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에바의 정체>
‘그럼 차원 통신을 보내지 말라고 한다면?’
―아마 차원 통신을 보내라는 명령만 제외한다면 모든 명령에 복종할 것입니다. 일정 기간 안에 차원 통신을 반드시 보내야 하는 것이 스파이럴 대제국의 모든 우주선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제기랄!’
대한은 잠시 고민을 하다 결국 에바의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너 때문에 요새 내가 아주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해야지 어쩌겠어. 내가 지구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랴! 에이 빌어먹을!’
그는 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마스터! 일어나서 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십시오.
‘알았어.’
대한은 에바가 보여주는 화살표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함장의 오른쪽 뒤에 있는 커다란 벽이었다.
―베인에게 코어를 열라고 말씀하세요.
“베인! 코어를 열어라!”
“왜 그러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베인은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바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냥 코어를 열라고만 말하세요.
‘알았어.’
대한은 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가 말했다.
“베인! 코어를 열어라!”
“네, 함장님.”
다행히 베인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스르륵!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벽의 한 면이 완전히 열렸다.
안에는 온갖 아름다운 빛으로 빛나는 크리스털이 박혀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크리스털이 하나같이 길쭉한 원기둥 모양이었다.
―마스터! 화살표를 한 곳에 오른손을 대세요.
‘오케이.’
대한은 에바의 말을 따라 오른손을 푸른 크리스털에 댔다.
“함장님! 제 모듈에 왜 손을 대시는 겁니까? 아직 재생수리를 받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릅니다.”
“…….”
그는 베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대한의 손가락에서 은색의 실이 폭사했다.
은색의 실은 빠르게 푸른 크리스털을 덮어갔다.
“안 돼!”
베인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은색의 실은 더욱 빠르게 푸른 크리스털을 덮어버렸다.
―마스터! 이제 뽑으세요.
‘응.’
대한은 잽싸게 푸른 크리스털을 뽑았다.
“도대체 왜 저를 죽이시…….”
베인의 목소리가 중간에서 뚝 끊겼다.
그는 의혹의 눈빛으로 푸른 크리스털을 쳐다봤다.
그 순간에도 자신의 손가락을 뚫고 나온 은색의 실은 푸른 크리스털과 푸른 크리스털이 빠져나온 구멍 안을 연결하고 있었다.
‘에바! 지금 내가 베인을 죽이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 베인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죽지 않는다고? 에바!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네에?
에바는 그의 질문에 크게 당황했다.
‘너 인공지능 아니지?’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한과 에바 사이에 몇 초간의 침묵이 있었다.
‘에바! 너와 나는 운명공동체가 맞아?’
―네, 맞습니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저도 죽습니다.
대한의 질문에 에바는 바로 대답을 해줬다.
‘어휴! 이제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어? 그동안 네가 하는 짓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넌 절대 기계처럼 완벽하지 않거든.’
―저,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에바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넌 사람이야 기계야?’
―전 사람도 아니고 기계도 아닙니다.
‘혹시 전에 사람이었어?’
―…….
이번에도 에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웅!
순간 우주탐사선 히릭스에서 강한 파동이 일어났다.
“마스터! 이제 끝났습니다. 크리스털을 다시 넣어주세요.”
에바는 더 이상 그의 뇌리에다 말하지 않았다.
이미 히릭스를 완전히 장악했는지 베인처럼 말을 했다.
“베인!”
“네, 함장님.”
“너 살아있냐?”
“전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에바님에게 복종할 따름입니다.”
베인의 대답에 그는 일단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나와 에바의 명령이 겹치면 누구의 명령을 따를 거지?”
“당연히 함장님을 따를 겁니다.”
대한은 베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스터! 설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너 같으면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는 놈의 말을 믿겠냐?”
“죄송합니다.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왜? 시간을 주면 문제가 다 해결돼?”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대충 짐작이 갔다.
만약 에바가 단순한 인공지능이었다면 아마 절대로 생각할 시간 따위를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아! 시간을 주도록 하지.”
“마스터! 고맙습니다.”
“먼저 한 가지 약속을 해라!”
“네, 말씀하십시오.”
“나와 지구에 절대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예, 약속하겠습니다. 아니 맹세하겠습니다.”
에바의 대답은 단 0.1초의 틈도 없었다.
대한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면서 긴장을 풀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마스터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내 결정?”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했다.
“북극 공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싹 죽여서 입을 봉하거나 그냥 튀어야지요.”
“크크크! 맞다. 튀자.”
“어떻게 튀실지 방법을 말씀해보세요.”
“그래 일단 좀 살펴보자.”
“네.”
에바는 즉시 삼면의 화면에 입체영상을 띄웠다.
미국의 델타포스와 러시아의 스페츠나츠가 신나게 싸우고 있었다.
중국의 탐사대와 유럽연합의 연합군도 한쪽에서 화끈하게 치고받았다.
“이야! 이거 딱 팝콘각인데.”
“팝콘과 비슷한 요리를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런 게 있어?”
“히릭스의 식량창고는 불시착 중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에바의 말에 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가져오라고 해!”
“네.”
“앗 참! 그런데 누가 가져오는 거야?”
“안드로이드를 시키면 됩니다.”
“오오! 안드로이드.”
그는 안드로이드라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SF영화에서나 보던 것이 실제로 존재하니 참 신기했다.
“히릭스에 로봇이 얼마나 있지?”
“탐사용 로봇 12대, 전투용 로봇 12대, 다용도 휴머로이드 로봇 12대, 기타 36대가 있습니다.”
“안드로이드는?”
“탐사용 안드로이드 12대, 가사용 안드로이드 12대, 레저용 안드로이드 12대입니다.”
로봇은 72대, 안드로이드는 36대가 있다는 말이었다.
“탐사용과 가사용은 알겠는데 레저용 안드로이드는 뭐야?”
“이따 직접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에바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대한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그사이 전투는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의 델타포스와 러시아의 스페츠나츠는 거의 공멸의 수준이었다.
이미 탄약이 바닥났는지 이제는 대검을 들고 서로를 찌르고 베고 난리도 아니었다.
중국의 탐사대와 유럽연합의 연합군도 이에 못지않았다.
소총에 대검을 끼고는 화끈한 총검술과 육박전을 화려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것들이 아주 완벽히 미친 거 아냐? 왜 이렇게 피를 보지 못해서 안달이지?”
“그거야 각국의 수뇌부가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에바의 대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긍정하고 말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려도 인간의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이좋게 우주선을 연구하면 좋을 텐데.
최소한 히릭스의 껍데기가 뭐로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귀한 시간을 서로 싸우느라 전부 낭비해버렸다.
그동안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 대한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때 입체화면에서 어디서 많이 본 놈의 얼굴이 툭 튀어나왔다.
“어! 저거 유운비잖아?”
“맞습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있네요.”
“하하하! 저놈 명이 질기네.”
“도와줄까요?”
“그래야겠다.”
“비행 로봇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대한은 쾌히 에바의 제안을 승낙했다.
히릭스의 위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곳을 통해 작은 비행 로봇이 빠져나갔다.
“저거 드론 아냐?”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드론인데.”
“드론 같은 저급한 부류가 절대 아닙니다. 비행 로봇입니다.”
에바는 드론처럼 생긴 녀석을 한사코 비행 로봇이라고 말했다.
드론 같은 비행 로봇은 빠르게 공중을 날아서 유운비가 있는 근처의 벽에 박혔다.
상체가 반전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에바가 대한에게 물었다.
“적을 죽일까요? 때려잡을까요? 아니면 재울까요?”
“재울 수도 있어?”
“수면 광선이나 수면 파장 아니면 수면 가스를 쏘면 됩니다.”
“그럼 이 공동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재워버려!”
“네, 마스터.”
대한의 명령에 에바는 즉각 반응했다.
벽에 박혀있는 비행 로봇의 몸체에서 접시 같은 게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미친 듯이 싸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틀거렸다.
이윽고 모두 동시에 수면제라도 먹은 듯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아주 끝내주는데.”
“적을 살상할 게 아니라면 비살상 무기로 이것만 한 게 없습니다.”
“수면 파장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이 무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왠지 앞으로 종종 써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함장님! 파르콘 대령했습니다.”
그때 옆에서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쁜 여자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 누구시죠?”
“저는 안드로이드 L12에요.”
“아! 안드로이드구나.”
대한은 너무도 정교한 안드로이드와 그 미모에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은 할리우드의 미녀 뺨칠 것 같았다.
몸매는 슈퍼모델이 와서 울고 갈 정도였다.
금발의 머리에 호수처럼 파란 눈!
그저 보기만 해도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름은 따로 없고?”
“네, 원하시면 함장님이 하나 지어주세요.”
간드러진 목소리에 애교가 철철 넘쳐흘렀다.
탱크톱에 핫팬츠를 입은 모습이 너무나도 고혹적이었다.
괜히 보기만 해도 불끈한 마음이 생겼다.
“함장님! 아! 하세요.”
“아!”
대한은 L12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입안에 부드러운 열매가 들어왔다.
그런데 씹어보니, 마치 버터를 바른 팝콘 맛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100배는 더 맛있었다.
“이거 맛있다.”
“제가 먹여드릴까요?”
“그럴래?”
먹여준다는데 싫다고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옆에서 또 한 명의 미녀가 나타났다.
“함장님!”
“넌 또 뭐냐?”
“전 L11이에요. 마사지 전문이에요.”
“마사지?”
마사지란 말에 대한은 L11의 전신을 훑어봤다.
이번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여자들처럼 피부가 건강한 갈색이었다.
그런데 체형을 보니 전형적인 글래머였다.
너무나도 착한 몸매를 가진 매혹적인 미녀였다.
안 그래도 몸이 찌뿌둥했다.
사우나에 가서 땀을 쭉 빼고 시원하게 마사지도 받고 싶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한번 마사지를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 한번 해봐라!”
“네, 옷을 좀 벗어주세요.”
“옷을?”
대한은 옷을 벗으라는 말에 바이오풀아머의 성능을 생각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여름 해변을 생각했다.
머릿속에 반바지를 떠올리는 순간!
이미 그는 달랑 반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다.
“아! 하세요.”
“아!”
대한은 L12가 먹여주는 파르콘을 받아먹었다.
“이제 편하게 몸을 뉘어보세요.”
“응.”
이번에는 L11의 말에 몸을 의자에 기댔다.
그러자 의자가 일순 변형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침대처럼 변해버렸다.
L11은 허리에 차고 있는 마사지 오일을 꺼냈다.
손에 듬뿍 오일을 바른 후 대한의 두 다리에 골고루 발랐다.
“아아!”
부드러운 손이 발끝에서 시작해 허벅지까지 쭉쭉 올라왔다.
요소요소의 혈을 자극하고 근육을 꾹꾹 눌러줬다.
점차 몸이 풀어주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대한이 마사지를 음미하면서 눈을 감자 L12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도 도울게요.”
“너도?”
“네, 마사지는 L11만의 전유물이 아니랍니다.”
“그러던지.”
그는 마사지를 해주겠다는 L12의 말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허락해버렸다.
L12는 머리끝에서부터 시작했다.
정수리를 꾹꾹 누르더니 옆으로 내려갔다.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더니 얼굴을 매만졌다.
이어 어깨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 사이!
L11은 발바닥 전체를 꼼꼼히 마사지했다.
그런 다음 종아리로 넘어와 근육을 풀어줬다.
부드러운 손으로 리드미컬하게 마사지를 했다.
그때마다 대한의 얼굴엔 미소가 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