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하이스 타임>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벽에 걸려있는 목욕가운을 걸치자 하이스가 다가왔다.
“내가 머리 말려줄까?”
“샤워 안 해?”
“할 거야. 대한의 머리카락 말려주고 나서.”
대한은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하이스는 그 모습에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놨다.
“여기 앉아.”
“응.”
그는 미용실에 왔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위잉!
드라이어가 신음을 내며 신나게 돌아갔다.
동시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울을 보고 하이스가 어떻게 하나 지켜봤다.
그런데 하얗고 얇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고 쓰다듬어주자 절로 눈이 감겼다.
어디서 배웠는지 손으로 목과 머리도 시원하게 꾹꾹 눌러줬다.
왠지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는 전문 헤어디자이너처럼 롤 빗(롤 브러쉬)으로 머리를 말아댔다.
살짝 눈을 떠보자 평소와는 달리 머리가 제법 멋있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법인데!”
“매일 받다 보니 저절로 하는 법을 알게 됐어. 내가 이렇게 머리를 해준 남자는 대한이 처음이야.”
“고마워! 아니 영광입니다.”
“헤헤!”
대한의 장난기 가득한 행동에 그녀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돌직구에 엉뚱한 똘끼가 넘치는 하이스!
하지만 이렇게 수줍어할 줄도 아는 반전의 매력이 있었다.
“참! 나한테 뭔가 전해줄 게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거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놨어.”
올리버가 자신에게 보낸 것이 뭔지 대충 짐작은 갔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머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손길을 만끽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이스의 손길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다 됐다.”
“아! 수고했어. 우와! 근사한데!”
거울을 보니 정말 머리가 그럴싸해졌다.
그는 아낌없는 칭찬을 그녀에게 해줬다.
하이스는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대한의 등을 힘껏 떠밀었다.
“이제 나 좀 씻게 나가 있어!”
“응.”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힐끗 하이스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욕실 밖으로 나갔다.
오피스텔은 반소매를 입어도 될 만큼 따뜻했다.
더운 지방에서 살던 하이스다.
그녀를 위해 대한은 보일러 온도를 왕창 올려놓았다.
털썩!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창문을 통해 일대의 야경이 보였다.
시선을 돌리자 탁자 위에 누런 서류봉투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대한은 서류봉투를 손으로 집었다.
단단히 밀봉된 게 척 봐도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류봉투를 찢고 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역시 예상대로 서류는 엘란 마을 북쪽 지하동굴에 있는 금광!
그러니까 일명 엘란금광의 지분을 설정해놓은 서류였다.
―엘란금광의 지분 5%네요.
‘흐음! 올리버 이 새끼!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이런 중요한 서류를 하이스에게 줘서 보내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래도 챙겨줘야 할 것은 신경 써서 잘 챙겨줬네요.
‘하긴 좀 밝히고 덜렁거려서 그렇지, 성품이 나쁜 녀석은 아니야.’
대한은 화를 내는 올리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간이 좀 지나면 화가 풀리게 될 것이다.
그럼 연락하지 말라고 해도 연락해올 녀석이었다.
‘엘란금광의 금 매장량이 얼마나 되지?’
―서류상으로 200t으로 나와 있지만 그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그런 겁니다. 최대 500t까지도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여길 보니 연간 생산량이 나와 있군. 대략 1년에 10t 정도로군.’
―지분 5%를 가지고 계시니 마스터의 몫은 연 500kg입니다. 오늘 1g당 금 시세 $47.81을 적용하면 $23,905,000입니다. 오늘 원·달러 환율이 1158.07원이니까 27,683,663,350원이네요.
‘276억 원이나 되네.’
―한 달에 23억 원씩 들어오는 셈이에요.
괜히 사람들이 금광에 눈이 홱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엘란금광의 지분 5%를 가지고 있는 대한도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데 그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벌어 가겠는가!
물론 여기에는 채광이나 세금 등 여러 가지 비용을 전부 제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금 생산량만 가지고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연 200억 이상은 충분히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스터! 엘란금광의 지분을 꼭 돈으로 받으셔야 해요?
‘왜?’
―차라리 그냥 현물로 받으시죠.
‘돈으로 받지 말고 금으로 받으라고?’
―네, 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자원입니다.
‘뭐 그러던지. 에바가 알아서 챙겨!’
―예, 알겠습니다.
사실 금으로 받는 게 더 좋다.
돈으로 받으면 중간에 이것저것 수수료가 생긴다.
그럴 바에야 사람을 보내 금을 받아오게 하면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아예 엘란금광에서 나오는 금을 내가 전부 다 사버릴까?’
―가능하면 그래도 좋겠지요. 하지만 전부 팔려고 할까 모르겠습니다.
‘왕다오를 통해 주식을 받고 대신 금괴를 넘겨준다면 아마 중간에 떨어지는 이익이 상당할 거야. 시가대로 산다고 해도 4억7천만 달러 정도야.’
―원하시면 안드로이드를 보내 제가 협상해보겠습니다.
‘좋아. 한번 추진해봐!’
―네, 마스터.
에바는 곧바로 올리버의 어머니 아만다 르만에게 안드로이드를 보냈다.
그렇게 시작한 협상 결과!
엘란금광에서 생산된 금 중 30%를 현물로 사들일 수 있게 됐다.
어쨌든 엘란금광 지분 활용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됐다.
서류를 한쪽에 잘 챙겨두고 TV를 켰다.
오랜만에 보는 TV다.
화면은 패밀리 밴드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버스킹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름다운 노래와 음악이 흘러나왔다.
현장의 반응도 꽤나 생생했다.
대한은 소파를 뒤로 젖히고 반쯤 누운 자세로 TV를 시청했다.
점차 감미로운 멜로디와 감성 넘치는 연주에 푹 빠져들었다.
자신도 저렇게 악기 하나쯤은 멋지게 다루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자 선율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와 좋았다.
그렇게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이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하얀 목욕가운 하나만 걸친 채 그에게 다가왔다.
상큼한 샴푸 냄새가 훅하고 풍겨왔다.
“대한! 자?”
“아니. 음악 들어.”
하이스가 묻는 말에 대한은 조용히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이런 모습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도 별로 재미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난 것이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하이스!
그녀는 대한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손가락을 뻗어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까 대한이 머리를 만져주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강제소환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정성껏 마사지했다.
“으음, 좋다.”
그는 이런 하이스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몸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도 대한의 긍정적인 반응에 크게 고무됐다.
눈빛을 빛내며 더욱 마사지에 정성을 쏟았다.
하이스의 손가락이 점차 머리에서 목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옆에서 마사지하는 게 좀 불편했다.
그래서 과감히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았다.
대한은 하이스의 돌발적인 행동에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이내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슈퍼모델이라서 그런지 별로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보채듯 대한에게 자꾸 물었다.
“어때? 좋아? 시원해?”
“응. 아주 좋아. 그리고 아주 시원해.”
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띠며 그의 목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대한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됐다.
참 잘생긴 남자였다.
동양인들은 눈이 작아서 잘 생겼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한은 아주 완벽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꾸준히 키가 크고 몸이 좋아졌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멋있어지고 매력이 흘러넘쳤다.
결정적으로 지금은 잘생김과 멋짐이 폭발하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 보고 사귀는 게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대한이라면 평생 얼굴만 보고 살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광채가 나는 듯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괜히 기쁘고 즐거워졌다.
하이스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끝내줬다.
그러면서도 대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마사지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에 짙은 눈썹!
오뚝한 콧날에 꾹 다문 붉은 입술!
피부는 하얗고 어린아이처럼 뽀송뽀송했다.
손을 대니 착착 감겨왔고 탄력이 넘쳐흘렀다.
아니 건강미와 생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참 잘생겼어!’
하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달콤하고도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