막인 실드를 걸어버리면 전투 로봇의 공격이 아예 무용지물이 된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힘 조절밖에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마력을 봉인하고 순수하게 그냥 몸으로 싸우는 게 낫다.
이게 종합격투기 시합이 기다려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계약서를 확인하시고 문제가 없다면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대한은 에바가 띄워준 UFC 및 벨라코어 FC와의 계약서를 확인했다.
둘 다 최상의 조건으로 계약이 된 것이라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진행해.’
―네, 마스터.
에바의 대답과 함께 계약서 두 장이 작게 변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다 끝난 거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직 중요한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보셔야 할 것도 좀 있고요.
‘뭔데?’
그는 그녀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에바는 밀당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