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치명적인 매력>
“시간 괜찮으면 저랑 같이 야시장이라도 갈까요?”
“좋아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잠깐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호텔로 데려다줄까요?”
“그냥 여기서 대한TV 보고 있으면 안 될까요?”
“괜찮아요. 하지만 좀 지루하실 텐데.”
“아니에요. 의자도 너무 편하고 전망도 아주 좋아요. 커피와 홍차도 있으니 저에겐 이곳이 천국이에요.”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습니다. 그럼 나나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하죠.”
대한과 그녀는 그렇게 일정을 합의했다.
그는 나나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대한과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테이블을 치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나도 적극적으로 옆에서 도와줬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양치질하고 나자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직원들이 돌아왔다.
그중에는 조동혁과 나단도 있었다.
“케인은?”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었을 겁니다. 같이 가자고 해도 경호를 위해 최소한 한 명은 남아있어야 한다며 끝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조 대리의 말에 대한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확실히 믿고 맡길 수 있는 경호원다운 훌륭한 태도였다.
그는 자신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사무실 가장 안쪽 구석, 창문이 있는 자리였다.
개방형 사무실이라서 크고 작은 회의실을 제외하고는 전부 오픈되어 있었다.
그나마 가장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방해를 받지 않는 장소였다.
―마스터!
‘에바!’
―드디어 진검이 도착했습니다.
‘진검이라니? 아! 주문 제작했던 검이 완성된 거야?’
―네, 마스터. 지금 사무실에 도검제작소의 직원이 배달을 왔습니다.
대한은 에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입구로 가니 젊은 남자가 긴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이대한 씨가 누구죠?”
“접니다.”
“주문하신 검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그는 배달온 도검제작소 직원을 소회의실로 안내했다.
“물건을 확인하시고 인수증에 서명을 부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대한은 대답하면서도 긴 상자를 열고 있는 남자의 손만 쳐다봤다.
“어떻습니까? 맘에 드십니까?”
“오오!”
드디어 기다렸던 진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손잡이를 잡고 검은 칼집에서 칼날을 빼냈다.
서릉!
특수단조 된 칼날은 물결무늬로 이어지며 서늘한 은빛으로 빛났다.
팅!
손가락으로 칼날을 툭 치자 마치 종소리처럼 맑은소리가 났다.
배달온 직원은 대한이 칼날을 살펴보는 동안 열심히 충무공 장검에 관해 설명했다.
“말씀하신 대로 충무공 이순신의 충무공도를 기본으로 만든 충무공 장검입니다. 날 길이 74cm, 전체 길이 106cm, 손잡이 28cm, 무게 1188g입니다.”
그러다가 검날에 새겨진 글자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여기 새겨진 한자는 뭡니까?”
“충무공 장검에 새겨진 시를 똑같이 새겼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 검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렸던 글귀라고 합니다.”
“아!”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뜻을 풀어보면,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이순신 장군의 호연지기가 물씬 풍기는 시로군요.”
“그렇습니다.”
대한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장검을 어디에 진열하시겠습니까?”
“벽에다 걸어놓을 생각입니다.”
“그럼 제가 진열대를 설치해드리겠습니다.”
도검제작소 직원은 참 친절하고 빨랐다.
대한이 앉는 책상의 한쪽 벽!
드릴로 구멍을 뚫고 순식간에 진열대를 설치해버렸다.
충무공 장검을 얌전히 걸어두자 그럴듯한 장식품이 됐다.
물론 진검이라서 당장이라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마스터, 집으로 가져가지 그러십니까?
‘아니야. 새벽에 옥상정원에서 스파이럴 제국기사단의 비전 검법인 크루세이더(SS)를 연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최근 들어 급격히 잠이 줄어든 대한이었다.
환골탈태를 이루고 신체 강화까지 된 상태라서 하루에 4시간만 자도 충분했다.
아니 배틀푸르나(SSS)를 연공하면 하루 2시간도 사실 차고 넘쳤다.
지금은 습관 때문에 조금 더 침대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점점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도검제작소 직원에게 인수증을 써주고 돌려보냈다.
흐뭇한 얼굴로 잠시 충무공 장검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장님, 정반석 변호사와 유화정 회계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디 계시지?”
“회의실로 모셨습니다.”
“지금 바로 가볼게요.”
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들어갔다.
정반석과 유화정이 대한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가워요.”
셋은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를 하나 집어서 마셨다.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덕분에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유화정은 미소로 대답했지만, 정반석은 살짝 삐딱하게 행동하였다.
대한은 정반석의 눈을 쳐다보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합성사진 고소·고발 건은 어떻게 됐어요?”
“원하신 대로 전부 법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도무지 끝나질 않네요. 앞으로도 법정에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정반석 변호사께서 직접 법정에 가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이 정도 사건에 제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죠. 이번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에게 일을 맡겨놓았습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고 보니 괜한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세금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번에는 유화정을 보고 물어봤다.
유화정은 서류를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옆에 계신 정반석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과 브라질에 있는 회계법인과 협력해서 합법적인 절세방법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큰 틀은 이미 합의를 했으니 조만간 구체적인 방법과 액수가 나오게 될 겁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이게 저희가 하는 일이니 당연한 거라고 봐야겠죠.”
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반석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좀 더 큰 집과 스튜디오를 꾸밀 장소를 마련해야겠어요.”
“확실히 지금 있는 오피스텔이 좁긴 하죠.”
유화정이 관심을 내보이며 물었다.
“거기가 18평이었던가요?”
“네, 맞아요.”
“차라리 사옥을 마련하시죠. 아니면 짓는 것도 좋고요.”
“사옥이요?”
대한은 유화정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러자 정반석도 입을 열었다.
“사옥이라고 해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냥 적당한 장소에 적당한 크기의 땅을 사서 빌딩을 지으면 되는 겁니다. 아니면 이미 지어져 있은 빌딩을 사는 것도 좋고요.”
“으음.”
“지금까지 번 돈이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래도 집은 따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빌딩 하나에 회사와 스튜디오를 다 넣고 맨 위 펜트하우스에 머물 공간을 마련하면 됩니다. 잠은 부모님의 빌라에서 주무셔도 좋고, 정 불편하면 별장 개념으로 고급 오피스텔이나 전원주택을 사 놓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일단 일과 쉴 공간을 분리하라는 뜻이었다.
돈이 없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수익이 들어온다면 충분히 생각해볼 방안이었다.
“잘 찾아보면 투자가치가 높은 빌딩들이 있을 겁니다.”
“맞아요. 사옥을 짓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긴 그건 시간도 많이 들고 골치 아픈 일도 많네요.”
둘과 대화를 하다 보니 대충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돈이 들어온다고 계속 쌓아두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절세와 재테크를 위해 주택과 사옥 등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정반석 변호사와 유화정 회계사가 대한이 벌써 투자회사에 투자금을 집어넣고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지금은 연말연시이니 새해부터 사옥으로 쓸 수 있는 빌딩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합시다.”
“네.”
“예.”
셋은 이때부터 한 시간 동안.
대한과 대한TV에 관한 각종 현안에 대해 의논했다.
미팅이 끝나자 정반석 변호사와 유화정 회계사는 그의 사무실을 떠났다.
대한은 베란다로 나가서 나나가 뭐 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그녀는 노트북을 보며 대한TV에 푹 빠져있었다.
혼자 흥분하기도 하고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 나나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자신의 개인방송을 보고 저렇게 직접 반응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반응이 대한에게는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뭘 보고 있어요?”
“아! 오셨어요.”
나나는 빛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확실히 전과는 조금 달라진 분위기였다.
뭔가 남에서 아는 사람으로 변한 느낌이랄까!
하긴 그렇게 대한TV를 열렬히 시청했으니 대한이 남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이 다른 출연자들과 합방을 하는 걸 봤어요.”
“어땠어요?”
그의 물음에 나나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뭐랄까! 어장을 관리하는 느낌이 나네요.”
“네에?”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대한은 깜짝 놀랐다.
“대한은 참 따뜻하고 친절하고 잰틀하고 수동적이고 그러면서도 뭔가 기대를 하게 만드는 남자예요.”
“짧은 시간에 상당히 저를 많이 분석한 느낌이 나네요.”
“이제는 키도 커졌고 몸도 좋아졌어요. 거기에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정말 엄청난 미남이 됐어요. 그런데도 예전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대한은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
“일단은 칭찬이에요. 여자의 처지에서 보면 당신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위험한 남자예요.”
“그래요?”
“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을 내밀면 잡고 싶고,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게 만드네요.”
나나는 말을 하면서 가늘고 하얀 손을 들어 대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순간 분위기가 아주 묘해졌다.
마치 세상에 둘 많이 존재하고 시간이 멈춰진 듯한 분위기였다.
“나 아무래도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안 좋은 면이 있나 봐요.”
“설마 그 나쁜 남자가 나는 아니겠죠?”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얄미워요. 당신이 아니며 여기 누가 있겠어요.”
“난 빠지라고 한 적이 없는데요.”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눈으로 많은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대한은 굳이 그녀의 감정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나의 얼굴에 살짝 섭섭한 감정이 내비쳤다.
“확실히 치명적인 남자가 맞네요.”
“그래서 물러나기로 한 건가요?”
“아니요. 잠시 마음을 고르고 있어요.”
묘한 눈빛으로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데 아래쪽에서는 벌써 서로의 손을 맞잡고 깍지를 낀 상태였다.
“나도 여기 낄 수 있을까요?”
“혹시 개인방송에 출연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일반인은 합방할 수 없는 거예요?”
“뭐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나나는 뜨거운 눈빛으로 대한을 쳐다봤다.
“음, 좋아요. 그럼 오늘 저와 데이트를 하는 콘셉트로 합방해보죠.”
“데이트라면 저도 찬성이에요.”
“방송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돼요. 대한TV의 구독자와 팔로워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신다면 말이죠.”
“아! 알겠어요.”
그제야 나나는 서둘러 대한TV의 구독자와 팔로워 수를 확인했다.
“세상에!”
그녀는 입을 딱 벌리더니 다물 줄을 몰랐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구독자와 팔로워 수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