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당의 제안>
‘그럼 다른 나라로 여행 갈 때는 어떻게 할 거야?’
―그거야 당연히 비즈니스제트기를 구매해서 써야지요.
‘아!’
에바의 말에 대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비즈니스제트기란다.
이건 진정한 거부의 상징 같은 존재다.
특급호텔 스위트룸 같은 화려한 실내장식!
100인치 LED TV에 안락한 좌석과 소파!
넓고 푹신한 침대와 개인 샤워실!
테이블에 모여 식사나 회의를 할 수도 있다.
대한은 상상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혹시 제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비즈니스제트기의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거야 비자금을 써서 구매해야지요. 마스터가 필요할 때만 임대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
역시 해결책은 비자금이었다.
―일단 시작은 봄바디어 글로벌 8000이 좋겠습니다. 경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제트기입니다. 공간이 넓어서 장거리 비행에도 편안하게 쉴 수 있습니다.
‘가격은 얼마나 되지?’
―한화로 대략 660억 원입니다. 물론 어떻게 실내장식을 하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많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케이! 에바가 알아서 해!’
―네, 마스터.
에바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충 끝났나?’
―마지막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뭐지?’
―살 집을 고르셔야지요. 본사 건물도 하나 구매하시고요.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어디가 좋을까?’
대한도 에바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동안 돈을 모으기만 했으니 이제는 좀 써봐야겠다.
―강남에 쓸만한 빌딩이 하나 나왔습니다.
‘빌딩을 사자고?’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비자금을 써서 빌딩을 구매하고, 마스터께서 임대해 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빌딩 관리는 따로 회사를 만드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나보고 빌딩에 살라는 말이야?’
―그게 어때서요? 꼭대기 층 전체를 펜트하우스로 꾸미면 아주 넓고 편안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로봇과 안드로이드를 배치하기도 좋고요.
임대로 들어간다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그래도 집은 하나 사는 게 좋겠어.’
―물론이죠. 한강 변에 최고급 빌라나 아파트를 사세요.
‘강변이라면 나도 찬성이야. 전망 좋은 것으로 하나 구해봐!’
―알겠습니다. 그럼 마스터의 부모님도 근처로 이사하시는 게 좋겠어요. 경호문제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하자.’
경호문제라는 말에 대한은 당장 허락하고 말았다.
한강 변으로 이사하자고 한다면 아마 부모님도 싫다고 반대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세계 곳곳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미리 확보해놓는 것이 어떻습니까?
‘별장을 사자는 말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각국의 요충지에 투자가치가 높은 빌딩이나 저택 등 부동산을 사놓으면 나중에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냥 투자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비자금으로 살 거지?’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도 정말 좋은 매물이 나오면 마스터께서 사도록 하세요.
‘알았어. 그렇게 하지.’
비자금을 쓰는 건 아주 쉬웠다.
자신의 돈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훨씬 결정하기가 쉬웠다.
그래도 꼭 필요할 때는 자신의 지갑을 열기로 했다.
바보처럼 죽을 때까지 돈이나 벌고 사는 건 사양이다.
개처럼 벌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승처럼 써보고 싶었다.
―그럼 강남에 급매로 나온 매물을 한번 보시죠.
에바가 허공에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은 하얀색 빌딩이었다.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 테헤란로에 있는 백두타워입니다.
‘꽤 크네.’
―지상 20층, 지하 5층짜리 빌딩입니다. 장부가 999억 원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면적이면 싼 편인 것 같다.’
―싸도 아주 싼 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백두타워는 1985년에 지어진 노후 빌딩입니다. 보강공사와 개보수가 필요합니다.
‘어휴! 이거 너무 오래된 거 아니야?’
대한은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인제 보니 허옇게 생긴 게 확실히 오래된 빌딩 느낌이 들었다.
―그 점은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보강공사를 할 때 100년은 더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빌딩으로 만들어놓겠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뭘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른다.
하지만 에바가 개입하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이미 노후 빌딩이라는 약점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빌딩 천억에 살 수는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그냥 내 돈으로 살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임대해서 싸게 쓰시고 대신 현금은 계속 투자하셔서 자금을 불려 나가세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대한은 에바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빌딩에 전 재산의 사 분의 일을 묶어놓는 것보다는 투자가 낫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에바가 없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마스터! 리나 양이 돌아왔습니다.
‘그으래?’
시간을 보니 벌써 8시가 넘었다.
저녁을 못 먹어서 출출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 끼 안 먹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니 좀 참기로 했다.
잠시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 리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르릉!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대한!”
“리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무슨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는 것도 아니고.
그들은 격렬하게 껴안고 입을 맞췄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난 괜찮아. 그런데 좀 피곤해 보인다.”
“응,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그렇구나.”
리나는 대한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아! 대한의 냄새! 참 좋다.”
“나도 리나를 보니 힘이 난다.”
“참! 저녁은 어떻게 했어?”
“리나 오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
“나도 바빠서 아직 못 먹었어. 우리 같이 나가서 밥 먹자.”
“피곤하면 그냥 룸서비스를 시키는 것도 좋은데.”
“그것도 괜찮고.”
“내가 룸서비스 시켜놓을 테니까. 리나는 가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알았어. 고마워!”
친절한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나는 대한의 방을 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그는 다양한 요리로 룸서비스를 넉넉하게 시켰다.
30분쯤 지나자 룸서비스가 왔다.
그들은 다이닝 테이블 위에 각종 요리를 내려놓고 나갔다.
대한은 리나에게 요리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10분쯤 기다리자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흩날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반소매 티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와! 맛있겠다.”
“어서 먹자.”
“잘 먹을게.”
둘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때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리나는 배가 아주 고팠는지 허겁지겁 요리를 집어 먹었다.
대한도 지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테이블을 채웠던 요리들은 금방 사라졌다.
음료수를 마시고 나자 둘은 볼록한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촬영이 힘들었었나 보지?”
“아니. 촬영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대한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당에서 사람이 찾아왔어.”
“당이라면 공산당?”
“응.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제안을 하더라고.”
“뭔데?”
그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리나를 쳐다봤다.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어. 비밀 지킬게.”
대한은 그녀를 향해 손으로 자신의 입을 잠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리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글쎄 자기한테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인터넷 기업들의 주식이 있다지 뭐야.”
“주식?”
“응. 텐센츠, 알라바마, 바이투, 제인디닷컴, 핀도도, 바이츠댄스 까지 아주 종목도 다양하더라고.”
“바이츠댄스는 비상장기업인데……. 설마 그 주식들을 리나보고 사라고 한 건 아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리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한도 커진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혹시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에바! 리나가 오른 누굴 만났는지 추적해봐!’
―예, 마스터.
일단 그는 에바에게 사람 찾는 일을 맡기고 리나에게 다시 물었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
“그럴게.”
그녀는 처음보다 좀 더 자세하게 당에서 나왔다는 사람에 관해 얘기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뭔가 촉이 왔다.
―마스터! 찾았습니다.
‘누군지 말해봐!’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소속의 비서 왕다오입니다.
―최소한 사기꾼은 아니었군.
일단 한숨은 돌렸다.
하지만 직책이 직책이다 보니 걱정이 먼저 앞섰다.
―아무래도 왕다오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의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산관리를 해주는 대리인 같은 건가?’
―비슷합니다.
‘그럼 당 고위층에 헌납된 중국 인터넷 기업들의 주식이 맞겠군.’
―그렇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둘러 주식을 처분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왕다오는 오늘 리나 양만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만나서 주식 얘기를 꺼냈다는 말이야?’
―네, 베이징에 머무는 유명인들을 만나 주식을 살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하나 같이 나이가 어리고 현금이 많은 이들이었습니다.
하는 짓을 봐서는 절대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을 만나서 소문을 내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어떻게 하지? 그 사람이 말한 주식을 사야 하는 거야?”
“왜? 사고 싶어?”
“아니 전혀. 난 주식에 관해서는 잘 몰라. 다만 거절했다나 나중에 뭔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리나로서는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중국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지고도 남을 것이다.
“참! 대한과 내가 합작해서 만든 회사 얘기도 꺼냈어. 그렇게 번 돈을 한국으로 보내지 말고 주식을 사두면 더 좋을 거란 말도 하던데.”
“리나와 나를 이미 충분히 조사한 모양이군. 주식을 언급해도 뒤탈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이 서서 직접 접근한 모양이네.”
“어떡하지? 나 무서워!”
대한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겁을 집어먹었는지 오돌오돌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한번 만나볼까?”
“대한이?”
“왜? 안 될까?”
“그건 아니지만, 대한이 만나면 뭐가 달라지는데?”
“조건만 맞으면 주식은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다른 주식도 아니고 정말 중국에서 잘 나가는 인터넷 기업들이잖아.”
“정말 그걸 사겠다는 거구나!”
리나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그냥 답답해서 주절주절 떠들어댄 것뿐이다.
그런데 대한이 이렇게 나올지는 미처 몰랐다.
“당장 사겠다는 게 아니라 살 용의가 있다는 거야. 거래는 조건이 맞아야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닐까?”
“아마 괜찮을 거야. 정말 주식을 팔 생각이 있으니까 접근했겠지.”
“아이참! 어떻게 하지?”
“그냥 내게 넘겨. 내가 알아서 할게.”
대한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리나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사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거액을 주고 주식을 사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거절했다가 나중에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을지 그게 두려울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대한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전화해서 한번 물어볼게.”
“날 믿고 맡겨봐! 리나에게 해가 될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일단 저쪽의 시선을 리나에게서 떼어내 자신에게 묶어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조건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주식을 사줄 수도 있었다.
물론 서로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
만약 그걸 가지고 리나에게 화풀이하거나 해코지를 한다면!
그때는 그냥 싹 쓸어버릴 생각이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제 그 정도는 대한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여보세요!”
리나는 그의 앞에서 왕다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한의 제안을 전하자 상대방은 오히려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서로 일정을 조율하다가 내일 아침에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잘 얘기할게.”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지. 싸우는 것도 아니고 협상하는 거라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잘됐으면 좋겠다.”
리나는 대한에게 점점 미안해졌다.
괜한 말을 꺼내 가지고 쓸데없이 일을 키워버린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손해를 보는 셈 치고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깨달았다.
“리나!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어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자책하지마.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내일 내가 만나서 잘 해결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