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나는 함장이다>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힘 조절을 해서 옥수수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뇌가 크게 흔들려 그대로 기절해버렸을 따름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니 일이 많았다.
하지만 대한은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공경해오는 미국의 특수부대 대원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휘익 휙 휙익!
필리핀인으로 보이는 자가 그에게 대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대한의 뇌리에 칼리 아르니에가 떠올랐다.
‘아저씨라는 그 영화를 참 재미있게 보긴 했지.’
그는 뒤로 한발 옆으로 한발 물러서며 상대의 대검을 모조리 피했다.
그러다가 급작스럽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놈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목을 향해 대검을 그었다.
하지만 대한은 왼손으로 가볍게 손목을 막고 이마로 상대의 코를 박아버렸다.
빡!
코가 부러지고 코피가 줄줄 흘렀다.
정신이 없고 어지러운지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대한은 놈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팔꿈치로 턱을 갈겼다.
퍽!
상대는 그 한 방에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땅에 무너져내렸다.
투투투퉁 투투투퉁!
이번에는 두 개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대한은 급히 철제상자가 쌓여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는 기관단총의 탄창을 갈고 반대로 돌아갔다.
사선으로 적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컥!”
“으악!”
두 놈의 어깨가 피로 물들었다.
머리를 노려 단번에 끝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을 막는 자가 없자 대한의 굳은 얼굴이 좀 펴졌다.
그는 우주선을 향해 달려갔다.
“멈춰라!”
그때 어눌한 영어로 소리치는 동양인이 나타났다.
손에 들린 것은 피가 잔뜩 묻은 카타나!
조금 전까지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눈에 살기를 띠고 있는 자는 미군의 군복을 입었지만, 일본인이 분명했다.
“넌 뭐냐?”
“죽어랏!”
물어보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고.
대뜸 칼부터 휘둘러왔다.
대한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뒤!
허리에서 권총을 꺼냈다.
“병신!”
탕 탕 탕 탕 탕 탕!
대한은 상대의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양어깨에 골고루 총알을 박아줬다.
“크아악!”
놈은 목젖이 찢어지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어둠을 이용해 칼로 기습을 해서 몇 번 짭짤한 재미를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모두에게 통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대한에게 이런 짓은 그저 어린 아이의 장난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빠각!
그는 걸어가면서 상대의 발목을 힘껏 밟아버렸다.
발목이 으스러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아마 다시는 칼을 들고 설쳐대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이 이미 기절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마스터! 수고하셨습니다. 더는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에바의 말에 대한은 한숨을 돌렸다.
그는 히릭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대한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우주선의 입구가 활짝 열렸다.
눈에 마력을 넣고 살펴보니 함교를 향해 직통으로 길이 뚫려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입구는 매끈하게 닫혀버렸다.
그제야 우주선 안이 불이 들어온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스파이럴 대제국 임페리얼 스페이스 리서치 인스티튜드 소속 우주탐사선 히릭스에 탑승하신 함장님을 환영합니다.”
우주선 내부가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울렸다.
그리고 뭔가 타이틀이 아주 길었다.
‘에바! 나 지금 함장 된 거야?’
―히릭스의 메인 AI가 그렇게 받아들였나 봅니다.
‘졸지에 우주선의 함장이 됐네.’
대한은 히릭스의 메인 AI가 열어준 통로를 이용해 곧장 함교로 걸어갔다.
전에는 입구에 투명한 막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까이 다가가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아!”
함교는 정말 아름다웠다.
멋진 예술품으로 온통 도배해놓은 듯했다.
히릭스가 황실 우주연구소 소속 우주탐사선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그 격이 달랐다.
대한은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그러자 머리를 감싸고 있던 헬멧이 얼굴부터 열리며 뒤로 넘어갔다.
“함장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또다시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지?”
“전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메인 컨트롤 모듈 베인입니다.”
목소리가 딱딱하기는 했지만, 에바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대한은 함교 중앙으로 걸어갔다.
함교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자가 놓여있는 곳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위에서 투명한 유리관 같은 것이 내려왔다.
“함장님의 몸을 스캔하겠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대한의 말에 온갖 빛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
그 안에서 빛의 세례, 아니 빛의 폭탄을 맞은 시간은 정확히 7초였다.
투명한 유리관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공에 에바와 비슷한 형태의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스파이럴 대제국 임페리얼 스페이스 리서치 인스티튜드의 복장을 입은 젊은 사내!
바로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메인 컨트롤 모듈 베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함장님! 베인입니다.”
“반갑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할 말입니다.”
대한은 깍듯한 베인의 태도에 마음이 좀 풀렸다.
1년을 날리고 이런 거대한 우주탐사선의 함장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러자 갑자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밀려들었다.
“함장님! 먼저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상태에 대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응, 해봐!”
베인의 말에 대한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색칠채의 아름다운 빛으로 빛나던 함교의 삼면이 일순 뿌옇게 변해갔다.
그때부터 눈에 잡힐 듯 생생한 입체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워프를 해서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를 뛰어넘었다.
검고 으스스한 블랙홀을 지나 아름다운 성운을 가로질렀다.
온갖 기기묘묘하게 생긴 항성과 별을 지나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구가 있는 은하계로 들어왔다.
녹색의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기 직전!
갑자기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우주탐사선 힐릭스는 함선 선체의 4분의 1을 잃어버렸다.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북극으로 방향을 돌려 불시착을 시도했다.
그 사이 함교를 중심으로 두 개의 무리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선상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상태로 가다간 위험하다는 함장의 판단 아래!
북극점을 향해 플라스마포를 발사했다.
직각으로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우주탐사선 히릭스는 공동 안으로 빨리듯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보조 엔진을 이용하여 반중력장치를 켰다.
히릭스는 중력 반전에 성공해 가까스로 불시착했다.
그러나 불시착할 때의 강한 충격까지 막지는 못했다.
함장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은 그 당시 모두 즉사해버렸다.
함장조차 로봇과 안드로이드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자 함장은 베인에게 우주탐사선 히릭스를 지키고, 수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릭스의 메인 컨트롤 모듈 베인은 함장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켰다.
공동의 입구에 간이 실드를 설치하고 중간에다 강력한 실드를 펼쳤다.
그로 인해 1년 반이 넘도록 아무도 공동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그사이!
함장은 자신의 몸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미 강력한 다중변형 DNA 극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몸을 버리고 전신을 로봇이나 안드로이드로 바꾸기 전에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장은 고심 끝에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우주탐사선 히릭스에서 일어난 반란을 막지 못한 죄!
그것을 스스로 물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길게 동굴을 파고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사용했다.
그리고 입구에 시공간 결계를 쳐놓았다.
누구든지 욕심을 부린다면 오고 가는데 100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만드는 지독한 함정이었다.
‘이게 뭐야! 1년이 아니라 100년이었어?’
―제가 재생수리를 마치고 나서 마스터의 몸에 임페리얼 피코셀을 주입했습니다.
‘임페리얼 피코셀?’
―스파이럴 대제국의 황실 공방에서 만든 아주 특별한 피코셀로 숙주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차원 결계와 시공간 결계 안에서도 성능이 죽지 않는 놀라운 권능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에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뇌리에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따져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도 몰랐지?’
―눼에에! 저도 이런 기능까지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잘못됐다면 난 시공간 결계 안에서 그냥 늙어 죽을 뻔했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에바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대한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삼면에서 쏟아지는 입체영상은 꼭 살펴봐야했다.
히릭스의 메인 컨트롤 모듈 베인은 함장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땅바닥에 구멍을 파고 로봇과 안드로이드를 투입했다.
우주탐사선의 선체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캐다가 정제했다.
창고에 보관중인 스파이럴 대제국 황실 공방의 시약과 희토류를 꺼냈다.
그걸로 히릭스에 필요한 특수합금을 만들어냈다.
메탈셀을 동원하여 워프엔진과 주엔진 그리고 보조엔진도 고쳤다.
대한이 들어올 즈음.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외관은 아주 깨끗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선체 내부는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꾸준히 자가복구를 진행중이었다.
입체영상에는 이제 대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함장이 만들어놓은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가는 장면이 재현됐다.
그때부터 6개월이 지났다.
우주탐사선 히릭스는 마침내 완전히 복구됐다.
베인은 지구의 기술로는 절대 우주탐사선 히릭스를 뚫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자 곧 실드를 풀어버렸다.
이제는 역으로 북극 공동 안으로 들어온 인간을 통해 지구에 관해 연구와 분석을 시작했다.
형편없는 과거의 기술인 전파를 따라갔다.
그리고 지구의 상황을 파악해본 결과!
베인은 지구의 문명이 어느 수준인지 단박에 파악해버렸다.
그래서 히릭스를 발견한 인간들이 뭔짓을 해도 그냥 내버려 뒀다.
시간이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려 할 즈음.
드디어 기다리던 자가 나타났다.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목걸이!
히릭스의 함장을 나타내는 반지를 착용한 사내!
그는 바로 대한이었다.
거기에다 동기화까지 끝난 상태라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는 이제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주인이자 함장이었다.
베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한, 즉 함장을 맞이했다.
이제 우주탐사선 히릭스는 고향인 스파이럴 대제국이 있는 포르낙스 은하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음!”
입체영상에는 베인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서 대한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베인! 내가 꼭 스파이럴 대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소유권을 확실히 해두시려면 한번은 가시는 게 좋습니다.”
“만약 내가 가기 싫다면 어떻게 되지?”
“스파이럴 대제국이 통치하는 포르낙스 은하계로 차원 통신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시면 됩니다.”
“차원 통신?”
대한의 말에 베인은 입체영상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차원의 틈을 통해 스파이럴 대제국에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는 광통신을 말합니다.”
“아!”
그는 순간 고민이 됐다.
이대로 모른 척을 해도 될까?
과연 스파이럴 대제국에 차원 통신을 하는 것을 막지 않아도 무사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쉽게 답을 낼 수 없었다.
그때 에바가 조용히 대한에게 말했다.
―마스터! 스파이럴 대제국에 차원 통신이 들어간다면 아마 다른 탐사대가 지구로 몰려올 것입니다.
‘무슨 뜻이야? 지금 우주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는 얘기야?’
―지구의 문명 수준으로는 스파이럴 대제국의 공격을 단 한 시간도 버틸 수 없습니다.
‘끄응.’
에바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막을 방법도 없었다.
―마스터! 방법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게 뭔데?’
―제가 베인 대신 우주탐사선 히릭스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할까?’
―물론이죠. 마스터께서 그 목걸이와 반지를 끼고 있으실 때는 우주탐사선 히릭스의 주인이자 함장이십니다. 베인에게 명령을 내리면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