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새롬 MC>
“크흠! 그렇군요. 당연히 소개비를 줘야겠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돈값은 제대로 하게 될 테니까요. 왕다오 비서님의 얼굴을 봐서 소개비는 딱 1%만 받겠습니다.”
“1%나! 소개만 해주는 것인데?”
“제 목숨이 달린 일인데 소개비로 그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으음.”
대한은 찬 바람이 쌩 불 정도로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왕다오는 잠시 고민을 했다.
아니 고민하는 표정을 연기했다.
그러자 대한은 왕다오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싫다면 저도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왕 비서님이 처분하고자 하는 주식은 제가 최대한 많이 구매하겠습니다.”
왕다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마치 뭔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을 했다.
“사실 처분할 주식이 조금 더 있소.”
“얼마나 되는지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아까 말했던 것에 몇 배는 되는 양이요.”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대한은 별거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왕다오가 오히려 마음이 달아올랐다.
“내 말은 비자금을 말하는 것이요. 어르신들은 스위스 은행을 아주 좋아하오.”
“아! 알겠습니다. 아마 그 어르신들도 크게 만족해하실 겁니다.”
“좋소. 그럼 소개를 해주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 제 소개비는 휴즈원을 통해서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오.”
그의 말에 왕다오도 더는 질질 끌지 않았다.
“그럼 조만간 직접 연락이 갈 겁니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있소?”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소속 왕다오 비서님이 아닙니까?”
“그걸 어찌 알았소?”
“왕 비서님이 얼마나 유명하신 분인데 제가 모르겠습니까?”
“크흠.”
자신이 유명하다고 말하니 따지기도 뭐해졌다.
왕다오는 입맛을 다시면 강하게 말했다.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물론이고 나까지 목이 온전하게 붙어 있지 않을 테니까.”
“휴즈원은 한 번도 안 쓰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쓰는 사람은 없다는 곳입니다.”
대한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
왕다오는 그걸 보면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제 돈도 휴즈원을 통해서 투자할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거래하세요. 대신 스위스 은행의 수수료 20%와 제 소개비 1%는 확실하게 주셔야 합니다.”
“알겠소.”
“그럼 좋은 거래를 기념하는 의미로 점심이라도 같이할까요?”
“아니요. 난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소. 먼저 일어나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뵐 것을 학수고대하겠습니다.”
왕다오는 이상하게도 대한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믿음이 갔다.
대한이 장민에게 흡수하여 획득한 재능!
화술(S)과 매혹(S)이 이렇게 알게 모르게 시너지효과를 내는 것이다.
왕다오는 일단 돌아가서 휴즈원에 관해 먼저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그런 다음 괜찮다 싶으면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을 것이다.
이 거래를 멋지게 성사시킨다면 아마 자신의 미래는 탄탄대로가 될 것이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왕다오는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쿵!
문이 닫히자 대한과 리나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휴우!”
“아휴!”
대한과 리나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직도 심장이 쿵덕거리는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꾹 눌러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야릇하고 자극적이었다.
“대한!”
돌연 리나가 대한의 이름을 부르며 안겨 왔다.
“리나!”
그는 얼떨결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덜컥 안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몸을 꼭 부둥켜안았다.
리나의 몸이 그제야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위험한 상황을 헤쳐나왔는지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온종일 서 있을 거야?”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래.”
“그럼 차라리 침대로 가서 좀 누워있어!”
“아이! 짐승!”
“아니 왜?”
“또 하려고 그러지?”
“내가 뭘?”
리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를 밀어냈다.
졸지에 짐승(?)이 되어버린 대한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왜 이런 취급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 그럴 시간 없어. 나가봐야 해.”
“또 촬영이야?”
“응.”
“촬영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해!”
“이런 제기랄!”
대한은 갑자기 화가 났다.
당연히 오늘 저녁에도 같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리나와 같이 있을 오붓한 시간이 벌써 끝나버렸다.
이제 막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는데 이렇게 헤어지다니.
억울하고 분통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화내지 마. 나도 대한과 헤어지는 거 서운해! 하지만 일정이 밀려서 빨리 상하이로 가봐야 해!”
“어휴! 할 수 없지. 나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대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둘은 금세 다시 붙어버렸다.
대한은 리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도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그의 입술을 욕심껏 탐했다.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떨어지기 싫은 대한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야만 했다.
“대한! 나 일 끝나고 바로 찾아갈게.”
“그게 언젠데?”
“아직 나도 잘 몰라. 어떻게든 시간을 비워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
“어휴! 알았어. 내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
“응! 자주 연락할게.”
“그러자.”
대한과 리나는 마지막으로 뜨거운 키스를 했다.
그녀는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끝내 방을 나섰다.
그는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갑자기 가슴 한쪽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리나는 왕슈잉과 리슈잉을 불렀다.
두 여자가 그녀의 스위트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대한은 에바를 통해 그들을 투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왕슈잉은 빠르게 짐을 챙겨 여행용 가방에 담았다.
그러더니 객실안내원을 불러서 짐을 로비로 내렸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리나를 보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는 아쉬운 마음에 입술이 십 리만큼 튀어나왔다.
―에바!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
―네, 마스터!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시면 됩니다.
―오케이.
에바의 의도된 명랑한 목소리에 그도 모른 척 분위기를 바꿨다.
괜히 안되는 걸 가지고 짜증을 내봐야 자신만 손해다.
그보다는 부모님의 선물로 뭘 사가는 게 좋을지 생각해봤다.
가사용 안드로이드 H1 제니, H2 야엘이 들어와 대한의 짐을 챙겼다.
* * *
“우와아! 이제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대한은 수저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모습에 오늘의 MC 한새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세요?”
그는 식탁 위를 한번 쳐다보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람인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이걸 어떻게 다 먹을 수가 있는 거죠?”
“부모님이 해주신 음식인데 어떻게 남겨요? 다 먹어야지.”
“그거야 그렇지만.”
한새롬은 눈앞에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놀란 그녀의 눈빛을 보며 대한도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지난 사흘간 매일 먹은 음식의 양이 이것보다 훨씬 많았다.
오랜만에 얼굴이 본 아들의 얼굴이 홀쭉해졌다고 어머니가 얼마나 속이 상해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대한은 어쩔 수 없이 김혜영이 해준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워야만 했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밥상머리에 앉아서 쳐다보니 어디로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오직 믿는 것은 에바와 자신의 막강한 소화 능력뿐이었다.
대한은 한새롬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방의 뒤풀이 얘기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쳐다보는 것과 채팅창에 댓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먹방은 다이어트의 적 맞죠?”
“선동하지 마세요! 지금 한새롬 씨는 민심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대한 때문에 다이어트하시는 분들 힘들어하시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먹방은 맛있게 먹는 게 최고라고요.”
“바로 그게 민폐라는 거예요. 너무 맛있게 드시니까 저까지 식욕이 마구 돋잖아요.”
“아하! 저 때문에 밥 두 그릇 드셨다고 지금 원망하시는 거구나.”
“제가 언제요? 전 한 그릇 밖에 안 먹었어요.”
“두 그릇 드시는 거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착각하신 거예요.”
직원들이 상을 치우는 동안,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돌연 한새롬이 카메라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예에?”
대한은 괜히 놀라는 척을 했다.
그녀는 일부러 좀 삐진 척 표정을 바꿨다.
“벌로 노래라도 한 곡 하세요. 그럼 용서해드릴게요.”
“제가 용서를 빌만한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럼 우리 시청자들께 물어봐요. 대한이 잘못했는지 안 했는지.”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왜요? 이렇게 증인이 버젓이 있는데. 자! 여러분 대한이 잘못했으니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에 1번, 전혀 잘못 없으니 노래 부르지 않다고 된다는 것에 2번입니다. 이제 채팅창에 써주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팅창은 곧 숫자 1로 뒤덮이고 말았다.
비가 오듯 수백, 수천 개의 숫자 1이 도배되어버린 것이다.
“아! 이건 반칙이에요.”
“반칙은 무슨 반칙! 민심을 거스르지 마세요. 호호호!”
한새롬은 두 손을 자신의 허리에 척 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이크를 잡았다.
“그래요. 제가 죽일 놈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배신자예요.”
카메라를 바라보는 대한의 표정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얼마나 실감 났는지 한새롬의 선동에 설득당했던 민심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오구! 그랬쪄요? 억울 했쪄요?”
“헐!”
한새롬은 허리를 숙여 이번에는 대한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그러자 가슴이 파인 옷 사이로 그녀의 탐스러운 미드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노래나 부르세요. 안 그러면 볼기를 칠 거예요.”
“지금 저한테 무슨 프레임을 씌우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좀 더 두고 봐야죠.”
그런데 시청자들은 이미 둘의 대화는 뒷전이었다.
화면에 뽀얗게 등장한 자극적인 장면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린 것이다.
[귀환자: 오우야! 분위기 왜 이러니?]
[돌아온탕자: 이게 웬 갑툭튀냐?]
[대한여행사: 새롬 누나 예뻐요.]
[내게로돌아와: 저건 국내산이 아니다.]
[탈무드: 요새 한새롬 물이 올랐네.]
[토마토: ㅗㅜㅑ! 탈아시아급이다.]
[조아라: 아이! 조아라!]
그러거나 말거나!
대한의 귓가로 얼굴을 가져간 그녀는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동안 중국여행 다니시느라 즐거우셨죠? 저 키워주신다고 해놓고 그동안 내팽개쳐놓은 건 어떻게 보상하실 거예요?”
“아니 내가 언제 한새롬 씨를 키워준다고 했습니까?”
“여기서 MC 하라고 꼬셔놓고 나 몰라라 했잖아요?”
“지금 드라마에, 영화에, 화장품 광고까지 찍었다는 분이 무슨 소리예요?”
말도 안 된다며 그는 정색했다.
하지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한새롬은 골탕을 먹이려고 아주 단단히 작정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하는 것 봐서 용서해드릴게요.”
그녀는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대한의 말을 일축했다.
“일방통행을 참 좋아하시네요.”
“쌍방통행으로 가시려면 빨리 노래나 불러주세요.”
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들어 카메라를 쳐다봤다.
일순 대한의 분위기가 확 변했다.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한은 낮은 저음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을 위해 부릅니다. 이번만 부탁해.”
에바는 대한의 말에 맞춰 ‘이번만 부탁해’의 MR을 틀었다.
화면에는 노래방처럼 가사가 올라왔다.
♬ 내 사랑을 만났어. 그게 마지막 사랑인 줄 알았어.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헤어짐을 동반하잖아. 날개 꺾인 천사의 아픔처럼 익숙한 고통도 사랑인 거야. ♪
잔잔하게 음악이 흘렀다.
그 위를 통통 튀는 박자들이 타고 갔다.
묵직한 저음에 귀에 착 감기는 목소리…….
순식간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