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대한TV 사무실>
“사장님,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유아영 대리도 수고 많았어요.”
“정반석 변호사님과 유화정 회계사님은 내일 오후에 사무실로 오시기로 했습니다.”
“알았어요.”
유아영도 인사를 하고는 대한의 오피스텔을 떠났다.
대한은 일단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새 옷으로 싹 갈아입고 나자 경호팀을 호출했다.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데럴과 라이스가 벌써 대기 중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갈 거예요.”
“저희는 준비됐습니다.”
“그럼 갑시다.”
“네.”
대한은 오피스텔을 나와 부모님이 계신 빌라로 갔다.
건장한 백인 둘과 같이 걸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모였다.
다행히 오피스텔과 빌라 사이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 금세 도착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소리가 맞았다.
“어머니!”
“대한아!”
빌라의 문이 열리자 김혜영이 튀어나왔다.
둘은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했다.
“아버지!”
“대한아!”
이번에는 이태산까지 나와서 눈물을 글썽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보고 싶기도 하고 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시죠.”
대한은 어머니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용모단정한 여성을 쳐다봤다.
“네가 붙여준 오영아 비서잖아.”
“아!”
그제야 부모님에게 비서와 경호원을 붙여줬던 일이 떠올랐다.
대한은 일단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머니, 아버지! 이쪽은 제 경호원인 데럴과 라이스에요.”
“어머! 백인경호원을 뒀네.”
“그럼 미국에서 백인경호원을 두지 한국 사람을 경호원으로 쓰겠어?”
이태산은 괜히 김혜영을 타박했다.
하지만 김혜영은 이태산의 말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도 않았다.
“반갑습니다. 데럴입니다.”
“저는 라이스입니다.”
데럴과 라이스는 사전에 대한의 부모님에 대해 알아봤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이태산과 김혜영은 송구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때 오영아 비서의 옆으로 인상 좋게 생긴 건장한 정장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엑스원에서 경호를 나온 송영식이라고 합니다.”
“아! 우리 부모님을 경호하러 나온 분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두 분은 저희 엑스원에서 24시간 경호를 맡고 있습니다. 오늘은 집에 계실 거라고 해서 혼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출할 때는 곧바로 지원이 오게 됩니다.”
엑스원은 국내 경호업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업체였다.
정반석 변호사와 유화정 회계사 그리고 유아영 대리가 의논해서 최종결정한 곳이었다.
“이쪽은 미국에서부터 저를 경호해준 데럴과 라이스입니다. 앞으로 협조할 일이 많을 테니 같이 얘기 나누세요.”
“네, 그런데 한국말은?”
“전혀 못 합니다.”
대한의 냉정한 말에 송영식은 꿀꺽 침을 삼켰다.
데럴과 라이스를 무책임하게 송영식에게 맡겨버린 대한은 거실로 들어갔다.
양쪽에서 한 손씩 잡는 바람에 대한은 부모님과 같이 한 소파에 앉게 됐다.
“오영아 비서는 인제 그만 집에 가봐요.”
“네, 오늘은 더 있으라고 해도 못 있겠네요. 내일 뵙겠습니다.”
이태산의 말에 오영아는 웃으며 45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친절하면서도 뭔가 도덕 선생님 같은 딱딱한 분위기였다.
이제 거실에는 한 가족 셋만 남았다.
이태산과 김혜영은 그동안 궁금했지만, 꾹 참고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들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봐! 내가 너 때문에 그동안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아주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다!”
“먼 곳에서 비행기 타고 온 얘한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그럼 내가 못할 말 했어?”
“그럼 당신이 지금 잘했다고 생각해요?”
대한은 부모님이 티격태격하시자 고소를 지었다.
“두 분 싸우지 마세요. 제가 하나씩 설명해드릴게요.”
“그래. U-17 브라질 월드컵 나갔을 때부터 차근차근 얘기 좀 해봐라.”
“기왕 하려면 처음부터 하는 것이 좋겠지.”
이태산과 김혜영은 금방 의견일치를 봤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제가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대한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U-17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할 때부터 로스앤젤레스 벨라코어 FC 대회 때까지!
두 사람은 아들의 파란만장한 얘기에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집중했다.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어떨 땐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 순간엔 눈물을 흘리다가도 다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태산과 김혜정은 대한의 말에 일희일비하며 긴 시간 동안 감정이입을 했다.
대한의 첫날은 그렇게 부모님과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흘러갔다.
그동안 같이 있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밤새도록 회포를 풀었다.
* * *
“대한아! 밥 먹어라!”
“네.”
늦잠을 잔 대한은 급하게 일어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식탁에 가보니 오랜만에 김혜영 여사께서 실력 발휘를 하셨다.
“왜 안 깨우셨어요?”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그랬어.”
“아버지는요?”
“운동하러 공원에 가셨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대한은 식탁을 가득 채운 요리와 음식을 보고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이걸 다 먹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불고기를 집어 밥에 얹었다.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고 씹었다.
잡채와 산나물 무침도 한 젓가락씩 집어먹었다.
마무리는 구수한 된장찌개 국물로 해결했다.
입안에 감칠맛이 돌고 맛이 혀에 착착 붙었다.
엔도르핀이 도는지 행복감이 충만해졌다.
“어때?”
“맛있어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다. 많이 먹어라.”
“네, 역시 음식은 집밥의 최고네요.”
대한은 김혜영에게 주저 없이 엄지 척을 선사했다.
그 모습에 그녀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고?”
“네, 오늘 사무실에 가봐야 해요.”
“그렇구나.”
김혜영은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외출해야 한다는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러 가는 대한의 발길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보스!”
“케인! 나단!”
대한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입구에 붙어있는 방문이 열리며 케인과 나단이 나왔다.
어제는 분명히 데런과 라이스가 있었는데 언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 일찍 교대했습니다.”
“일단 오피스텔에 들렸다가 사무실로 나갑시다. 옷을 안 가져와서 갈아입어야 해요.”
“네, 보스.”
대한의 말에 케인과 나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사장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네.”
이번에는 오영아 비서가 나타나 인사를 했다.
“오늘 사무실 나가실 거죠?”
“네, 그렇습니다.”
“유아영 대리한테 아침에 연락이 왔습니다. 언제쯤 사장님이 사무실에 오실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가서 오피스텔에 들렸다가 옷만 갈아입고 바로 사무실로 갈 거예요. 그렇게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오영아는 대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스마트폰을 들었다.
대한은 어머니 김혜영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며 빌라를 나왔다.
케인과 나단이 곧바로 그의 양옆으로 붙었다.
“여기서는 미국처럼 그렇게 빡빡하게 경호하지 않아도 됩니다. 근접경호보다는 원거리 경호가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근접경호보다는 거리를 좀 두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두 명으로는 원거리 경호 때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근접경호만 아니면 됩니다. 지금 상태로는 너무 시선을 끌어서 좋지 않아요.”
“그럼 적당히 거리를 벌리겠습니다.”
케인과 나단은 대한과 약 10m 정도 거리를 벌렸다.
그제야 그는 좀 홀가분한 기분이 됐다.
오피스텔에 들려 캐주얼 정장으로 갈아입고 바로 나왔다.
새절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내렸다.
4번 출구로 걸어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자 사무실이 있는 두발빌딩의 독특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아영 대리가 나름 빌딩을 보는 안목이 있는 듯했다.
“악!”
그때, 지하철 출입구에서 누군가 휘청했다.
계단을 잘못 밟았는지 젊은 여자 한 명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바로 앞이 계단이라서 잘못하면 중상을 면치 못할 위기였다.
다행히도 바로 앞에 대한이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번개처럼 다가가 손을 쭉 뻗었다.
늦지 않게 여자의 어깨를 붙잡을 수 있었다.
부드러운 여체가 대한의 품으로 들어왔다.
그는 쓰러지려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아리가토?”
갑자기 일본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매우 놀란 여자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일본사람이에요?”
“すみません。일본 사람이무니다.”
대한이 한국말로 다시 묻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고개가 올라가며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벗겨졌다.
하얀 피부에 눈에 확 띌 만큼 아름다운 이국적인 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복슬복슬한 붉은 스웨터에 하얀 주름이 있는 시스루 스커트!
허리에는 가죽과 금속이 교차한 검은 벨트, 신고 있는 것은 형광 색상 운동화였다.
입고 있는 것만 봐도 전혀 범상치가 않은 모습.
그런데 차고 있는 액세서리와 가방을 보니 선명한 명품로고가 박혀있었다.
“괜찮아요?”
“何って言ったの?(뭐라고 말했어요?)”
“난 일본말 몰라요. 영어는 할 줄 알아요? Can you speak english?”
“No. But I speak French.”
“C'est génial. Je peux parler français aussi.(잘됐네요. 저도 프랑스어를 할 수 있어요.)”
“Waouh! Incroyable. Je peux parler français en Corée.(와우! 놀라워요. 한국에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니 말이에요.)”
여자는 대한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하는 일본 여자라!’
대한은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여자에게 프랑스어로 물었다.
“프랑스어는 어디서 배웠어요?”
“어머니가 프랑스인이에요.”
“그럼 아버지가 일본인이겠군요.”
“맞아요. 그런데 당신은, 아니 이름이 뭐예요?”
“이대한입니다.”
“한국 사람인가요?”
“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프랑스어를 잘하세요? 저처럼 혼혈인가요?”
여자는 대한이 자신처럼 혼혈이라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한국분이세요. 제가 프랑스어에 관심이 많아서 배운 거예요?”
“혹시 프랑스에서 사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한반도 프랑스에 가본 적 없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원어민 수준을 능가하는 프랑스어를 구사한다는 말이에요?”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죠.”
“오! 그렇다면 당신은 언어의 천재예요.”
대한의 말에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한은 아주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가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전 나나 히로세에요.”
“아주 예쁜 이름이네요.”
“고마워요.”
대한과 여자, 아니 나나 히로세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왠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특히 나나 히로세는 대한과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자 크게 호감이 갔다.
더군다나 그는 오늘 자신이 크게 다칠 뻔한 것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급히 손뼉을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제가 새까맣게 고 있었네요. 저를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천만에요. 우연한 기회에 운 좋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뿐이에요.”
“그 우연한 기회에 걸린 운 때문에 전 큰 위험을 피할 수가 있었어요.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해요. 제가 사드릴게요.”
“혹시 식사 안 했어요?”
“전 아직 점심 식사 전이에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안 그래도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제 사무실이 저기에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죠.”
“이대한 씨 사무실이요?”
“네, 안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일하시는데 제가 방해될까 봐 그렇죠.”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냥 대한이라고 부르세요.”
“알겠어요. 대한도 절 나나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나나!”
나나는 서서 대한과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 그의 사무실로 가보기로 했다.
두발빌딩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대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강했다.